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이 행복인가? 강한 쾌락은 사실상 강한 고통에 불과하다. ‘쾌락주의의 역설‘에 근거해서 많은 반론들이 제기된다. 이에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주장을 가다듬는다. 따라서 그의 기본 주장의 해석에는 주의가필요하다.
에피쿠로스는 보통 말하는 모든 종류의 달콤한 감각적 경험을 쾌락‘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특수한 어떤 것, 즉 육체적 무고통과 영혼의 무자극(atarxia 아타락시아)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안정 상태이다. 쾌락은 욕망과 욕구 충동의 무제한적 충족이 아니다. 영혼이 완벽한 평온에 이르기까지 진정시키고 차분해짐이 쾌락이다. 여기에서 쾌락이 성립한다. 이것은 사실상 일반적으로 말하는 ‘쾌락‘이 없는 상태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감성에서, 스토아학파는 이성에서 출발했다. 서로 정반대이다. 스토아학파는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옥죄는감성을 소멸시키라 한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완전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유를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둘은 다 이성의 발휘로 수렴된다.
물론 중요한 차이도 있다. 사람의 행동의 목표가 쾌락이다. 쾌락은인생을 성공적인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쾌락 속에서 보낼때 행복한 것이지, 우리가 정의롭거나(플라톤) 혹은 명상에 헌신할 때(아리스토텔레스) 행복한 것이 아니다.
행복이 쾌락이라는 것은 에피쿠로스에게 명백해 보인다. 아이들이본능적으로 쾌락을 주는 것을 선택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건다. 그는 이 사실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증명한다. 이러한 행동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서도 관찰된다. 모든 인간은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 인간이 각자 최종적으로 추구하는것은 행복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행복이다.
이 주장은 근대에 영국의 흄 등의 공리주의로 계승된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따르면 삶의 목표는 쾌락이다. 이 쾌락은감각적 향락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영혼의 안정‘이라는 담담한 쾌락이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주의가 맞다. 이에 대해서 반론이 많다. 에피쿠로스의 논증은 존재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오류와 애매어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쾌락주의는 행복한 삶을 충분하게 규정하지 않았는다. 또한 예컨대 살인자가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잘못된 판단을 초래한다.
도대체 왜 결정론을 옹호하는가? 고대에 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흐름을 예정하는 운명(fatum)을 믿었다. 운명이 있다면, 세계는 결정론적이다. 결정론은 고대의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연과학을 참조하면서 유지된다. 우리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사람의 몸은 물리적인 원소들로써 구성된다. 이러한소립자와 원자 분자들은 기계적 방식으로 통합된다. 기계론적 법칙들은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도 미리 정해져 있다.
이 논증은 몇 가지 취약점이 있다. 그 여러 전제들 중의 하나가 기계론이다. 세계가 기계론적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이 세계가 기계론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먼저 입증되어야할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은 기계론적 법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결정론을 지지하기 위한 강력한 근거로 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대상인 물질적 사물은 자유 의지가 없다. 반면 사람은 자유 의지가있다. 기계론이 적용되기 어렵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아니다. 이 세계는 결정론적이거나 비결정론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면 우리는 부자유하고, 비결정론적이어도 우리는 부자유하다. 여기서 결론은 우리가 어쨌든 부자유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에 반대해서 결정론과 자유‘의 비양립주의자들은 비결정론적인 세계에서는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연쇄 운동의 첫 운동자, 즉 ‘부동의 운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 - 이러한 자유는 현실적인 인간의 자유와 맞지 않는다. 이는 자유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물리적인 것의 닫힘 원칙에 모순된다.
‘결정론과 자유‘의 양립론은 지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종류의 자유는 이 세계가 결정론적일 때에도 주어진다.
비관주의는 "의지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문제는 의지의 자유가 없으면, 행위의 책임도 없다는 점이다.비관주의에 따르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귀속시킬 수 없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무신론자는 ‘신‘이라는 말의 대상(G)은 오직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신이 없음)의 의미가 그것이다. 여기서 무신론자의 주장에는 하나의 문제가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있는 존재(G1)를 생각한다면, 실제로 현실에 있는 똑같은 존재(G2)를 생각할 수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어 왔다.
기적 논증은 잘 증언된 초자연적 사건들을 참조하라고 알려 준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기적일 수 있는 개연성을 확인해 보면, 기적 논증은설득력을 잃고 만다.
목적론적 증명은 생명체와 인공물의 유비를 통해서 지적인 기술자의 존재를 추론한다. 그러나, 이 유비는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에는너무 약하다. 게다가 진화론과 같이 더 큰 설명력을 가진 이론이 있다.
인과론적 증명은 질서잡힌 우주의 존재로부터,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최초 원인으로서의 신을 그러나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신이어야 한다는 근거가 없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신‘이라는 개념에서 신의 존재를 도출해낸다.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말인 ‘이다‘는 실재함을 뜻하는 ‘있다‘와다르다. 이 증명은 언어적인 혼동에 기초해 있다. 변신론은 신의 존재에 반대하여, 세계 내에 악이 있다는 것을 들어 논증한다. 신은 전능하고 선하기 때문에, 그 어떤 악도 창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계에는 악이 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만일 신 존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거나, 신이라는 가정이 설명상에 아무런 차이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파스칼이 제안한 내기를 해 보거나, ‘오컴의 면도날‘에 따라 ‘신‘이라는 개념을 우리의 이론에서 삭제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감각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나무를 볼 때, 우리가 지각하는 것처럼 나무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믿는다. 감각으로 지각한 것을 그대로 믿어도되는가? 아니다.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속에 담긴 곧은 막대기는 구부러진 것처럼 보인다. 해가 땅의 공기를 뜨겁게 달굴 때, 우리는 신기루를 본다. 고속도로 위에물이 없는데, 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신기루를 본 것이다. 이처럼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 따라서 감각 경험은 학문을 위한 확실한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감각하는 것처럼 세계가 그렇게 보이는지 확신할 수 없다해도, 우리의 지각이 실재하는 대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실재한다면, 우리는대상의 존재를 학문의 기초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세계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많은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이것들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대상들을 지각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가 같다고 의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정할 기준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데카르트 등은 가장 확실한 인식의 대상을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관념‘(idea)이라고 한다. 토마스 리드(Thormas Reid, 1710-1796)는 대상과 우리 사이에 관념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우리는 관념이 아니라, 대상을 직접 지각한다. "내가 이 나무를 보고 있다"라고 할 때, 세계 속의 한 대상을 지각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는 우리 지성 (상식)의 발로이다.
로크는 사람이 눈코입귀의 다섯 감각 기관으로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세세하게 탐구한다. 그는 이 지각을 외적 지각과 내적인 자기 지각으로 나눈다. 외적 지각은 대상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다. 내적 지각은내 마음의 감정 욕망의 자각이다. 이렇게 들어온 지각 내용들은 다시 관념(ideas)이 된다. 관념은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는 심상들이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나무를 볼 때, 이 나무의 심상 또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
이 관념은 결국 나무의 단순 모사이기 때문에, 나무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것이다. 지각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외부대상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시 관념을 단순 관념 복합 관념, 추상 관념으로 나눈다. 단순 관념 (simple ideas)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 감각 지각을 통해 마음에직접적으로 만들어지는 관념이다. 여기에는 형태, 색, 소리의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내가 나무를 지각한다면, 다양한 단순 관념들의 다발을 가지게 된다. 나무는 여러 색 형태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음은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거나 불려서 복합 관념과 추상적 관념을 만든다. 복합적 관념의 예가 ‘금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관념이다. 이러한 산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속에서 ‘황금‘이라는 단순 관념과 ‘산‘이라는 단순 관념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면 ‘황금 산‘이라는 복합 관념이 생긴다.
지각과 독립적인 ‘물질적 사물 그 자체는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이불가능하다면, 왜 ‘물질적 사물‘(실체)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는가? 그런것은 없다.
버클리는 그것을 삭제해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삶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대상 사물‘(실체)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인식한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지각된 내용‘ 관념일 뿐,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버클리는 단언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됨이다!" (Esse est percipi)
‘선험‘이란 ‘경험 이전‘이라는 뜻이다. 선험론은 마음 안에 경험을 초월하고 넘어서 있으면서, 경험적 지각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감성의 형식, 오성의 12범주, 이성의 안티노미가 바로 그런 조건이다. 이를 통해서 선험론적 관념론은 실재론과 관념 실재론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칸트는 대상 사물을 ‘현상‘과 ‘사물 그 자체‘ (자체)로 구별한다. 물자체가 현상을 우리 마음에 보내면, 우리는 현상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물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는 관념 실재론과 대상 실재론을 결합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 지각과 독립된 물 자체가 존재한다. 물 자체가 바로 대상 사물의 실체이다.이는 실재론과 같다. 우리의 마음이 현상만을 지각한다. 이는 관념만을 지각한다는 버클리의 관념 실재론과 같다.
칸트는 선험론적 관념론을 주장한다. 관념실재론의 비상식적 결론을 배제하고, 그 장점만을 수용하려 한다. 그는 현상과 물 자체를 구별한다. 물 자체는 현상을 내보낸다. 우리는 현상은 지각하지만, 물 자체는지각할 수 없다. 물 자체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물 자체를아무런 손해 없이 삭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의 입장은 관념 실재론과 다름 없게 되고, 관념 실재론이 받는 반박에 그대로 노출된다.
회의주의로부터의 출구: 이들은 외부 세계의 실재 문제보다, 회의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다. 비트겐슈타인과 스트로슨은 일상 언어의 기초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회의주의를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한다. 일상 언어는 외부 세계의 실재를 기초로 해서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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