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만약 내 인생이 죽을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이 질문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지나 온 삶에서 아쉬움이 남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다가, 문득 어떤 삶을 살든 영원히 반복된다면 삶의 의미가 있을까라는 허탈한 생각도 하게 되면서 오히려 무서운 저주가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하게된다.

'시작에서 시작하도록 하자.'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열한 번째 생애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919년 영국 시골 기차역 화장실에서 시작된다.

갓 태어난 아기 해리 오거스트가 산파의 손에 들려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는 이미 지난 여러 번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 죽으면 다시 같은 해, 같은 장소, 같은 몸으로 돌아오는 존재, 저자는 이들을 ‘칼라차크라’라 부르는데,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듯 끝없이 순환하는 삶을 뜻한다고 한다.

처음 몇 번의 삶은 지옥이었다. 해리는 미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종교에 매달리고, 과학으로 설명하려 애쓰지만 답은 없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존재인 버지나아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 숨통이 트이게 되는데, 자신들과 같은 존재들의 모임인 ‘크로노스 클럽’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선형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과 '다른 칼라차크라를 해치지 말 것'이라는 모임의 규칙에 더 해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절대 자세히 알려주면 안 돼."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진짜 본론은 11번째 삶 끝자락에 찾아온 한 어린 소녀의 말 한마디로 시작되는데, 이 책의 첫 장에 담긴 의문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에 대해 말하며, 종말을 막을 방법은 그한테 있다고 한다.

그 뒤로 400쪽이 넘는 분량이 단숨에 넘어간다.

그는 12, 13, 14, 15번째 삶을 오직 그 메시지의 원인을 찾고 막는 데 바친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영화처럼 국가를 넘나들고, 과학자, 암살자, 교수, 정신병자 등 수십 가지의 모습으로 종말을 막기 위한 모험이 펼쳐진다.

클레어 노스는 타임루프라는 익숙한 소재를 완전히 새롭게 비틀었다. 보통 타임루프물은 ‘오늘 하루를 반복’하거나 ‘특정 사건을 되돌리는’ 설정인데, 이 책은 아예 20세기 전체를 끝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가능한 행동의 스케일이 다르다. 한 번의 삶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도, 종교를 세울 수도, 인류 문명을 수백 년 앞당길 수도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의 도덕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저자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 누군가에게는 저주로 다가오면서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절망감이 너무 리얼해서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무기력했다. 동시에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이니까, 이렇게 불완전하고 후회투성이여도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무조건 읽어야 될 소설이다. SF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삶, 시간, 도덕에 대해 한 번쯤 깊이 고민해보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다만 한 가지 주의.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실이 조금 더 소중해지면서도 동시에 조금 더 허무해진다. 그 모순된 감정이 며칠간 따라다닐 테니, 각오하고 페이지를 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