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이 완벽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은 대부분의 법학책에서도 이미 찾아볼 수 없다. 교과서에는 입법의 공백을 해결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조항들을 조화롭게 해석하느라 고심한 판결문으로 가득 차 있다.
법률의 문언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변해서 그 의미가 변하는 것도 많고, 입법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뒤늦게 튀어나오기도 한다. 법률이 아무리 분명한 답을 주고 싶어도 사실관계는 그런 법의 답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실제로 어느 쪽이 이길지는 사실관계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불가능하다.
법률을 해석함에 있어서 단어의 조합을 통해서 표현된 문언의 본래 의미와 입법자의 의도를 제외한 다른 어떤 요소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사건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항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와 유사한 사실관계에 적용되는 조항을 유추 적용하고, 그런 방법도불가능한 경우에는 법의 일반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이 문구를 보고 법실증주의가 승리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사람은별로 없을 것이다. 원래 자연법이란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법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와서 사회질서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법이 자연법이다. 자연법학과는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자연법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인 자연법이다. 학과는 다르지만, 국가가 제정한 실정법과는 다른 ‘바람직한 법‘의 대명사가 자연법이라는 점에서는 견해가 같다.
그런데 19세기 어느 시점부터 ‘자연법‘에서 ‘자연‘이라는 글자가 빠져버린다. 즉, 자연법이 곧 법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자연법과 실정법이 호환 가능한 것인지 토론의 여지가 분명히 있는데도, 앞에서 인용한 이탈리아 법률은 그런 여지를 없애고 말았다. 다른 대륙법 국가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법‘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연법 대신 국법을 하나의 완성품으로 간주하고 만다. 이것을 우리는 법실증주의라고 한다.
나중에 개념법학을 다룬 제10장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지만, 유추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앞의 인용문이 제시하는 해법은 사실 법실증주의자들의 견해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법률에 흠결이 있을 경우 실증주의 법학자들이 세워놓은 이론체계 가운데서 그 해법을 찾으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륙법계 국가에서 법률해석과 관련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법관은 해석권이 없다‘는 종래의 도그마를 어디까지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점이다. 아직도 법관은 법 적용만 하면 된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새로운 법학 이론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위 이익법학과 사회법학, 현실주의법학이 그것이다. 가령 스위스민법은 판사에게 어떤 해석원칙으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만약 당신이 입법자였다면 제정했을 법률 조항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이전과는 다른 발상이다. 판사도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물론 다수설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소수 견해가 다수 견해를 넘어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판사의 법률해석권을 부정하는 태도는 대륙법 전통의일부로 아직도 살아 있는 셈이다.
앞서 본 것처럼 대륙법 세계에서 판례는 법이 아니다. 종전의 판례가 다른 사건에 관해 그 사건을 재판하는 법원을 기록하는 순간판사는 법 제정권이 없다는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어떤 법원도 다른 법원의 결정에 따를 의무가 없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어떤 쟁점에 대해서 상급법원이 명확한 해법을 제시했더라도 하급법원이 그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실무는 이론과 다르다. 선례구속의 원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관은 종전 판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는 판결문을 공표하고, 변론을 준비하는 변호사들은 종전 판례를 참조해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판사도 물론 자주 판례를 들추어 본다. 혁명 이론이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영미법계 법관들만큼이나 대륙법계 법관들도 종전의 판례에 충실하다. 대륙법계 법관들이 판례를 참고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종전의 판례가 권위 있는 법원의 견해이기 때문이거나, 이 론적으로 탁월하기때문이다. 혹은 법관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가 귀찮거나, 나중에 파기환송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전부 영미법계에서 선례를따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례구속의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대륙법과 영미법을 나누는 것은 오해이며, 과장이다. 대륙법계 판사들도 선례를 따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다. 반대로 영미법계 법원도 따르기 싫은 선례는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가 내린 결정을 뒤집기도 한다. 이것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은 아직도 힘이 세다. 대륙법계 법률가들은 자기 국가 판사가 법 대신 종전 판례를 보고 판결한다는 사실을 애써무시하고, 영미법계 법률가들은 선례라면 무조건 따르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대륙법과 영미법의 차이는 ‘실제 법원이 어떤식으로 행위하는가‘에 있지 않다. 법원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판사를 입법자와 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기계를 매뉴얼대로 돌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판사는 정해진 법을 적용하는 일만 하지, 자기 양심에 따라법에서 정한 것과 다른 판단을 하는 능력은 없다고도 한다. 과연 그런지, 다음 장에서 형평법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대륙법과 영미법상 판사의 이미지 차이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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