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철학 입문서


























































이 책은 칸트사상이 어떻게 싹이 트고, 어떤 배경에서 성장해나갔으며, 어떤 결실을 맺었고, 남겨 놓은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간명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누군가 최소한의 서술을 통해 칸트의 인간됨이나 그의 사상의전개 과정과 체계에 대한 일람을 필요로 한다면, 이 책은 그러한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칸트철학의 주요 개념들사이의 내용상의 그리고 발생상의 유기적 관계를 쉽게 알 수 있기때문이다.
카울바흐는 무엇보다도 칸트철학의 대명사가 된 초월철학에서
‘초월적‘의 의미 맥락을 밝혀주고 있다. 칸트의 초월철학은 한낱의식의 선험성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선험적인 의식의 초월적 운동 내지 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카울바흐는 ‘초월‘을 스콜라 학파,
라이프니츠 볼프 학파, 칸트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초월철학‘이 자칫 인식론의 한 유형으로만 읽힐 수 있는 위험을방지하는 한편, 형이상학 및 존재론의 계몽주의(휴머니즘적 적통임을 밝혀내고 있다.

칸트가 1755 년 아직 라이프니츠와 함께 공동으로 대변했던 신이성론에 의하면, 신이 자연에 투여한 보편적인 법칙들은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도 인식된다. 자연의 기계성을 말할 때, 칸트는 자연을 단지 외부의 한 톱니바퀴가 다른 톱니바퀴를 건드려 돌아가게 하는 시계조직 같은 것이라고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상호 간에 맞아 들어가는 힘들의 작동을 생각하고 있다. 칸트는 물체의 표면이 아니라 물체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예컨대 중력과 같은, "뚫고 들어가는 힘있다는 역동적 기계성 이론을 대변했다. 
열힘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이 뚫고 들어가는 힘들이란 힘에 관한 칸트의 첫 저술에서 화제였던, 철학적으로 해석된 힘의 표현이다. 이 힘은 충격을 주는 밀치거나 당기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한 물체의 표면의 끝에서 다른 물체의 표면의끝으로 전달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들을 하나의 유일한 연속적인 물체 형태로 통합시키는 내적인 끈으로 작용한다. 이와는 달리 물체 형태의 표면에서는 다른 물체들이 그것을 뚫고 들어갈수 없는 경계임을 나타내도록 영향을 미치는 반발력이 작동한다.

세계의 전개가 궤도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초에 어떤 전제들이 있어야만 할까? 이에서 칸트는 단 한 곳의 빈자리도 없이 전 공간을연속적으로 꽉 채우고 있는 세계질료를 생각한다. 이 질료는 원소적인 힘 중심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아니라 일종의 물리적 단자를 생각한다. 이 질료의 원리적 속성으로 그는 인력 [1]과 척력을 든다. 만약 질료가 "본질적인 인력을 갖추고만 있다면, 세계체계의 대체를 구축하는 데 작용했을 원인을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칸트는 어떻게 하나의세계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그가 기계론적이라고 이름 붙인 전제들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지를 생각한다.
칸트의 기계성 개념은 특수하다. 그것은 끌어당기고 밀치는 작용을하는 소위 하나의 양극적인 힘쌍이 활동하는 운동의 법칙이 적용되는 단자적인 힘 중심 유형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바로이 연관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이 형이상학적 사고는 하나의 한계와마주친다. 우주적인 세계체계의 골조 구성은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사람들이, "나에게 질료를 다오. 나는 너희에게 하나의애벌레가 어떻게 산출될 수 있는지를 보이겠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지를 칸트는 묻는다. 우리는 사념적으로는 생명체의 복잡성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객관의 "진짜 내적 성질은 여기서 우리에게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 터이다. 여기서 "내적 성질" 이라는 말을 통해예고되는 것이 현상들의 근거에 놓인 "본질" 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질료"가 모든 사물의 원료인 이상, 질료는 "그것이 자유롭게 내맡겨져 그에 따라서 반드시 아름다운 결합들을 만들어낼 모종의 법칙들에 묶여 있을 터이다. 질료의 자유는 이러한 완전성의 계획을이탈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법칙성에 있다. 절대 이성으로서의 신은 자연에게 일정한 기본구조를 부여했고, 자연은 그에 따라 자유롭게 아무런 강제 없이 스스로 발전한다. 일반 자연사의 제1부에서 칸트는 항성들 사이의 체계적 기본구조의 개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케플러의 법칙들이 알려진 이래로 우리는 현상하는 우주 자연을 이성의 가시화된 체제로 파악할 수 있다. 세계의체계적 구조에는 공간상의 중심점이 있는데, 그것을 차지하는 것이태양이다. 이 중심을 일정 수의 천체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조화롭게 운동하면서 회전한다. 이를 통해 매우 큰 잡다함 중에서도 가시화된 통일성이 드러나는데, 이 통일성은 행성들의 회전에서 구심점이 되는 바로 그 중심점에 의해 대표된다. "우리의 세계건물에 속하는 모든 행성과 혜성은 하나의 공동의 중심체 주위를 회전함으로써 본래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세계연관을 설정을 통해 실존하게 하는 그 주에는 그 자신이 반드시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개의 내적 가능성이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은 세계연관에 포섭되어 있어야 하고, 이 세계연관은 다시금 절대적으로 실존하는 것에 의해 현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실존해야만 한다. 절대적으로 실존하는 것, 즉 신은 어떤 타자에 의해 정립되고 현존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예컨대 창조된 유한한 세계사물들에게나 해당된다. 신은 비로소 현존하게 되고 실재화되어야 할이념으로 어디엔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의 말처럼, 오히려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이 존재자에서는 실존이 심지어는 동시에 본질을 이룬다. 이 실존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정립이 어떤 유한한 동기연관에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실존에는 근원적으로 서로 다른 두 원리 즉 본질과 
실존의 통일이 현재한다.

칸트는 줄곧 자연신학적 신 증명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이증명이 "매우 생동감 있고 잡아끄는 힘이 있다"고 칭찬한다. 게다가모든 사람은 우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주목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이 증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이러한 증명을 통해 장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지혜에 대한, 또는 기도를바칠 만한 존재자의 위력에 대한 "직관적 개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증명은 우리로 하여금, 주관이 미시 세계나 거시 세계를 바라볼때 받는 인상인 "숭고함과 존엄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주관은하나의 현실에 참여하여, 형이상학적 길들만을 좇지는 않는다. 칸트는 이 자연신학적 증명을 다른 증명. 가령 존재론적 증명에 비해 장점이 있다고 칭찬한다. 자연신학적 증명은 적어도 직접적인 자연 경혐으로 채워져 있고, 최소한 공허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에서는 멀리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물들을 접해보고, 성공과 착오를 겪으면서 이제야 성공에 이르고 사태에 적합한 태도를 터득한 그래서 이 사태를 올바르[연함/능숙함]"이라고 표현한다. 예컨대 많은 여행을 한 사람은 이 세게 다루는 자가 도달하는 "경험 있는 위치를 칸트는 "경험 있음[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이 세계에서 올바르게 처신할 줄도안다. 그는 "경험 있음"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철학 교육에서도 중요한 것은 젊은이를 스스로 걷는 경험의 길로 이끄는 일이다.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그들이 "경험 있음의 위치에 들어설 수 있는 충분한 역사적[자료를 바탕으로 한 지식도 없이, 일찍부터 궤변적 논리 구사를 배우는" 일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요. 모든 것은 비판에 부쳐져야 한다. 종교는 그 신성성에 의거해서, 법칙수립[입법]은 그 위엄을 들어 보통 비판을 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럴 때 종교와 법칙수립은 당연히 자신들에대한 혐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꾸밈없는 존경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은 오직 그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 또한 칸트는 자기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바, 성숙한 판단력은자신을 그렇게 오래도록 사이비 지식에 맡겨놓지 않으며, 이성에 다음과 같은 일을 촉구한다. 즉 "이성이 하는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 자기 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고,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비이기적이고 진실된 성정"에서,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선하다고 또는 참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타인들의 판단과 비교해보아 양자를 일치시키며, 또한 만약 그들이 우리가 접어든 길과는다른 보도를 걷는 것으로 보이면, 모든 인간의 영혼이 참된 인식의 길에 말하자면 발길을 멈추도록 하는" 숨겨진 특성이 감지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보편적인 인간 지성에 의거하게 하는 자각이며, 생각하는 존재자 전체에게 일종의 이성 통일성을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
형이상학은 이런 이성의 통일성에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칸트가 만약 이 시기에 형이상학적 언표들의 표준척도". 즉 실재성 기준을 얻었다면, 그는 위의 문장들의 행간에 나타나 있는 회의적인 징후들을 기꺼이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우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과 관계 맺고 서 있는 한에서만 감관을 통해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세계의 물체들이 우리와 만나지는 그런 공간의 중심점에 서 있는 것으로 경험한다. 또한 우리가 신체적으로수직으로 걸어 다니는 표면을 지평(수평)이라고 일컫는 식으로 정위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위를 목적으로 우리의 주관적인 중실점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세계공간을 여러 "구역/방위"로 분할한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지평면은 예컨대 이 공간에서 위와 아래를경계 짓는다. 여기서 뚜렷이 알 수 있는 바는, "구역들/방위들"의 이런 차이란 우리 신체가 태생적으로 차지하는 위치와의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이 구역들/방위들을 구별 짓는 제1의 근거는 주관성과 세계공간 안에서의 주관성의 정위이다. 지평면 위에두 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수직면이 서 있을 수 있고, 그리하여 인간의 신장은 이 교차선에서 생각된 것이다. 두 수직면 중 하나는 신체를 외적으로 유사한 두 쪽으로 나누는데, 이것이 오른쪽과왼쪽을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이 수직면에 연직으로 서 있는또 하나의 수직면은 우리가 앞쪽과 뒤쪽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게끔 해준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요, 모든 것은 비판에 부쳐져야 한다. 종교는 그 신성성에 
의거해서, 법칙수립 [입법]은 그 위엄을 들어 보통 비판을 
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럴 때 종교와 법칙수립은 당연히 
자신들에대한 혐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꾸밈없는 존경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은 오직, 그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 

순수 이성 비판은 모든 가능한 선험적 인식의 성과 전체의 설계도를 기획한다. 그것은 선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분명하게 밝혀내고, 그렇기에 그것은 "초월철학의 시작이자 이념이다. 여기서 칸트는 전통적으로 통용되던 ‘초월철학‘이라는 용어에 새로운의미를 부여한다.
칸트 자신이 그렇게 불렀듯이 "옛사람들의 초월철학"은 신이 자연에서 현실화했던 최고 보편 개념들의 이론이었다. 그러한 보편적 원리적 개념들이란 예컨대 참임, 선함, 하나 등이었다. 그것들은 그 안에서 개별자를 하나이고, 참이고,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가능하게 되는 보편적인 틀로 이해되었으므로, 초월자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것들은 개별자를 넘어서면서도[초월하면서도 포괄하는 개념들이다. 칸트로서는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후에는 이런 초월철학의 신이성론적 전제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그는 이제 [개별자]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개념들과 원리들을 주관 안에서 찾는다. 주관은 이것들에 의거해서 객관적 학문으로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의 획득은 종합 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한 개념이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는 또 다른 개념과 결합되고, 그래서 하나의 새로운, 이제까지 그 개념에 속하지 않던 내용이그 개념에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분석 판단에서는 사고내용이 판단의 주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논리적 지성은 여기서 한 학문의 언표들과 개념들의 구성 성립에 주목한다. 그래서 분석 판단의 원리는 모순을 내지 동일률이다. 이 원리는 종합 판단들의 영역에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순적인 개념들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볼 때 상호 간에 아무런 관계가없고, 상호 간에 아무런 연역 관계도 없는 그러한 개념들을 결합하는 일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서도 인식의 진보, 다시 말해 종합 판단의 산출이 주요 문제이므로, 전체 관심이 이런 종합 판단에 쏠린다.

지성의 작업도구는 개념과 판단이다. 직관의 영역에서처럼 지성의 영역에서도 경험적인 표상들과 감각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표상들은 구별된다. 경험적인 표상들은 현상하는 사태의 실제적 현재를 전제한다. 감성도 순수하고 선험적인 직관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감성에 비해도 지성은 자발적임을 보인다. 지성의경우는 대상들에 의해 우리가 촉발되는 방식과는 상관이 없고, 이는 자유롭게 그리고 가능한 대상적인 영향들의 현재와는 독립적으로 수행한다. "감성이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터이고, 지성이 없다면 아무런 대상도 사고되지 않을 터이다.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
칸트는 사고의 법칙, 유형, 수행 방식들을 대상으로 삼는 하나의전통적 학문을 끌어대고 있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초된 논리학이다. 그것은 선험적인 학문의 전형으로 생각되며, ‘일반논리학‘으로서 사고의 모든 특수한 내용을 사상한다. 그것은 지성 사용에 특유한 순수 형식들과 유형들만을 고찰한다.

지성은 범주들을 통해 통일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니까 범주들은주관을 사고하도록 작동시켜 자발적인 능력으로서 종합적인 절차를 이행하도록 하는 "형식들"이다. 무릇 이미 로크도, 우리가 초록이나 파랑과 같은 색깔을 감각하는 상태에서는 발생하는 것을 그대로인정하도록 강요당하지만, 지성이 감각 내용들을 결합하는 일에 나서는 경우에는 자유롭고 그리고 의사대로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서 객관성의 표준척도에 대한 물음이 등장하지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대목에서 자의의 작은 문 큰 문이 모두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초월철학자에게는 더욱 심각하게 대두한다. 초월철학자는 선험적 종합들을 말하고, 지성의 순수한 선험적인 결합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지성을 위한 주장을 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험적 결합의 원리들, 즉 범주들이 객관적으로 실재적인, 사태적인 기본개념들임을 입증하고,
이것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밝히는 일이 과제로 설정된다. 
그래서 칸트는 범주들에 대해 그 유명한 권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범주들의 초월적 연역"에서 다룬다.

칸트가 우리 이성에게 불가결하고 불가피한 무조건적 필연성 이념을 "인간 이성에게는 진짜 심연"이라고 설명할 때 우리는 그의 입에서 거의 (현대적 의미에서의 실존철학적인 말을 듣는다. 영원에 대한 사상조차도 바로 이 무조건적 필연성이라는 이념처럼 우리마음에 "현기증 나는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이념의 대상이 맡은 과제는 모든 존재자의 존립을 감지하고, 모든 존재자에게 지주("밑받침")를 제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가능한것 가운데서도 최고의 것이라고 표상하는 존재자도 이를테면 자기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있으며, 나의 밖에는순전히 나의 의지에 의한 어떤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나는 것을 막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견뎌낼 수도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은 우리 아래로 가라앉는다. 최대 완전성도 최소 완전성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밑받침 없이 한낱 사변 이성 앞에서 흔들리지만, 사변 이성은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최대 완전성도 최소 완전성도 최소한의 장에도 없이 소멸되도록 내버려둔다. 

순수 이성의 건축술이란 세계의 기술을 뜻한다. 여기서는 유기체의 유형이 표준척도가 된다. 형식상으로 보아 철학 또한 세계적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언표 하나하나는 전체와의관계에서 의미를 얻고 그 위치가 정당성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철학은 실제로는 아직까지 등장한 바 없는 가능한 하나의 학문의 순전한 이념이다. 칸트의 견해는 이러한원형의 이제까지 실제로 이루어진 모상들을 인간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그 원형에 가장 근접한 어떤 것으로써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사람들은 철학을 배울 수 없다.
도대체 어디에 철학이 있는가. 누가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가. 무엇에서 철학이 인식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단지 철학함을 배울수 있을 뿐, 철학을 배울 수는 없다고 하는 자주 인용되는 칸트의 말은 철학적 체계성의 이상적 원형의 대표할 만한 모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철학의 잠정적인 역사적 상태와 관련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눈앞에 주어진 어떤 한 철학 체계를 배운다고 나설 수는 없는것이다.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철학적 이성을 가동시키고, 자기의
"생산적 능력"을 발동시켜, 이상을 최대로 본뜰 수 있는 길로 매진해야 한다. 철학의 이 국면에서 철학의 학교개념이 결정적 역할을 하거니와, 이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이 [지식]의 체계적 통일, 그러니까 인식의 논리적 완전성 이상의 어떤 것을 목적으로 갖지 않는 단지 학문으로 추구되는"인식의 체계이다.

"훗날의 숙성된 윤리학의 정언명령"에서도 "보편적인 자연성이라는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여기서 자연본성이라는 말이이미 만났던 자연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찰들과의 연관 속에서파악되어야 함에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인간 주체주관의 "자연본성"의 도덕적 역할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는 칸트 초기의 신 · 인간 · 세계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성찰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칸트는 예컨대 유일 가능한 신의 현존 증명근거」에서 철학적 이성이 필연적 존재자 (ens necessarium)" 개념을 세계 내의 우연적인 것들에 기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신은 전제자나전횡의 신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필연적 존재자들의 주[1]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신에 의해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서 그 기본틀이 갖춰졌으며, 이 보편적 법칙들이 자연에게 일정한 독립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자연 독립성의 본질이법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대상들과 사건들은 자의적으로그리고 단지 개별적인 사례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신의 질서를충족시킨다. 칸트의 초기 실천 철학에도 인간의 자연본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때 이 말은 신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된 내적 도덕법칙에 대한 지시를 함축하고 있다. 이 법칙은 원리적 기본체제의 표현으로서, 이 체제에 기초해서 인간의 자연본성은 자유 중에서 도덕적 선량의 규칙들에 따라서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이성에 의해 수립된 법칙은 모든 법칙적인 것들 일반의 "범행"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이성적 주체주관들이 어떤 특권을 갖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법칙 앞에서뿐만 아니라 윤리법칙 앞에서도 모든 이성적 주체들은 동등하다.
그래서 이 법칙은 개개 주체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을 대변한다.
이 법칙은 개인이 자기의 개인적 구역의 사적인 것들로 들어가, 공적이고 만인에게 타당한 표준척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를배제한다. 이 법칙에는 직접적 객관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즉 이 법칙이 객관성을 갖는 것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이 그것을 "매개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이로써 이론 철학의 상황과는 다른 출발점이 주어진다. 즉 실천적 인식과 사고를 위한 바탕이 감성적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성 자신에 의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무엇이 의무인지는 모든 사람의 윤리적 의식에 언제나 생생하게 인지되어 있다. 그에 반해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필요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은 포괄적인 세계경험과 세상사에 대한 지혜의 문제로서, 이에는 명민한 지성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도덕 인식은 세계경험이나 인간의 자연본성에 대한 경험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인식은 단지 조건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오른손과 왼손의 차이가 우리 모두에게 분명하듯이 건전한 윤리 의식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선과 악을구별할 줄 안다.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따라서만 행위하라."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질, 양, 관계, 양태범주를 실마리로 해서 전개되는 
"미의 분석학에서는 "미[아름다운 것]"에 대한
네 가지 "설명들"이 제시된다.
질의 징표에서 고찰하면, "대상 또는 표상 방식을 일체의 관심 없이흡족이나 부적의]함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으로서의 취미를표준척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흡족의 대상을 아름답다[미적이다]고 일컫는다. 흡족의 무관심성으로 인해 취미판단은 "쾌적한" 것을 대상으로 갖는 판단이나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대한 판단과 구별된다. 쾌적한 것은 "즐거움쾌락]"을 주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순전히 "적의한 것이며, 선한 것은 "존중" 내지는 시인되는것이다. 취미의 흡족은 아무런 이해관심이 없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자유로운" 흡족이다. 이 흡족에서 표준척도적인 것은 쾌적한 것의경우에서처럼 경향성이나, 도덕의 경우에처럼 존경이 아니라, 오직
"호의이다. 이런 이해에서 자유는 무관심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모든 관심은 필요욕구를 전제하거나 산출하는 한에서, "찬동의 규정근거"로서 대상에 관한 판단을 더 이상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취미판단을 양의 면에서 고찰하면, 
미의 두 번째 정의가 나온다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적의한 것은 아름답다."
대상들의 미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들이 있다.

칸트는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을 구별하며, 숭고한 것을 다시 수것에서는 성(性), 완결성, 균비성(性) 등이 척도 역할을학적으로-숭고한 것과 역학적으로-숭고한 것으로 나눈다. 미적인하지만, 숭고한 것은 일체의 척도를 뛰어넘는다. 수학적 의미에서숭고한 것이란, 예컨대 그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그런것, 그리고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자(척도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그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한자"가 역할을 하게 된다. 미적인 것의 판정에서는 상상력이 "지성"과 관계를 맺는다면, 숭고한 것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그의 이념들과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바, 이념들에서는 무조건성과 무한성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맞추어 역학적으로-숭고한 것도 모든 통상적인 유한한 척도를 넘어간다. 그런 것을우리는 예컨대 막강한 자연의 위력들의 형식에서 마주친다. 숭고한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익숙해진 척도를 뛰어넘는 (가령 별들이총총한 하늘과 같은) 자연의 크기를 
이념들의 현시로 생각하게끔 한다.

자연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형식들을 만난다. 다시 말해 자연은1 특수한 법칙들 안에서" 우리의 판단력에 파악 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연은 주관적으로 합목적적인 것으로 보여서, 그것의 "아름다운" 형상들에서 그것이 "마치 우리의 인식능력들을 위해마련된 것처럼" 그런 성질을 가진 것인 양하다. 합목적적인 전체로서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형태는 자연의 특수한 현상들이 총합되어있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연출한다.
그러나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에서 객관적 합목적성이라는 사념도생각할 수 있다. 목적이란 그것을 지향해서 정리되어 있는 잡다한수단들의 통일 원리이다. 거기에 하나의 밀집한, 우연의 틈새를 메우는 통일성이 성립하는데, 그것은 지성이 기계적인 자연에서 만들어내는 법칙적인 결합이다. 그래서 목적과 체계는 서로 짝을 이루어하나의 전체를 만든다.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이 "마치 기술적으로아주 잘 질서 지어진 것으로 판정하면서, 자연을 체계적으로 구조지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합목적성의 이념은 단지 판단력을위한 규칙으로서만 타당할 수 있는 것으로, 이성은 이에 따라 그 자신의 통일성 관리의 징표에서 "마치 자연이 완벽한 체계적 통일체인 것처럼" 그렇게 자연을 판정하는 것이다. 생산작업이 산출자와생산물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를 이루는 통일 운동인 한에서, 체계성은 오직 생산이라는 이념의 징표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

들이 효력을 갖는 평화상태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이다. 공화적 현정체제는 국가법들이 개개인의 자유에 합당하게끔 되는 유일한 체제이다. 
그래서 "영원한 평화를 위한 제1 확정 조항"은 각 국가에서 시민적 [헌정체제는 공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국가와 다른 국가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영원한 평화를 위한 제2의 확정 조항은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제[연방주의]에 기초해 있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시민법"과 관련해서 제3의 확정 조항은, 세계시민법이 보편적인 "우호"의 조건에 국한되어야 함을 다시 말해 "지구 표면의 공동 점유"
의 권리에 기초해서 모든 사람에게 타국의 영토를 방문하여 머물고,
"교제를 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이 확정 조항들에 앞서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조항들"이 제시되어 있다. 1. 장래의 전쟁 소재를 의도적으로 위장해서 함유하고 있는 어떠한 조약도 평화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2. 어떠한 독립국가도 어떤 다른 국가에 의해 상속, 교환, 매매 또는 증여를 통해취득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3. 상비군은 점차 완전히 폐지되어야한다. 4. 군비를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국가부채도 져서는 안 된다.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헌정체제와 통치정부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6. 전쟁 중에 있는 나라들은 장래의- 평화를 위한 전제인 상호 신뢰를 잃지 않도록 행위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인간과 세계에 관해서 단지
"개념을 놓지 않고, 능숙한 이성"의 의미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자 한다면, 노련함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 실용적 이성은 인생을 성찰적으로 판정하고 자신이 성공적임을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노련함에 관심을 갖는다.
비록 인간이 지상 피조물의 일부를 이룰 뿐이라 하더라도, 만약사람들이 인간을 "종적 성질상으로 이성을 갖춘 지상 존재자"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 지식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본성상 무엇을 하는지를 인식하는 자연학적 인간인식과는 반대로 실용적 인간 지식의 관심사는 인간 자신이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자로서 스스로 무엇을 하고, 또는 할 수 있으며 해야만하는지"이다. 이러한 인간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간의 자연본성에 대한 지식을 통해,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고려해야만 하고, 또인간 관계들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할 때에 계산에 넣어야 할 긍정적인 가능성들과 동시에 장애들을 인식할 위치에 서도록 하고자 한다. 

은 그러한 행위에 의해 정초될 수 없는 것이다.
근원적 취득 개념의 실재성 또한 입증(연역)된다.
즉 그 실재성은물건들의 사용을 법적으로 배분하고, 비록 그 대상... 이 감관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그것들의 예지적 점유를 정초하는 보편적으로 결합하며 합일된 의지에 대한 사상에서 생긴다. "소유"란 "실체적으로 누군가의 자기 것"인 외적 대상이라고 이해할 수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지 물체적 물건이지 인격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격은 자기 목적인인간성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한낱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물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대인권"에 관한 절에서는, 자유법칙에 따라 나에게 특정한 급부를 이행하는 타인의 "의사"를 대상으로 갖는 점유에 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 표준척도가 되는 것은 "계약" 인데, 계약이란 "그것에 의해 일반적으로 어떤 자의 자기 것이 타자에게 넘어가는, 두 인격의 합일된 의사"의 행위라고 
규정된다. 계약에 의해 취득되는 "외적"인 것은 물건이 아니라, 타인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공통적인 실천 의지를 관철함에있어서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나에 대해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의무지운 타인의 행동이다.

법칙수립의 권력은 모든 "국가시민의 합치되고 합일된 의지에 의거한다. 국가시민들의 본질속성"은 법률적 자유, 시민적 평등, 그리고 시민적 독립성이다.
시민권에는 다음의 기본명제들이 타당하다. 

1. 국가들이란, 그 상호 간의 외적 관계를 살펴보자면, 
본래 무법적인 상태에 있다. 
2. 이 313상태는 원리적으로 전쟁의 상태이다. 
3. 지속적인 평화 달성을 위해서는 근원적인 사회계약
 이념에 따른 국제연맹이 필수적이다. 
4. 이결합은 시시로 갱신되어야 한다. 국제법의 최종 목표는 영원한 평화이며, 그것은 결국은 순전히 규제적 이념으로 간주할 수밖에는 없지만, 그것에로의 계속적인 접근은 가능하다. 이에 기여할 정치적 원칙들은 실현 가능하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몇몇 국가의연합은 "상설제국회의 [常設諸國會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연이 인간을 제한된 토지 위에, 즉 둥근 지구의 표면에 세워놓은 사실을 숙고해본다면, 세계시민법 사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인간적신체적 주체의 물리적 실존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할당된 토지에대한 근원적 권리가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는 자연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동물적 자연본성을 자기보존하는 데에 있다. 도덕적 존재자로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는 거짓말, 다라움, 거짓 겸양과같은 부덕들의 배제이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관한 법정 또한 열어야 하는 자기 자신의 실천이성의 법칙수립에 의무 지어져 있다.
즉 "양심은 "인간 안의 내부 법정"에 대한 경험 현장이다.
양심에서는 내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나 자신과 나누는 지속적인내적 대화 운동이 나타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의무들의 첫째계명", "너 자신을 알라(탐구하라, 천착하라)."
이다. 과연 "너 자신의 심정이 선한지 악한지. 너의 행위들의 원천이 순정한지 불순한지, 너의 심정을 꿰뚫어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적 목적과 관련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들로는, 예컨대 자기의 정신력, 영혼력, 체력의 개발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의무들을 세세히 규정할 수는 없다. 즉 그래서 이런 것들은 불완전한 의무라고 일컬어진다.
타인에 대한 의무에 관해 말하자면, 여기서는 사랑의 의무와 존경의 의무의 구별이 기준이 된다. 사랑은 "감정",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미감적 흡족으로 이해되지 않고, 타인의 완전성에 대한 쾌감으로이해된다. 사랑은 "친절"을 결과로 갖는 호의의 준칙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사랑의 의무로는 자선, 감사, 동정의 의무가 있다. 다른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덕의무에는 거만, 비방, 우롱의 패악이 맞서있다. 사랑과 존경의 내밀한 합일[하나됨]이 우애를 위한 토대이다.
신의와 사물들에 대한 합치하는 파악이 친구들로 하여금 확장된 삶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서로 교제를 트고 고독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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