법학 교수의 영향이 커지고 법률 이론이 점점 중시되고 있는 미국에서 사법제도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아직 판사다. 
판사가 무엇을해야 하는지는 판사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나마 그 안에서 학자들의 역할이 조금 부각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고, 이조차 아직 미미하기 짝이 없다. 영미법의 주인공은 아직 판사다.

대륙법 법률가는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법을 배우는데, 
이는 18세기 이래로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국법이든 국제법이든 학교에서 학파와 학설을 통해 법을 배운다. 사건에 대한 토론은 뒷전이다. 토론 자체가 의미가 없다. 법은 듣고 이해해야 할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법전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법전은 달라졌어도 이전과 같은 수업을 
한다. 여전히 제일 중요한 것은 교수 또는 법 이론서 
저자의 강의다. 독일에서 발달해서 대륙법계 국가 전체로 
퍼져나간 독일법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20세기에 이르면 
개별법에 관한 작은 책자들이 나온다. ‘법‘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 책을 읽는다. 국가가 편찬한 법률보다
학자가 편찬한 법 해설서가 더 권위가 있다.

대륙에서 발간된 법제사 책을 보면 학자들이 법학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법제사를 알기 
위해서 책을 펴본 영미법계 법률가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제사 라고하면 어떤 법령이나 제도가 어떤 
사회적,역사적,경제적 맥락에서변천되어왔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미법의 법제사는 유명한 
판례와 중요한 법률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대륙법은 그렇지 않다. 대륙법의 법제사에는 ‘어떤 
학파가 있었고, 그 학파와 경쟁하는 다른 학파가 있었다‘라는 설명이 대부분이다. 대륙법의 법제사 책을 펴면 제일 먼저 주석학파와 후기주석학과, 인문주의학파가 나온다. 그다음에 18세기 프랑스학파가 나오고, 독일법 제정 과정에서 
있었던 사비니와 안톤 티보의 논쟁이 나온다.
한마디로 법을 주제로 한 사상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법에서는 학자들이 주연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입법자와 행정가, 정치가, 판사, 법률가 모두를 법학자들이 키운다. 학자들이 법 전체를 주무르고 법 관련 자료를 모아 법 이론을만든다. 그런 다음 그 이론에 관한 책과 
논문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입법자와 판사들은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학자들이 만든 이론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법을 만들거나 적용할 때 학자들이 고안해낸 개념을 쓴다. 학자들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향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법을 만드는 사람의 힘이 제일 
세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법관이 말하는 것이 법이다"라는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탁자에 올라온 문제를 파악하고, 어떤 법률을 적용할지, 어떤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릴지 
결정하는 것은 전부 판사의몫이다. 실정법이나 옛날 판례를 뒤지거나, 해결의 지침이 되는 법을 가져와 실제 사건에 
적용함으로써 판사는 법에 생명을 불어넣는역할을 한다. 
대륙법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법이 무엇인지
알려면 학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물론 세상이 조금씩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륙법과 
영미법은 서로 영향을 미쳐왔고, 특히 법을 가르치는 방식의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희미해졌다. 19세기에 탄생한 미국 로스쿨은 대륙법적인 아이디어를 일부 차용해온 것이다. 대학에서 법률가 양성을 목적으로 법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대륙식이다. 이는 영미법계로 퍼져나가 지금은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 영미법 국가에서 로스쿨로 자리를 
잡았다.

다만 미국 로스쿨은 대륙법계의 법과대학과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사례연구(case method)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교육(graduated studies)을 한다는 것이다. 미국 로스쿨은사례연구를 통해 고품질의 법 이론을 만들어냈고, 변호사 배출을목적으로 강의를 한다. 
최근에는 인접 학문의 성과까지 가져와서고민의 폭을 넓혔다. 이런 학제 간 연구와 독특한 교육방식은 대륙법계까지 
소문이 나서 법학자들이 미국 로스쿨에 배우러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나아가 고국으로 돌아가 미국식 로스쿨을 설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대륙법과 영미법은 서로 많이 닮아가고 있다. 물론 가야 할 길이 아직 한참 
멀어 보이기는 하지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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