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대륙법계 판사들이 영미법계 판사들에 비해서 하는 일이 적다는 점을 설명한 바 있다. 영미법을 판사의 법이라고 하는 사람은있어도 대륙법을 판사의 법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대륙법에서는로마 시대 법관의 이미지, 절대왕정 시대 판사의 전횡, 프랑스 혁명이념에 따른 판사의 역할 축소 등이 영향을 미쳐 판사가 할 수 있는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찌감치 정해져버렸다. 법실증주의, 삼권분립의 원칙, 역사적인 법전화 작업, 법의 해석에 관한 원칙론,
법적 안정성에 대한 집착, 판사의 재량권 불인정, 선례구속의 원칙부정 등이 합쳐져 판사는 점점 더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전락했고, 그에 반비례해서 입법자는 점점 더 중요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한때 입법자가 완전하고 명확하며 흠이 없는 법을 만들어주고, 해석조차 필요 없게 해주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입법자 편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법자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법은 입법자가 만드는 것이고, 판사도 법을 해석할 때는 입법자의 명시 또는 묵시의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대륙법에서 입법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영미법에서 판사가 차지하는 위치에버금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그 사람들 생각대로현실이 돌아간 적도 있다. 입법자가 진정한 주연 역할을 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법자는 주연 자리를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민족국가의 이론을만들고, 법실증주의의 기초를 닦고, 삼권분립의 원칙을 선언하고,
법전의 형식과 구성과 내용을 확정하고, 법관의 기능에 대한 다수견해를 내놓은 사람들, 바로 법학자다. 법학자이자 교수인 이들이 실제 대륙법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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