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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평점 :

출간 13주년 기념, 전면 개역판. 김석희 번역가의 ‘혼이 담긴’ 역작.
자그마치 800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라, 번역도 힘들었겠지만 읽는 것도 사실 쉽지 않았다. 벽돌책을 받아든 순간 ‘대모험‘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완독을 위해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첫 장을 펼치는 내 모습이, 마치 포경업자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목숨 건 항해를 떠나는 모습 같았다. 좀 과장된 표현 같지만, 진짜다.
이 소설이 나에게 ’대모험‘이었던 이유는 분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단 ‘포경업‘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고래를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내가 고래잡이를 봤을리가. 작살을 던지고 밧줄을 당기는 장면을 모두 상상에 의존하려니 읽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세세한 묘사와 속도감 있는 문장도 작가의 광활한 상상력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흥분과 긴장을 느끼게 했다. 눈으로 읽고 있지만 어디선가 웅장하고 떠들썩한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에, 고래에 관한 방대하고도 전문적인 지식까지 더해지니 실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이다. 고래가 ‘2절판, 8절판, 12절판’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나 고래에게서 ’용연향‘이라는 향기나는 물질이 있다는 사실 등은 평소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정보가 아니던가. 뭐, 어느 지점에선 ‘고래가 이런 생물이구나‘ 알아가는 게 꽤 흥미롭기도 했지만. 하여간 고래학 전문가가 집대성한 ‘고래 대백과사전’이라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소설이었다. 고래를 좋아하는 우영우가 이 책을 읽었다면 정말 행복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인간에게 잔인하게 죽는 고래를 보며 도리어 슬퍼 했으려나.
소설은, 에이해브 선장이 흰 고래 모비 딕을 추적하는 이야기에 여러 에피소드가 덧붙여졌다. 에이해브는 40년 전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복수심에 사로잡혀 사는 인물. 그는 집착과 광기를 버리지 못하고 모비 딕을 추적하다가 결국 선원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나는 에이해브와 모비 딕을 보며, 광활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인간의 실존을 생각했다. 고래를 정복하겠노라 작살을 던지지만 그 작살에 도리어 목숨을 잃고 마는 인간. 자신의 힘을 고래에게 잔인하게 휘두르지만 고래의 몸짓 하나에 바다 속으로 맥 없이 삼켜지는 인간. 고래에게 한쪽 팔과 다리를 잃고선 고래뼈로 팔과 다리를 만드는 모순적인 인간. 인간이 바로 그런 유한한 존재라고.
뿐만 아니라 에이해브 선장이 구약 성서에서 가장 악독한 ‘아합 왕’을 모티브한 인물인만큼, 리더의 중요성도 되새기게 되었다. 포악한 선장 에이해브에게 “저는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스타벅도 매력있게 다가왔다.
📍“지상에 군림하는 신이 하나뿐이듯 ‘피쿼드’호에 군림하는 선장도 하나뿐이다! 밖으로 나가!”(638)
📍“선장님은 웃을지 모르지만,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경계해야 합니다. 영감님, 자신을 조심하세요.”(638)
고래는 상업적 포경과 기후위기로 개체수가 급격하게 감소했고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고래가 인간에게 잔인하게 죽임 당하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더 이상 인간의 탐욕과 자본주의에 고래가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포경이 사라지기를, 그래서 훗날, 야만인과 다를 바 없었던 인간의 과거 기록만 이 소설에서 들춰볼 수 있기를 바란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완독하긴 쉽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가슴 가득 주었던 소설이다. 다른 번역보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김석희 역자의 번역으로 읽어보기를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비극도 너무 장엄하면 슬픈 게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걸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하는데, 내가 뭔가 고양되는 느낌, 그래서 내 삶이 구원받는 느낌이 드는 것—그게 문학을, 예술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이유가 아닐까. (…) 감히 말하건대, 『모비 딕』만큼 그런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도 드물 것이다.“ ― 김석희(번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