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주체의 질적 요건으로서 이상과 같은 의미의 행위 능력과 책임능력을 요구하고 있는 형법은 오직 인간(자연인)만을 형법 주체로 인정해왔다. 요컨대 형법은 인간(자연인 외에 어떤 존재도 형법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업이 비록 법에 의해 법인격을 부여받아 법
‘인‘이 됐다고 하더라도 - 그래서 일부 영역에서 ‘법‘ 주체라고 할 수는있지만 아직 ‘정법‘ 주체로는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기업(법인)은 범죄를 범할 수도 없고, 형사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지금까지 기업(법인)을 형법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근거 지우려는 모든 이론적시도는 실패했다. 이 책은 오늘날 글로벌 행위자 global player 또는 선량한 기업 시민 good corporate citizen 등으로 불리는 기업(법인)을 형법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 이론을 찾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에 형벌을 부과해왔다. 그러나 유일한근거 규정인 양벌 규정은 무늬만 형법일 뿐 실제로 형법의 범주에 포함되기 어렵다. 이 규정은 기업이 관여하는 복잡다기한 현상들을 단 몇줄의 문구로 압축해놓고 있어 법률 전문가들도 그 해석과 적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을 처벌할 수 있는 범위도 양벌 규정에 특정된 위반 행위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사기나 뇌물공여, 횡령이나 배임 등 전형적인 형법법과 관련해서는 기업에 대한 형사 책임이 애당초 봉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형벌의 유일한 방식인 벌금형도 기업이 초래한 법익 침해를예방하거나 억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라는 평가도 지배적이다. 실제로 양벌규정에 의거해 이뤄진 기업 처벌이 어느 정도인지에 자료조차 축적돼 있지 않다. 

기업 ‘구성원의 처벌에 만족하고 기업 자체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관심과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첫 번째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업은 실체가 없이 단순한 계약의 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여전히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개인 행위의 복합체인 경제의 하부 구조인 기업을 구체적 이익 추구의 사회적 단면으로 파악하고 오직 인간만을 기업의 최종 단위로 본다. 기업을 처벌하려고 해도기업 자체를 형사 법정에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때문에 기업에 대한 형사 재판에서도 피고인이 될 수 있는 자는 결국 기업의 대표자밖에없다는 생각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기업의 행위를 내부 구성원 개인의 행위로 환원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와 맞닿는다. 10 전체(기업)를 부분(개인)의 총합으로 인정하면서 유기체적 전체주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으로 구성된전체(기업)의 독자적 실체성을 인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 그 자체는 더 이상 독자적 실체 없는 단순한관계의 망 내지 관념적 형상물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기업은 그 자체로사회 내에서 실재하는 독자적 법 주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이미 1962년 유럽 재판소가 기업에 대해 내린 정의에서도 간파할 수있다. 그에 따르면, 기업은 독자적 법인격으로 분류된 통일된 주체로서, 인적 · 실질적·정신적 요소들의 결합으로서, 장기적으로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주체"라고 한다. 실질적·제도적인 맥락에서 정의된 이러한 기업 개념은 독자적 법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재화와 급부를 공급함으로써 경제생활에 참여하고, 최소한의 조직적 단위를 갖출 것이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비중을 감안할 때 독자적인 형사 책임의 요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사건들에서 기업에 그 형사적 책임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생겨난 법익 침해적 결과에 대해 결과적 정의가실현될 수 없다. 기업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정의가 실현됐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부분적으로 구성원이 책임 있는 행위를 했음을근거로 그에게 형사 책임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 구성원에게 사건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 직접적으로 책임져야할 행위자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한계 상황에서 실제로 야기된 법익 침해적 행위의 예방과 피해 회복 그리고 정의를실현하기 위한 간명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있다. 기업도 사람처럼 책임을질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기업도 사람처럼 형사 책임을 지우게 하려면 처벌의 필요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형사 책임은 사회 윤리적 차원의비난이라는 불이익을 그 내용으로 하는 형벌이 수단으로 삼는 바, 사람에게나 기업에게나 동일한 차원에서 형벌이 정당화되려면,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벌 부과 요건을 기업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형법은 어떤 주체에 형벌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가 스스로법익 침해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사회 윤리적 비난이라는 해악부과를 내용으로 삼은 형벌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고,
이러한 능력은 오직 사람(자연인에게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왔다. 이와같이 형법이 요구하는 형벌 부과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기업에게 ‘처벌의 필요성만으로 형사 책임을 지우는 일은 뒤에서 살펴볼 - 책임주의원칙 뿐 아니라 - 법 앞의 평등 원칙에도 반하는 일이다.

근대 이후 형법은 계몽주의 및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에 대해서만 형사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자연인 외의 어떤 존재도 행위를할 수 없고 형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의 형법을 ‘단체형법‘에 대응시켜 개인 형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현행 형법도 근대 형법의 사고 체계 속에서 여전히 ‘개인 책임의 마법에 사로잡혀 있다. 만약 기업(법인)이 인간(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법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개인 책임의 마법이 풀려 기업에 대한형사 책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개인 형법의 마법이 풀리면, 범죄와 형벌에 관한 기존의 도그마틱,
즉 범죄의 주체는 오직 인간이고, 형벌 부과의 대상도 인간에 국한된다는 공고한 도그마틱은 폐기될 수 있다.

형법은 형벌 부과를 위한 실체 요건으로 가장 먼저 ‘행위‘가 있어야 함2501을 요구한다. 이때 행위는 법률적으로 구성 요건에 해당한다는 평가 이전의 행위, 즉 법률적 행위를 말한다(전 법률적 사회적 의미의 행위),
또한 형법은 그 행위가 행위 주체의 일정한 귀책사유(잘못)에 근거한 것임을 요구한다. 이에 근거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국가 형벌권이 폭력 집단의 테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는 ‘책임 없이 형벌 없다‘는 원칙을 광의의 ‘책임주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형법에서 형벌 부과를 위해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요건인 ‘행위‘는 자주등장하는 개념이다.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한다"
는 형법 제1조 제1항은 형법의 시간적 범위에 관한 규정이지만, 형벌부과의 요건인 범죄가 다시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제2항은 보다 직접적으로 행위가 범죄의 구성 요소임을 말해준다. "범죄후 법률의 변경에 의해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거나"라는규정에서의 행위가 그렇다. 이처럼 형법 총칙상 ‘죄‘의 성립에 관한 모든 규정은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이에 따르면 형법이 보호하는 법익을 침해되거나 침해될 위험성이 생겼더라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한범죄가 될 수 없고, 그에 대해 형벌도 부과될 수 없다.
하지만 형법은 어떤 요건이 구비돼야 행위로 인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형법 이론학적 차원에서 형법상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규명하기 위해 인과적 행위론, 목적적행위론, 사회적 행위론, 소극적 행위론, 인격적 행위론 등으로 대표되는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했다. 이들 견해 가운데 어느 입장에서 제시하는행위의 요소가 행위의 본질적 요소인지에 관한 논쟁은 특히 1930년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해 행위의 본질적요소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기보다 형벌 부과의 최소한의 전제 조건만을행위론 단계에서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는 자각이생겼다. 이런 견지에서 다음 세 가지가 형법상 행위로 인정되기 위한최소한의 요건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첫째, 외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둘째, 의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며, 셋째, 인간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행위론에 의하더라도 ‘행위‘는 정신·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의식을 가진 ‘인간(자연인)만 할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때문에 형법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인이 아닌 ‘기업(법인)은 고기업(법인)의 구성원인 자연인을 매개로만 행위할 수 있을 뿐, 형법상의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통설·판례). 이에 따르면기업(법인)은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의식 작용에 기한 행위 가능성, 즉행위 능력이 없으므로 행위 주체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기업(법인)에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
형법 해석론상 사회적 행위론을 취하면서 ‘사회적 중요성을 행위의본질적 요소로 본다면, ‘인간‘ 이외에도 ‘행위‘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있다. 의사가 부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중요성만을 본질적 행위표지로 삼으면 ‘기업(법인)‘의 활동도 행위 속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만약 사회적 중요성이나 사회적 의미만을 행위 요소로 보는 데까지 나갈 정도로 행위 개념을 극단적으로 규범화한다면, ‘동물의 움직임이나
‘자연 재해도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형법은 원칙적으로 인간 행위가 출발점이 되어 형벌이 부과되는 일정한행위들을 규정하고, 또한 그 행위들을 범죄로 유형화한다. 어떤 행위에형벌을 부과해 범죄로 유형화할 것인가의 관점은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 시대에는 신의 뜻, 절대 왕조 하에서는 왕의 명령이 기준이기도 했고, 성리학적 유교 이념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조선 시대에는유교 이념이 결정적인 기준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오늘날 형법은 법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유형화해 이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법익이란 사회의 평화로운 공존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으로 보호해야할 가치 또는 이익을 말한다. 즉, ‘보호 법익을 침해하는 행위들이 범죄가 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행정질서벌인 과태료와 형벌의 차이 점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행정 ‘형벌‘의 부과는 행정 목적과공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국가적·사회적 비난, 즉 행정법 규범 위반 행위에 대한 사회 윤리적 명예 훼손적 비난을 포함하는데 반해, 행정질서벌로서의 ‘과태료 부과는 당해 행위가 초래하는질서 위반에 대해 단순히 강력한 의무 이행 경고를 의미할 뿐 사회적비난이라는 평가는 포함하지 아니한다는 본질적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입법권자는 단순한 질서 규정 위반에 그칠 뿐 사회 윤리적비난이나 사회적 위험성이 없는 행정 법규 위반 행위에 대해는 행정 힘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는 입법적 한계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23이와 같이 헌법재판소가 형벌과 다른 제재 수단들의 본질적 차이를형벌이 가지는 사회 윤리적 비난에서 찾고 있음은 궁극적으로 형벌 부과 대상인 범죄 행위의 불법성에 존재하는 사회 윤리적 반가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범죄 행위의 불법성 내지 죄질을 평가할 때에는 범죄 행위로 인해 발생한 피해, 결과의 중대함뿐 아니라 행위자의고의 유무와 행위 태양의 위험성 등 사회 윤리적 행위 반가치도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는 판시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벌규정은 인간(자연인) 외에 기업(법인)에도 형벌의 일종인 벌금형을부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형법에 규정돼 있는 범죄인 횡령죄나 배임죄 또는 살인죄나 과실치사죄 등에 대해 기업(법인)은 아무런형사 책임도 지지 않지만, 일정한 법률 속에 양벌 규정이라는 제목을가진 벌칙 규정에서 지시되고 있는 위반 행위와 관련해서는 기업(법인)도 형사 책임을 지는 것이다.
현재 양벌 규정은 환경보건법, 화학물질관리법 등 행정 단속 목적이특히 강한 5백여 개의 법률‘에서 - 특히 행정범으로 불리는 - 위반 행위에 대해 법인(기업)에 대한 형사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양벌규정을포함하고 있는 법률 속에는 각기 다른 수십 개의 벌칙 조항 위반 행위와 형벌이 별도로 존재한다. 양벌규정이 이러한 법률들 속에서 형벌부과의 대상이 돼 있는 모든 위반 행위와 관련해 법인에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위반 행위를 선별하고, 그 위반 행위를 기업(법인의 업무 종사자가 업무와 관련해 행했을 것임을 요건으로 삼아 그기업(법인)에 대해 형벌을 부과한다. 이 규정을 ‘양‘ 규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위반 행위자인 사람(자연인에게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기업(법인) 자체에 대해서도 형벌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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