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슈미트의 정치적 결단주의 사상의 원류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낭만주의는 순전히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보수적이거나 반동적인 것도 아니다. 반혁명가들의 정치적인 견해는 [결국] 논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으며, 낭만주의운동의 거개를 완전히 자의적으로 도외시하거나 아니면 [낭만주의자들의]순진무구한 표현들에 사악하고 나쁜 의도를 덧씌우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 그 견해는 성선설에 의한 설명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약점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낭만적인 것의 역사적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반혁명가들의] 견해는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사람들의 사회적 특성에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고찰을 위해서는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비록 정확성과 완결성의 측면에서 미심스런 구석이 있다 할지라도, 낭만적인 것에 대한 모든 규정 - 이 책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 은 적어도 토론해볼 만한 가치는 갖는다. 그런 점에서 요제프 나들러 Josef Nadler의 관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관점은 단순히 [낭만주의의] 성격 규정이나 논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제대로 된 정의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실체 없는 세계, 직무상의 구속력 기능적 결합을 모르는 
세계, 확고한 지도 체계가 부재한 세계, 결론도 정의도 결정도 최종 판결도 모른 채 우연이라는 마법의 손길 the magie hand of chance에 이끌려 끝없이 방황하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 낭만주의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낭만적 흥미를 [채우기] 위한수단으로 만들 수 있으며, 세계란 단지 하나의 계기일 뿐이라는 환상이것 역시 어느 때는 무고한 것, 또 어느 때는 음험한 것일 수 있다―을 품을수 있다. 이와 다른 모든 정신적 영역에서, 그리고 일상적 현실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곧장 터무니없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인 것의 영역에서 그것은 특별한 미적 성취로 여겨진다. 기회가 닿아 [기연적] 계기로 사용된 구체적 현실 속 장소와 [그것을 이용하는 창조적 낭만주의자 사이에서 하나의 다채롭고 흥미로운 세계, 놀랍도록 아름다운 매력을 가득 품은 세계가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미학적인 차원에서라면이 세계를 수긍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를 진지하게 취급한다는 것은 반어적인 표현을 의도하지 않은바에야,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또한 이 낭만주의적 생산성은 전래된 모든예술 형식들도 순전히 [자기를 위한 계기로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형식과 구체적 현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비록 낭만주의가 언제나 어떤 구체적인 출발점을 찾는다 해도 말이다. 사람들이심리학적 견지에서 낭만적 무형식성, 과거와 먼 곳을 향한 낭만적 탈주고 부르는 것, 즉 오직 먼 곳에만 있는 사물들을 낭만적으로 미화verklarung하는 것은 이러한 [기연적] 태도의 결과일 뿐이다. 멀리 있는 것, 즉 지금이곳에 부재하는 것은 쉽게 저지되거나 반박되지 않는다. 엄연한 현실의무게 Konsequenz도, 지금 이곳에서 당장 지켜야 하는 규범도 그것을 저지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멀리 있는 것을 계기로 삼는 편이 [언제나] 더 쉽다.
왜냐하면 멀리 있는 것은 [실제 삶에 있어서 ] 성가신 일 Sache 혹은 문제 Ge-genstand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초의 낭만주의자들은 정신의 혁명가를 자처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반동과 결부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보기에 낭만적인 것의 본질에 속하는 여러 역설들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거꾸로 그들이 혁명과 결부되었다는 사실 또한 한낱 우연일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널리 알려진 단순한정식, 즉 ‘정신 혹은 문화의 혁명이란 정치적 반동‘이라는 정식 [일종의]해답처럼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이에르에게는 다름 아닌 정치적혁명이 낭만주의적 경향의 표출이었고, 다름 아닌 낭만적인 것의 측정 불가능한 정치적 에너지가 그의 합리주의적 경험주의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여기서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낭만주의가 개인주의와 비합리주의를 자신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주장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낭만주의자들을 역사적-객관적 사유의 창시자로 칭송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이야말로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들이며, 나아가 "민족Volk "이란 유기적이고 초개인적인 통일체 Einheit 라는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 감각을 일깨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항 운동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들이 있으며, 따라서 근대 합리주의가 아닌 모든 것을 낭만주의적이라 칭하는 것은 피상적인 생각이다.
셀링의 자연철학 안에는 낭만주의가 무정한 지혜 licbeleere Weisheit" 라고 여긴 철학적 반대가 존재한다. 추상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감정적인 적대는 철학적인 적대와는 다르다. 이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문제를 순수하게 감정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시 모든 체계적인 논의는 하나의 지성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철학적 체계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감정의 절대적 직접성을 위협하게된다. 거꾸로 끝없이 만족을 추구하는 [감정적인] 체험은 지성을 마비시킬수 있다. 피히테의 지식학은 칸트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동을 포함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활동하면서 비아를 정립하는" 자아는 추상적 보편성으로 상승하는 분석적 개념으로 구성된 합리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결코 개념이라 할 수 없다.

옛 형이상학에서 가장 확실한 최고의 실재였던 초월신은 제거되었다.
이제 철학자들의 쟁투보다 더 중요해진 것은, 가장 확실한 최고의 실재로서 신이 담당했던 역할을 역사적 현실 속에서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두 개의 현세적 실재가 등장했고, 새로운 존재론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식론적 논의의 종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두 가지실재란 인류와 역사다. 18세기의 합리주의 철학의 논리로 본다면 완전히비합리적이지만, 초개인적 타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이고 명백한 것으로 여겨진 양자는 새로운 조물주Demiurgen 로서 인간의 사유를 실질적으로 in realitate 지배하였다. 전자, 즉 인간 사회는 민족Volk, 공동체, 인류등의 여러 상이한 형태로 등장했지만, 항상 동일한 한 가지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