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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육아 - 나를 덜어 나를 채우는 삶에 대하여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평점 :
정지우 작가의 신간. 갑자기 초인종을 ‘띵똥’하고 누르듯 찾아온 아이를 낳고 키운 시간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마음들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육아를 미화하지도 않고 설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쟁적이거나 자극적이지도 않게, 아이와 함께하는 자신의 세계를 그저 담담하게 얘기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고 즐겁고 행복했던 사소한 순간순간을. 그리고 그 때마다 발견하는 삶에 대한 통찰을.
그래서 이 책은 얼핏 육아일기 같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아이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작가 자신의 성장스토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삶을 더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일종의 선언문 같기도 하다.
다음달이 되면 나는 결혼 5년차 부부가 된다. 나는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어서 남편에게 ‘딩크’로 살자고 제안했다. 신체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하며, 아이를 낳지 못할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아이를 사랑하기엔 내 사랑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무엇보다 아이를 낳는 게 그 아이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일일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특별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나는, 정지우 작가가 말하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서사와 감정을, 지금껏 갖지 못했듯 앞으로도 갖지 못할 것이다. 후회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지금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보다, 가임기 여성에게 주어지는 의무보다, 예측되는 현실의 혹독함이 더 두려우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은 ‘아이를 위해 나를 덜어내고 또 다시 아이로 나를 채우는 삶’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생각, 아이를 통해 내가 ’누군가를 지켜내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혹여, 나중에 내가 “그럼에도 육아”라는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 출발점은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지금이 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정지우 작가의 책은, 수려한 문장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글은 없다.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너무나도 무난해 보이는 글.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면 이상하게 빠져들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덤덤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묘하게 마음을 가득 채운다. 담백하게 털어놓는 인문학적 통찰들이 머릿속을 정돈 시키고, 사르르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책은, ’집밥‘ 같다. 자극적이지 않아 혀가 단번에 맛있다고 느끼진 못하지만,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모를 때도 있지만, 어느새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채워주는 집밥. 식사를 준비하는 이의 사랑 한 스푼, 함께 먹는 사람과의 즐거움 한 스푼,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내는 여유 한 스푼이 더해진 집밥. 이 책은, 그런 맛이 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모두의 성장에 조금은 더 눈이 밝아지는 일 같다. 자라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삶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란다.” / 181
📍“언젠가 늦은 밤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가 어질러놓은 블록 하나 없는 날이 오면, 나는 아마 약간 허탈하게 소파에 앉아 잘 정돈 된 텅빈 듯한 집을 다소 허전하게 바라 보고 있을 듯하다. ... 삶이란 본디 부대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정이 있고, 애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런 걸 하려고 사는 것이다.” / 73
📍“내 세월 , 내 시간, 내 삶은 이것을 위해 여기 있다. 나라를 구하거나, 노벨상을 받거나,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하잘것없는 것으로 치워버린 자리에서, 그냥 사랑하며 소모하고 떠나보내기로 택한 것이 어느 시절의 삶이고, 하루 이다.” /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