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구상자는 그 분야의 간략한 역사서술과 용어사전이다(새로운 역사서술은 새로운 용어를 요구하며, 새로운 용어는 새로은 시각의 역사서술을 요청한다). 미술사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겠다. 물론 현장에서 미술을 '실천'하는 아티스트들의 경우에 이러한 개념적 도구들까지 직접 챙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걸 필요로 하는 건 비평가나 관람자들이다. 혹은 미술 텍스트의 일반 독자들이다.

 

 

 

 

시야를 좀 좁혀서 20세기 현대미술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역시나 필요한 건 이 시기 미술사에 대한 개관이고, 그걸 서술하기 위해 동원되는 개념들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책이 새로 출간됐다.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31>(아트북스, 2006)이 그것이다. 원제는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들(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 Second Edition)>(2003)이니까 말 그대로 '비평용어사전'이며, 국역본 표제로 보아 그게 31가지인 모양이다. 743쪽의 두께이니까 일단은 듬직하다. 빼먹은 것 없이 다루겠구나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니까.

아직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지라, 알라딘이 소개를 옮겨오면, "'기호'에서 '아방가르드', '몸', '미', '예술의 사회사'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주요 용어 31개를 상세히 분석했다. 재현, 기호, 이미지, 시뮬라크룸, 양식, 문맥, 전용, 몸, 젠더, 미, 추, 응시, 정체성, 시각문화 등 미술사 비평용어에 관해 씌어진 31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공저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S. 넬슨은 "2006년 현재 시카고 대학의 미술사 및 문화사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돼 있는데, 확인해보니 작년에 예일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 미술사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시카고나 예일이나 여하튼 명문대학의 미술사 강좌를 엿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해준다는 의미도 된다.

책의 특징? "미술이론을 비롯 다른 분야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는 비평용어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예컨대 '재현'을 기술하고자 하는 경우, 시각예술에서 논의되는 미학적이고도 예술적인 담론뿐만 아니라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담론들을 포괄하여 표상, 관념, 존재, 의미, 상징, 기호 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식이다.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까지 해당 용어에 관한 개략적이고도 세부적인 논의의 역사도 함께 설명한다." 하니, 미술사나 미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될 만하다(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게임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두어 번은 통독해야겠다.


아직 번역본의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역자의 전력상 신뢰할 만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원서는 이런 모양새이다. 2003년에 나온 2판인데, "초판(1996)에는 22편의 에세이가 실렸고, 제2판(2003)에는 새로운 미술사의 학문 추세를 반영한 9편이 추가되었다. 추가된 에세이에서는 양식, 퍼포먼스, 정체성, 몸, 기억과 기념비 등의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2판을 찍었다는 건 교재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되겠다. 이 분야의 전문가나 미술비평가들의 리뷰를 읽고 싶지만, 당장 눈에 띄지 않기에 자리나 데우는 페이퍼를 미리 써둔다.
 
06.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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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쓴 글을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었고 한 잡지의 청탁을 받아서 3배쯤 되는 초고를 쓴 이후에 다시 줄인 것이다(초고는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었다). 7월말쯤에 씌어졌지만 9월호에 맞추기 위해서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두이노의 비가>에 대해 몇 마디 주절거리게 되었던 것인데, 책이 기억에는 8월 중순쯤 나왔을 법하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이지만, 조금 앞당겨서 이 글을 호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곧 가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 '가을날'이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시는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이다. 그리고 이 <비가>를 읽어보기 위해서 얼마전 러시아어로 번역된 릴케시 선집을 한 권 샀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속지 군데군데에 들어가 있는 손바닥만한 포켓북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통해서였는데, 그게 벌써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었는데, 가령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같은 시구를 당신은 접해본 적이 있으신지? 당시에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왜 그런가? 일단 처음 두 구절을 옮겨본다(번역은 우리말 번역본들과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조합한 것이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릴케의 시구이면서 동시에 그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에는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건 '천사’인데, 이 시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거라는 것. 천사는 너무도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야한 비유이지만, 가령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인다고 해보자.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왜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할까? 그건 진리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해서, 릴케의 <비가>는 시작부터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허무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시라.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 가을날, 우리의 삶은 그런 울음과 울부짖음 속에서도 딴은 탐스럽게 익어가나니...(<삶과 꿈>, 2004년 9월호)

 

 

 

 

04. 07. 26./ 06. 08. 07.


릴케, 두이노의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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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스바움을 기다리며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민교육'이란 주제도 괜찮아 보인다. 우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아서이다. 다른 저작들도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경향신문(11. 08. 06) 교육, 이익이 아닌 시민을 만들라

책의 원제는 ‘Not For Profit’이다.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 누스바움(64)이 강조하는 핵심은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세계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주목하는 교육의 목적이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다른 문화권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감소시키며, 전 지구적인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능력을 오히려 손상시킨다”고 진단하면서 “교육을 국민총생산의 도구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교육의 목적을 ‘이익’이 아닌 ‘민주주의’로 환원하자는 얘기다.

이러한 주장에는 ‘위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저자가 보기에 “교육의 목적이 마치 경제성장인 양 행동하고 있는 사태”는 이제 세계적인 흐름이다. 저자는 주로 미국과 인도의 사례를 들고 있지만,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이로 인해 세계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시민정신의 기초가 흔들리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책의 곳곳에 깔려 있다.

저자가 열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의 부활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발상지였던 유럽에서조차 상황은 비관적이다. “유럽의 인문학 학과들은 미국의 인문학 학과들이 그러하듯이… 이윤창출에의 기여도가 보다 뚜렷한 다른 학과들에 합병되기 십상이다. 합병되고 만 학과는 이윤창출에 가깝거나 그렇게 보이도록 자체 요소들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를테면 철학과가 정치과학과에 합병되는 경우, 플라톤 연구나 비판적 사색의 기술,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 따위가 아니라 기업윤리 같은 것들을 강요받는다. 오늘날의 유행어는 바로 ‘효과’이며, 그것이 명확하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 경제적 효과다.”

그것은 “유능한 기술·비즈니스 엘리트들을 양산해 GNP를 상승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불평등을 무시하는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도덕적 둔감성”을 키운다. 아울러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적 적대 프로젝트”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예컨대 “기괴하고 거대한 ‘문명의 충돌’에 자신이 참여하는 사태를 기분좋게 여기게” 하며, “세계의 ‘다른 곳’에서 온 ‘나쁜 놈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게 한다.

저자는 잘못된 교육이 결국 “악독한 사유”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문학과 예술교육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명령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세계에서 불현듯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한 인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존경과 공감을 받을 만한 자신의 생각을 지닌 채, 타인을 전인적 인격체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이성적이며 공감에 바탕한 논쟁을 위해 공포와 의심을 극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들을 창조”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오늘날의 교육에서 중요한 교수법으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지혜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보여주는 열정적 상호작용,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강조하는 주체적으로 삶을 해결하는 의지와 타인과의 동등한 삶의 가치, 페스탈로치가 실천했던 공감과 사랑의 교육, 독일 교육가 프뢰벨이 시도한 놀이를 통한 교육, 미국의 현대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가 제창한 경험으로서의 교육 등에 주목한다. 인도의 타고르가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수용하는 교육을 실천하려고 참여형 학교를 설립했던 사실도 떠올린다. 이 모두가 오늘날 유용하다는 것이다. 법철학, 정치철학, 고전학, 연극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인문주의자인 저자는 현재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08. 07. 

  

P.S. 누스바움에 관해서는 예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마사 너스봄'이란 저자명으로 나온 편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삼인, 2003)이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도 꼽을 수 있겠다. 원제는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그리고 교육 문제를 다룬 책들에 대한 가이드로는 '앎과 삶' 시리즈로 나온 <교육>(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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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8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주말까지 강의를 하고 1박2일 휴가를 다녀오는 바람에 서평을 썼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폴 우드러프의 <최초의 민주주의>(돌베개, 2012)에 대한 것인데, 책의 몇가지 논점에 대해서는 관련서들을 더 읽고서 따로 다루고 싶다. 저자의 책으론 <연극의 필요성>도 이번에 구입했는데, '민주주의와 연극'이란 주제를 다루는 듯하다. 소개됨직한 책이다... 

 

 

 

주간경향(12. 08. 14) 아테네 민주주의는 무엇을 추구했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람들에 의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다. 그 ‘사람들’ 대신에 ‘국민’이나 ‘인민’이란 말을 넣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무엇이 민주주의인가? 투표? 다수결의 원칙? 대표선출제?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민주주의의 구현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민주주의의 대역(代役)이고 그림자일 뿐 그 자체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재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까.

 
폴 우드러프의 <최초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이 그렇다. 잘못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것. “우리가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대역들에 이끌린 채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모범적인’ 민주주의의 실례를 참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모범으로 삼은 것은 ‘최초의 민주주의’, 곧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다. 완벽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고안한 주인공들이지만 아테네 민주주의 또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함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이상을 향한 그들의 끊임없는 도전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다.

 

최초의 민주주의가 지향했던 이상은 무엇인가? 저자는 일곱 가지 이념을 지목한다.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시민 지혜, 지식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추론, 그리고 일반 교양교육이 그가 꼽은 일곱 가지 이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인데, 저자는 최초의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이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시민의 평등한 정치참여라고 본다. 참주란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법 밖에서 통치하는 군주를 가리킨다. 요즘이라면 독재정치에 가깝겠지만, 실상은 좀 더 복잡하다. 개인이 아닌 집단도 참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주정은 흔히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등장하기에 곧바로 알 수는 없고 징후를 통해 식별해야 한다. 저자가 일러주는 참주정의 징후는 이렇다. 정치적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이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말로는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법 위에 세우려 한다.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받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는 자로부터는 조언이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가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이런 징후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즉각 경계태세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유의 본질, 곧 아테네 시민이라면 민회에서 발언할 권리를 제한하고 억압하기에 참주정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은 민주주의가 다중(多衆)에 의한 참주적 정치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다수결이 대표적이다. 흔히 다수결 원칙과 동일시되는 중우정치는 저자가 보기에 참주정의 일종일 뿐이다. 소수를 위협하고 배제하며 다수에 의한 독재에 종속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주정에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방책은 무엇인가. 교양교육으로서 ‘파이데이아’에 주목하게 되는데, 시민교육으로서 파이데이아의 목표는 전문적인 지식 훈련이 아니라 전문가의 주장에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갖게끔 하는 것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그런 교육의 대표적 수단이 연극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을 보면서 정치적 사안과 활동에 대해 따져볼 수 있었다. 오직 아메리칸 풋볼리그 결승전인 슈퍼볼 시청에만 열중하는 게 대다수 미국인의 현실이라면 과연 최초의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 저자는 묻는다. 우리도 질문에서 비켜나지 않는다. 과연 우리의 파이데이아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12. 08. 08.


민주주의, 그리스, 참주정, 파이데이아,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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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내로 쓰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너 자신을 세라'는 제목의 책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자기 반영적인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데, 그런 관심사에서 <책 읽는 뇌>(원제는 '프루스트와 오징어'이지만)나 뇌과학, 그리고 인지주의에 관한 책들도 조금 들춰본다(이 경우에도 내게 가장 유익한 건 지젝의 책들이다). 아무래도 조금씩은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맛보기로 삼자면 아래와 같은 '드루들'이 내가 생각하는 컨셉이다. 예전에 로저 프라이스의 <낚시질하는 물고기>(창해, 1994)란 책이 소개된 바 있는데, 이미지를 온라인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폰카로 찍어 옮겨놓는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 드루들의 제목이 'Fish fishing', 곧 '낚시질하는 물고기'다. 저자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시끄럽게 굴기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루들(droodle)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시비를 걸었다. “왜 낚시바늘에 미끼가 달려 있지 않은가?” 혹은 “어떻게 낚시줄을 묶을 수 있었는가?” 등등. 그 대답은 이렇다. 이 물고기는 영리하므로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곧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미끼는 필요없다. 게다가 물고기를 잡는 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고, 낚시질하는 그 자체에만 흥미가 있다. 이 드루들에 가까이 다가가서 잘 살펴보면, 낚시줄은 그 물고기의 할아버지가 단정하게 세로매듭으로 만들어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력과 은총>(1996)이란 책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고 나는 이렇게 적었더랬다. "'8월에 내리는 눈'과 같은 책, 나는 언젠가 그런 걸 쓰고 싶다." 8월이어서 문득 그 생각이 났다... 

09. 08. 02.  

P.S.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그 이후에 나온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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