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주리‘와 ‘주기‘라는 용어 자체는 사단칠정논변에서 이황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가 이 용어들을 사용한 맥락을 보면 그것은 심성론의 관점, 즉 지각의 차원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와 기리는 지각의두 요소 중에서 사단의 도덕감은 ‘리를 주로 한 것‘으로, 칠정의 일반감정은 ‘기를 주로 한 것‘으로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리는 선험적인 원리들을 함축하고 있는 이성일 뿐만 아니라, 지각상에서 자각되는 당위준칙의 출처로서 도덕적 이성을 의미한다. 기는 육체형기와 감각기관, 그리고 외물을 지각할 때 받아들이는 감각적 질료와이것에 연결되어 있는 심리적 감성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 점에서 주리와 주기는 존재론보다는 지각론적인 어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대승과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황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단을 선험적인리 위주로 설명하는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단과 칠정을모두 경험적인 방식으로만 설명하는 입장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황은 주리론이고 기대승과 이이는 주기론이라 볼 수 있으며, 지각론적 맥락에서 각각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자연주의, 심리주의)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리 주기 개념을 주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본래 그것은 존재론보다는 심성론, 구체적으로는 지각론적인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주리 주기 도식은 조선성리학에서도 출된 것이지만, 인식론적 맥락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철학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희 이후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송명리학은 대체로 주리의 입장을 취하다가 청대 고증학과 일본 에도시대고학에 이르러 점차 주기론이 강세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증을 중시하는 주기론의 입장이 문헌 고증의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주희의 철학적 입장과 노선을 이황과 이이 중 누가 더 정통으로 계승하였는가 라는 도통론의 관점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철학에서는 독창성이 중요하지 누가 무엇을 더 충실히 계승하였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통론은 학문적 논리나 합리성이 기준이 되는 것이아니라, 흔히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이나 학파의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려는 의도를 배후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도통론은 철학에서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인 이황이나 이이의 철학을 해석하는 바람직한관점과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주성리학의 철학적 근본 문제, 즉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문제와 방법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다. 그들의 철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문제와 접근법이 가장 적절하다.
대체로 중국 명대의 유학자들에 비해 조선성리학자들은 지각론적인 분석을 좀 더 중시하는 경향을 띤다. 이러한 성향적 차이에 근거해서 중국은 변증법적인 종합을 중시하는 반면, 한국은 논리적인 분석을 중시한다고 단순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황이 기대승의사칠논변에서 했던 다음 언급은 조선성리학의 이러한 특성을 잘 말해준다.
"내 생각에는 다른 것 가운데 나아가 같은 것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 두 가지를 하나로 뒤섞어서 말한 경우가 진실로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것 가운데 나아가 다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두 가지는 나아가 말한 것이 본디 주리와 주기의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와 기로 분속시킴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여기서 이황은 기대승이 사단과 칠정을 하나로 하여 뒤섞어서설명하는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비록 기대승이나 이이도 이황 못지않게 분석적인 경향을 내보이고 있지만, 그들은 ‘혼륜‘이라고 하는 뒤섞어 말하는 관점을 나타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본체론적 경향과 사유가 기대승과 이이에게 내재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황은 사단과 칠정에 대한 분석에서 각각 나아가 말한 것에 주리와 주기의 다름이있다고 주장한 것이고, 이에 대해 기대승은 그렇게 나누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황의 주리론이 지각론의 성격을 띤다는 점은 완성된 호발설의 명제인 "사단은 리가 발하되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하되 리가 올라타는 것이다"라고 말 하게 되는 전후 맥락에서 잘 나타난다. 이황의 논쟁상대인 기대승은 주기의 입장에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석할 수 없으며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도 천명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지각의 입장을 수용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지각을 구성하는 형식적인측면에 국한되었다. 천지만물의 리와 기는 인간에게도 적용되므로, 지각의 재료는 기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주재하는 원리는 리가 된다. 기대승은 이러한 지각의 형식에 초점을 맞춰서 사단과 칠정 모두 리와 기가 결합한것이므로 리와 기로 분속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칠징을 사단과 대립시켜 각각 구분되는 것으로 말한다면, 칠정과 기의 관계는 사단과 리의 관계와 같습니다.그 발하는 것이 각각 혈액이 있고, 그 이름이 다 가리키는 바가 있으므로 주가 되는 바에 따라 분속시킬 수 있는것입니다. 나도 친정이 리와 상관없이 외물이 우연히 모여들어 감응하여 움직인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 사단이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도 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일 뿐입니다.
사단이든 실정이든 지각의 요소로서 리와 기가 모두 작용하므로 나누어분속시킬 수 없다는 기대승의 비판은 사실상 지각론적 맥락에서 이황의견해를 공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지각의 요소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내용상에서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주희가 지각된 내용으로써 구분했던 도심과 인심에 각각해당시키면서 양자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도덕감정으로서 사단은 도덕이성(리)이 발동하되 그것에 질료가 따라가서 그대로 당위의식(도심)이 성립되는 것이요, 일반감정으로서 칠정은 육체적 형기와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경험적 질료가 발동하되 그 위에 지각의 원리가 작용함으로써감각적 의식(인심)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 당위적 내용 자체는 모든 감각적 질료를 초월하여 오로지 선험적인 도덕이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칠정의 일반감정도 도덕감정처럼 리가 필요하지만, 이때의 리는 지각의 재료를 주재하는 지각의 원리를 의 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칠정의 내용은 육체적 형기 (감각기관)가 외부와 감응하여 유입된 경험적 질료(기)로부터 온 것이다. 이황의 호발설의명제는 지각의 차원에서 도덕의식과 일반의식을 리와 기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반면 기대승의 경우 지각의 형식적 요소로서의 리와 기가 사단칠정에 공통적으로 개입되지만, 도덕적 선악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준은 리와 기이외에 따 로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자연적인 심리적 결과인 칠정 가운에 외부 상황에 부합하고 예의 절목에 들어맞는 것을 사단이라 칭할 뿐이지, 칠정 이외에 별도의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단을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규정할 수 있는 내적인 근거는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 생명의 선만을 보고 도덕 생명의 선지선을 무시하는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기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자연히 발현한 것이 곧리의 본체의 그러함이다"라는 기대승의 주장은 지각한 상태가 객관적 규범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황은 이러한 주장이 오류라고 보았다. 그것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의 결합이라고 하는 지각형식상의 공통성 때문에 동일시하되,지각된 내용에 대해서는 양자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로 뒤섞어 혼륜시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사단의 지각 내용의 근원이 되는 리를 마음속에서 자각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내 리와 기를 동일시하는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황도 지각작용에 있어서 도덕이성으로서 리와 경험적 질료로서 기가 모두 필수불가결한 두 형식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사단칠정의 지각된 내용은 서로 다르기때문에 하나는 리를 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기를 주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지각 내용은 순수하게 선한 도덕이성으로부터 나 온 당위의식이므로, 외부 대상에 의한 일반적 감각이나 감정과는 달라야 한다. 칠정이 경험적 질료인 기에 의해 촉발되는 수동적인 감정이라고 한다면, 사단은 경험을 통해서 지각하되 내용상 도덕이성(리)으로부터 발출되어나온 능동적 감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의 지각 내용적 근원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이황의 입장은 도덕적 선과 가치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경험을 경유하되 경험적 질료의 감각 내용을 초월한 것으로서, 순전한 도덕이성의 발로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황의 도덕론은 주희의 인심도심론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이 사망한 후 일어난 성혼과의 논쟁에서 이이는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다 기대승의 입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기대에 비는해 이이의 주장은 좀 더 명확했다. 그는 이황의 호발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여 리가 올라탄 것일 뿐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다. 기대승에 비해 이이는 체용 개념에 근거한 존재론적인 리와 기를 강조한다. 즉, 이이는 "발동하는 것은 기요 발동하는 까닭은 리이니, 기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리가 아니면 발동할 까닭이 없게 된다"고 말한다.
이황이 지각론에 있어서 주리론(이성주의)을 나타내는 반면 이이는 주기론(경험주의)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주리론은 지각의 두 요소에 있어 리로 지시되는 당위의 원천으로서의 선험적 도덕이성을 중시하는 반면, 주기론은 이성을 중시하는 감성의 원천이 되는 심리-육체적 에너지와 경험적 감각 질료를 의미하는 기도 주목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의는 마음이 반한 것이며, 마음은 성과 정의 주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발하기 전에는 마치 태극이 동정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나, 음양으로 나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하나의 마음속에 혼연히 하나의 성이 있으니 순선하고 악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이미 발한 때에 이르러서는 마치 태극이 움직여서 양이 되고, 고요하여 음이 되어 나눠진 것과 같습니다. 이때 기가 활동을시작하기 때문에 그 정의 발함에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을 수가 없는데, 그 시초는 매우 미약합니다. 이에 의는 심이 발한 것으로, 또 그 정을 끼고 좌지우지하는데, 혹은 천리의 공정함을 따르고, 혹은 인욕의 사사로움을 따라 선과 악의 구분이 이로 말미암아 결정이 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의가 선과 악을 가르는 기미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리로부터 발출하였으므로 순선한 반면, 칠정은 리에 기의 활동이 겸해졌으므로 선악이 있게 된다. 결국 선악의 기원 문제로 볼 때, 사단은 리에 기원하고 칠정은 리와 기가 같이 작용하지만 주로 기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황은 다음처럼 주장한다. "이로써 보면 두 가지가 모두 리와 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온 근원으로 인하여 각각 주로 하는 바와 중하게 여기는 바를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을 리라 하고 어떤 것을 기라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말하자면, 이황은 우주론적인 리와 기에 의해 사단칠정의 선악이 결정된다고 본것이다. 그는 우주론(존재론)적인 도덕론의 관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퇴계 철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한마디로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이해와 심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호발설은 그의 지각론을 대표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황은 조선 성리학에서 지각과 인심도심에 관 한 논의를 싹틔우고 발전하도록 이끌었던 선구자로 평가될 만하다. 이황의 철학적 지향성은 이이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이황에 맞서서 새로운 지각 개념과 인심도심론을 구상하게되지만, 이는 이황이 선구적으로 개척하게 되는 지각론의 틀을 수용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이는 결코 지각론적 인심도심론에 갇혀 있지만은 않았으며, 그것을 벗어나는 새로운 철학적 방법과 비전을 모색하였다. 이는 율곡 철학이 정이와 주희, 그리고 이황과 다른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진척시켰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