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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저급의 번역이다.
출판사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최대한 존중하여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며 "최초의 프루스트 전공자" 운운하면서 잘도 떠들어댄다.
전공자라서 어떻다는 것인가? 전공자면 프랑스어를 잘하고,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넘치도록 많다.
아마도 이 번역이 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번역본의 첫째 문단부터 소설의 내용을 엉터리로 이해한 부분이 등장한다. 터무니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다.
시제 표현이나 세세한 뉘앙스의 문제는 해석의 차이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문체와 ‘자연스러움’도 주관적인 면이 크기에 따지지 않는다.
명백한 오역이나 누락만을 살펴보자.
첫 문단이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약간 특이한 행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1)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믿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초 더 지속되어 내 이성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비늘처럼 무겁게 짓눌러 촛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이 믿음은( 2)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책의 주제는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나는 마음대로 책의 (3)주제에 전념하거나 전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내 시력을 회복한 나는 주위의 어둠에 놀랐다. 내 눈에 부드럽고도 아늑한 어둠은, (4)내 정신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로 모호하기만 한 그 무엇으로 느껴졌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5)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였다. 그가 따라가는 오솔길은 새로운 장소, 익숙하지 않은 행동, 밤의 침묵 속에 (6)늘 따라다니는, 낯선 램프 불 밑에서 나누었던 얼마 전의 대화와 작별 인사, 임박한 귀가의 감미로움에서 오는 흥분으로 그의 추억 속에 아로새겨질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1)
민음사 김희영: “나 자신이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
펭귄 이형식: ...프랑스와 1세와 까를로스 낀또 간의 적대관계 등이 곧 나 자신인 것으로 여겨졌다. (○)
김창석: ...대결 등등이, 흡사 나 자신의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
il me semblait que j’étais moi-même ce dont parlait l’ouvrage : une église, un quatuor, la rivalité de François Ier et de Charles Quint.
⇒ 원저의 내용은 <내 자신=책에서 말하는 주제>인 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성당, 나=사중주, 나=적대관계.
펭귄본과 김창석의 번역은 이를 정확히 나타내었다.(김창석은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무리는 없다.)
민음사의 번역은 <내 자신=주제>가 아니라, <내가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에 있다>는 의미, 즉 <내가 두 사람과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 민음사 번역의 문제는 단순 오식일 가능성도 있다. “카를 5세의”를 “카를 5세와”로 잘못 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무튼 그대로라면 오역이 된다.
(2)
민음사: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펭귄: 윤회 후 전생에 가졌던 생각들이 그러하듯 (○)
김창석: 윤회전생하고 나서 전생에 있어서의 사념들처럼 (○)
comme après la métempsycose les pensées d’une existence antérieure
⇒ 원저의 내용은 <나=책의 주제>라는 믿음이 잠이 깨고 나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마치 윤회로 다시 태어난 뒤의 전생에 대한 기억과 같다는 것이다.
민음사 판의 오역 중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부분이다. 역자가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무슨 말인가? 그 자체로 애매한 문장이다. 이는 윤회설의 전생론이 불가해하다는 말로도, 윤회설은 어떻든 ‘전생에 대한 상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윤회설의 등장은 터무니없다.
(3)
민음사: 주제에 전념하거나 전념하지 않을 수 (×)
펭귄판: 그것에 나 자신을 접착시키느냐 마느냐 (○)
김창석: 그 주제에 골몰하거나 말거나 (×)
j’étais libre de m’y appliquer ou non
⇒ <책의 주제=나>였던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책의 주제>와 붙일 수도 뗄 수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전념’이나, ‘골몰’이라는 ‘의지적’ 심적 상태와는 무관하다. 다소 표현의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으나, 펭귄판 이형식의 번역만이 오역을 피했다.
(4)
민음사: 내 눈에 부드럽고도 아늑한 어둠은, 내 정신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로 모호하기만 한 그 무엇으로 느껴졌다. (×)
펭귄판: 아마 나의 오성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김창석: 나의 정신에...아마 더욱 쾌적하며 더욱 아늑할지도 모르는 일 (○)
une obscurité, douce et reposante pour mes yeux, mais peut-être plus encore pour mon esprit
⇒ <어둠이 눈에는 부드럽고 아늑하지만, 나의 정신에는 훨씬 더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정신에 ‘느껴지는’ 어둠의 속성이 민음사 부분에서는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이는 누락해도 좋을 사소한 내용이 결코 아니다.
정신은 기본적으로 ‘원인’을 따지고 지성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그런데 어둠은 정신이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에도, 정신에게 눈보다 훨씬 더 (plus encore) 부드럽게 아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독특한 시각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5)
민음사: 점점 멀어져 가더니, (×)
펭귄판: 상당히 먼 곳으로부터 (○)
김창석: 그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
plus ou moins éloigné
⇒ 기차의 경적소리가 다소 멀리서, 어떤 숲 속의 새의 노래처럼, 들린다는 의미이다.
민음사판의 <점점 멀어져 가는> 변화상은 원문에 없다. 펭귄판은 plus ou moins의 관용적 해석을, 김창석판은 축어적 번역을 했다.
민음사판은 역자가 본인이 가진 통속적인 이미지를 원문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
화자의 이미지 속에는 민음사판과 달리 기차가 <멀어져가는> 부분이 없다. 화자의 이미지는 <막연히 먼 거리감>을 담고 있다. 이 막연함을 어딘가 숲속의 새의 노래라는 이미지가 더 강화한다.
민음사 판은 멋을 부리느라고 자신의 통속적인 이미지의 변화상을 굳이 넣어서 오역을 만들고 말았다. 펭귄판과 김창석 판은 뉘앙스의 차이는 있으니 옳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6)
민음사: 밤의 침묵 속에 늘 따라다니는, (×)
펭귄판: 아직도 밤의 적막 속에서 나그네를 따라오고 있는 (○)
김창석: 아직도 밤의 고요 속에 뒤쫓아 오는 (○)
qui le suivent encore dans le silence de la nuit,
⇒ 프랑스어의 ‘encore’가 ‘늘’이라는 뜻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차치하자.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왜 ‘늘’이 아니고 ‘아직도’인지 알 수가 있다. 내용을 풀자면, 낯선 등불 아래서 바로 얼마 전 나누었단 한담과 인사말들이, 혼자 밤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듯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늘’이 될 이유가 없다. ‘아직도’는 얼마 전의 인사말과 닿아있는 관계적 시상이지만, ‘늘’은 절대적 시상이다. 민음사 번역은 사전적 의미로도 앞뒤 맥락으로도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문단에서 최소 총 6개의 오역이다. 더 큰 문제는 기존 번역들에 비해 훨씬 더 오역이 늘었다는 것이다. 민음사 번역은 ‘전공자임’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은근히 기존의 번역을 깎아내리지만, 기존 번역에서 오역이 아닌 곳마저 오역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어느 번역본이 더 자연스러운지, 깊이 있는지 하는 문제에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자연스러운 번역이어야지, <자연스러운 오역>이어서는 곤란하다. (혹시 '창조적 오역'(?)을 말한다면 도대체 위의 어떤 부분들에서인가?)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 이전에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부터 제대로 포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