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규범과 현실로 비추어본 우리사회의 모습














사법적극주의 - 진보와 보수

법학 또는 법학방법론의 논제로서 ‘사법적극주의‘는
 ‘사법소극주의‘의 반명제로 부각되어 왔다. 논리적으로 
사법소극주의가 좋은 것이라면 적극주의는 나쁜 것이다. 하지만 A. Maslow의 말을 
빌리면 망치 외에 도구를 알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방법론적 제약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을 못으로 간주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는 이른바 ‘기계적인 법률학‘(Mechanical Jurisprudence)이나, 그 이론적 토대인 ‘개념 법학‘ 및 법실증주의‘의 방법론에 집착하지 않는 한 ‘사법소극주의‘도 바람직한 법관의 태도로 단정하기는 어렵거니와, 법원 또는 
법관에 대한 보수적인 ‘역할기대‘와 그에 따라 ‘적극적인 사법‘을 일종의 
‘모순의 형용‘(oxymoron)이나 폄하의 수식어로 사용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기계적인 이항대립의 논리형식에서 사법적극주의를 
흔히 잘못된 결정미나 법관의 그릇된 태도와 동일시하는
 ‘비난의 용어‘로 사용하고는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 적극적이라는 용어는 그 정의조차 유보된 상태에서 실체적인 정치적 입장에 따른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학적 수단일 뿐이다. 흔히 적극주의 또는 소극주의와 
실증적으로,논리적으로 연계된 것으로 오해하는 가운데 
법관, 특히 대법관의 정치적 성향으로 주목되는 이른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간의 교차의 맥락에서 보면, 
보수에서 진보 쪽으로 정치적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경우 
보수주의자들은 법원과 법관에 대하여 적극주의의 포기와 소극적인 절제의태도를,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적 법관들이 과거에 내려진 보수적 결정들을 그대로 추정하기를 원하는 이른바 ‘진보적인 사법소극주의 (liberaljudicial restraint)를 요구할 것이고, 반대로 진보 측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폐기 및 변경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 또 한편 법원에서보수주의가 새로 부상하는 경우라면 진보주의자들은 법관에 대하여 절제의 태도, 말하자면 이른바 ‘보수적인 사법적극주의‘ (conservativejudicial activism)의 포기를 주문할 것이다.

법실증주의적 법학방법론에서 가장 경계하였던 것은 법관이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 도덕철학, 정치적 성향, 기타 정책적 판단과소신에 따라 법을 변경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교조적인 논의의 틀을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사법의 주관성에 대한 미러한 우려와 경계의 태도는 오늘날의 주류법학에서도 상당 부분 그대로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시종일관 지배하는 핵심요소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공동체생활 속의 질서와 평화, 안전추구, 그리고 가치의 정당한 배분과 조정을 통한 정의구현의 중요한 결정, 즉 법운용의 주관자는선출되지 않은 법관 또는 법원이 아니라 오롯이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정치적 책임을 지면서 결정을 내리는 의회입법자이어야 한다는 ‘법치국가‘ 또는 ‘법의 지배‘의 결정체계에 대한 정치적, 정책적 판단이다.
위헌법률심판과 관련한 헌법도그마틱의 명제로 제시되는 ‘사법자제‘
의 요청이 이러한 입장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는 것이거니와, 다만 이러한 자제요청은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반적인 사법실무에서도법문의 한계나 의회입법자의 존중 등 ‘합헌적 법률해석‘ 또는 ‘헌법지향적 법률해석‘의 한계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헌법과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작업이 도덕철학적인 가치판단이나정치 및 정책적 판단이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에서 ‘법적 판단‘, 즉 고전적인 법학방법론상의 도그마틱적 규준(canon)에 의해 엄격하게 제약되는 가운데 민주적인 입법자에 의해 실증적으로 선결되어 법문으로 정리되어 제시된 법률에 대하여 개념분석의 방법으로 수행되는 연역의 ‘법적 추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우에 법관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사법적 재량‘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결정을 자제해야 한다고 하는 사법소극주의가 그것이다.

법은 적나라한 ‘현실‘이면서도 이 현실을 ‘이념‘에 연관짓고, 종래는 이 인간사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실존적 ‘결정‘을 감행하는 ‘트릴레마‘의 숙명을 안고 있다. 법은 결코 다른 식으로는 다룰 수 없는 갈등해결을 위해 이 ‘트릴레마‘ 속에서 불완전한 합의를 추구해가는 것이기에,
인간사에 관한 그 어떤 이론도 법의 그것만큼이나 불안정하지는 않을것이다.

법관이 법적 추론과 그 결론인 판결을 정당화하는 ‘법적 논증의 양식 중에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횡설수설, 중언부언으로 법적 문제로서 사법적극주의를 논의한 내용 중에 법이론 및 법학방법론을 개관한부분은 하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역적인 논증이 법적 결정을 정당화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면, 또는 충분한 것으로보자는 약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있는가? 적어도 논리적으로 완벽한 객관성의 요청에 부응하는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언어로 논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해석작업을 일종의 ‘예술‘(Kunst)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법관을 작곡자와의 관계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비유하는 것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는 합의가 있다고 생각하거니와, ‘이성‘(Vernaft)과 감성(Herz), 그리고 기술(Technik) 세 가지를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덕목으로 제시하는 Horowitz가 자신이 하는 Chopin 연주의 정당성을논증할 수 있는가? 119)입법자와 법관의 관계를 작곡자와 연주자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법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법적극주의가 법적 문제로 성립이 되고, 적어도 ‘태도에 대한 태도‘는 법학과 법실무상 중요한관심사로 계속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되묻건대, ‘Her-cules 법관‘은 사법적극주의자인가, 소극주의자인가? 집요하게 법과 언어의 관계를 탐구해 온 J. B. White가 ‘번역으로서 정의(justice as translation)라는 명제를 제시하며 법관이 하는 일을 ‘번역불가성‘ (nontranslatability)의 관점에서 시와 거의 다른 것이 없는 법을 번역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정의를 확보하고 있는가?"

‘헌법적 정체성‘의 본질을 이른바 ‘가치변환적 가치‘의 형성, 즉 새로운 이념과 가치로 기존의 가치관과 태도를 반성하고 갱신해나가는 과정 및 그 결과로 이해하는 Rosenfeld는
 ‘동일성‘(sameness) 또는 ‘자아‘(selfhood)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어 나가는 ‘헌법적 정체성‘이 일면 미래를 향한 
‘동일성‘의 기획과 타면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하는 ‘자아‘
의 이미지 상호간의 역동적인 교차작용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르면 미래를 향한 소망의 기대와 기획,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이에 터잡은 ‘자아‘는 경우에 따라서 상보적일 수도 있고, 상충될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후자의 맥락에서 ‘헌법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민족‘ 또는 ‘민족적 정체성‘의 함의와 양자 간의 역기능적 영향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있는 점에서는 물론이되, 보편적인 
시민정치교육, 특히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헌법교육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 H. Carr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헌법적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간의 대화‘ 속에서 형성되어 나간다.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또는 개인과 집단의 교차적인 관계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만나고있는 현재 시점에서의 자아의 동일성을 매개로 하여 ‘미래의 기획‘에 의해서 과거를 다시 기억 및 재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현재의 자아를구체적으로 반성 및 재평가하며, 그 결과가 다시 미래의 기획에 반영되는 상시적이고 통시적이며, 역동적인 환류의 과정 속에서 발전된다.

‘민족이 민족주의를 낳은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가 민족을 낳았다‘라는 서구적인 시각을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우리 민족공동체의 역사문화적 조건과 환경, 특히 제국주의의 모태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 즉 민족자결주의의 역할, 그리고 분단체제 하에서 민족공동체가 분열된 상태에서의 참혹한 전쟁경험,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와 민주화의 경험 등의 역사적 이력은 독특하다. 하지만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y)로 보면서 근대 이후 극심한 실질적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수평적인 동료의식이 유지될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그 정신문화적 근원과 효용에 대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시대의화두인 극단적인 ‘사회양극화‘의 문제와 관련하여 달리 표현한다면, 이러한 극심한 소득불평등과 소외와 결핍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사회통합의 구심점으로서 연대의식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또는 그 주된 토대가바로 민족주의였다고 한다면 앞으로도 그 역할의 수행이 가능하고 또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요컨대, 민족주의와 민족주의를 토대로 한 우리 정치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의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상당한 정치사회 및 문화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민족주의인가?" 라는 반어적 질문을 통해 제기하는 고민거리, 예컨대 "다양성이 거부되고, 일방적 교화를반복하는 한국사회의 갈등의 근원이 민족주의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시민의 공화주의적 덕성,
즉 "시민의 자유와 책임을 통해 구성해온 도덕적,시민적 품위"에 대한 관심과 반성에 민족주의가 오히려 장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등등어 문제제기는 곱씹어봄직 하다.

헌법재판은 ‘정치적 사법작용‘이다. 다양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지만,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는 그 대상과 판단의 기준 또는 방법두 가지 측면에서 함의가 주목된다. 우선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사태가 이른바 ‘논증의 공화국‘(republic of reasoning)이 아니라 정당을포함한 정치세력들 간의 경쟁에 의해 운영되는 ‘합의의 공화국‘(republicof consensus)의 국사인 생물정치라는 점이다. 둘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사의 기준과 방법이 ‘비정치적인‘ 법적 분쟁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반재판에서는 터부시되는 정치 또는 현실에 대한 고려가 오히려 헌법재판에서는 필수적으로요구되고 또한 헌법 자체가 고도의 추상적인 가치개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헌법의 해석을 통한 심사기준의확보는 일반법원의 재판과는 달리 ‘사전에 주어진 규칙과 기준‘을 확인 또는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규칙과 기준 및 규칙과 기준의 적용기준과 방법을 새로 정립 
또는 구체화하는행성의 작업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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