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대학들은 이처럼 대학의 기능 혹은 고등교육의
철학적 토대에 관한 물음을 둘러싸고 고민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 변천과정에도 불구하고 전통 학문의
보존 및 계승 발전을 도외시했던 적은거의 없다.
전통 학문의 보존 및 계승 발전을 통해 지금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독일 대학들에서는 지금도 문학,철학, 신학 등 관련
분야에서는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반드시 해야 한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경우에는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
용어를 가져다쓰기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후설이
현상학이라는 영역을 최초로 창시하면서 노에마, 노에시스, 에포케 등 그리스어를 다시금 사용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1828년 나온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미국
고등교육 철학을 지배한 예일 리포트」는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으로 구성된 전통적 교육과정이야말로 그 자체의
직접적 실용성을 떠나 정신훈련과 도덕 함양에 큰 기여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런 전통은 최근까지도 예일대와
프린스턴대에서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찰스
엘리엇 총장이 취임해 ‘선택과목제‘를 도입함으로써 고전
과목을 피해 갈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선택의 문제를 놓고 고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서구의 대학들이 최근까지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현대의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돼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고전의 근본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자각에서 따로 어학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전통 학문에 대해 이룩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풍부하다. 물론 각 분야별로 전통 학문을 연구하는 분과들이 마련돼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그것은 현대 학문을
하더라도 공통 배경을 이루기 때문에 쉽게 대학의정신,
시대의 정신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전통과 현대가 대학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구의 대학들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한편
전래돼 오던학문을 대학의 제도 안에 체계적으로 흡수하는 계승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전통적 학문의 제도화‘라고 하는 것은 한 사회의 역사적 계승과 미래의 전망을 세우기 위한 토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작업이다. 그런데 우리의 앞 세대는 이것을
허접쓰레기 취급을 하고 일순간에 폐기 처분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그나마 서구의 학문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따라서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전통 학문의 존재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데서 우리의 학문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