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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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투성이 .
첫 문단부터 오역 6개 ㅠㅠ

(1)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2) 윤회설에서 말하는
(3) 나는 마음대로 책의 주제에 전념하거나 전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4) 내 정신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5) 점점 멀어져 가더니,
(6) 늘 따라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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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 열린책들 세계문학 93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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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중역판과 개역판의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아 현대 한글로 다시 태어난 『신곡』>


그리고 이 번역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 역자 자신의 글을 책소개에 실어 놓았다. 출판사는 이 번역의 우월함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는 생각으로 해당 대목을 옮겨놓은 듯하다. (글의 원본을 읽어보면 역자도 이 사례를 기존 번역들의 졸렬함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로 여기는 듯하다.) 


<몇 가지 실수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지옥」 제21곡 100~101행에 보면, 악마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에 떠는 단테를 가리키며 자기 동료에게 「Vuo’ che ’l tocchi in sul groppone(내가 저 녀석의 어깻죽지를 건드려 볼까)?」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에서 groppone는 <어깨>를 가리키는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하나같이 <궁둥이>나 <엉덩이>로 옮기고 있고, <어깨>로 번역한 판본은 하나도 없다. 악마들의 천박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런 저속한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 이것도 분명히 영어 번역본들의 영향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이를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롱펠로, 세이어즈, 맨덜봄, 코터의 번역본도 하나같이 rump 또는 bottom으로 옮기고 있다. (김운찬, 「고전번역 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57) 단테의 『신곡』」, 『교수신문』, 2006년 12월 26일자)>


<교수신문>에 실린 글이니 확실한 권위로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일만도 하다.


그러나 기존 번역에 대한 역자의 이런 지적은 부당하다. groppone는 groppa(엉덩이)의 확대형으로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며, 최소한 엉덩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groppone는 사람에게 사용될 경우에는 장난과 농담의 맥락에서 주로 쓰이는 표현이므로 (그리고 바로 단테의 해당 본문이 그런 맥락이므로)  '궁둥이'로 번역하는 것에 하등 문제가 없다. 

혹여나 장면 해석의 여지로 그 적확함을 다툰다고 하여도, 적어도 역자가 자신있게 지적한 것처럼 <엉덩이>가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  (만일 역자들끼리 오역을 서로 문제 삼는다고 하면 김운찬 씨의 <어깻죽지> 쪽이 오히려 더 오역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역자가 말하고 있듯이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면, 자신의 판단을 한번 되돌아봄직도 한데, 아무튼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하겠다.


* 교수신문에 실린 번역비평 전체에서도, 역자는 꽤나  자신만만한 평가를 내린다. 

역자는 고 최민순 신부의 번역을 중역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가 뒤에서는 중역이라고 아예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짐작과 단정의 근거는 단 하나도 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민순 신부의 번역과 주석을 살펴보면 역자의 말대로 영어나 스페인어에서 중역했다는 단서를 찾기 힘들다. 결정적 판단이야 어떻든, 적어도 근거를 대려는 노력도 없이 중역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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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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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의 번역이다.

 

출판사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최대한 존중하여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최초의 프루스트 전공자" 운운하면서 잘도 떠들어댄다.

 

전공자라서 어떻다는 것인가? 전공자면 프랑스어를 잘하고,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넘치도록 많다.

 

아마도 이 번역이 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번역본의 첫째 문단부터 소설의 내용을 엉터리로 이해한 부분이 등장한다. 터무니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다.

 

시제 표현이나 세세한 뉘앙스의 문제는 해석의 차이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문체와 자연스러움도 주관적인 면이 크기에 따지지 않는다.

명백한 오역이나 누락만을 살펴보자.

 

첫 문단이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약간 특이한 행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1)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믿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초 더 지속되어 내 이성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비늘처럼 무겁게 짓눌러 촛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이 믿음은( 2)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책의 주제는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나는 마음대로 책의 (3)주제에 전념하거나 전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내 시력을 회복한 나는 주위의 어둠에 놀랐다. 내 눈에 부드럽고도 아늑한 어둠은, (4)내 정신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로 모호하기만 한 그 무엇으로 느껴졌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5)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였다. 그가 따라가는 오솔길은 새로운 장소, 익숙하지 않은 행동, 밤의 침묵 속에 (6) 따라다니는, 낯선 램프 불 밑에서 나누었던 얼마 전의 대화와 작별 인사, 임박한 귀가의 감미로움에서 오는 흥분으로 그의 추억 속에 아로새겨질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1)

민음사 김희영: “나 자신이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

펭귄 이형식: ...프랑스와 1세와 까를로스 낀또 간의 적대관계 등이 곧 나 자신인 것으로 여겨졌다. ()

김창석: ...대결 등등이, 흡사 나 자신의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

il me semblait que j’étais moi-même ce dont parlait l’ouvrage : une église, un quatuor, la rivalité de François Ier et de Charles Quint.

원저의 내용은 <내 자신=책에서 말하는 주제>인 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성당, =사중주, =적대관계.

펭귄본과 김창석의 번역은 이를 정확히 나타내었다.(김창석은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무리는 없다.)

민음사의 번역은 <내 자신=주제>가 아니라, <내가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에 있다>는 의미, <내가 두 사람과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민음사 번역의 문제는 단순 오식일 가능성도 있다. “카를 5카를 5로 잘못 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무튼 그대로라면 오역이 된다.

 

(2)

민음사: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펭귄: 윤회 후 전생에 가졌던 생각들이 그러하듯 ()

김창석: 윤회전생하고 나서 전생에 있어서의 사념들처럼 ()

comme après la métempsycose les pensées d’une existence antérieure

 

원저의 내용은 <=책의 주제>라는 믿음이 잠이 깨고 나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마치 윤회로 다시 태어난 뒤의 전생에 대한 기억과 같다는 것이다.

민음사 판의 오역 중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부분이다. 역자가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무슨 말인가? 그 자체로 애매한 문장이다. 이는 윤회설의 전생론이 불가해하다는 말로도, 윤회설은 어떻든 전생에 대한 상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윤회설의 등장은 터무니없다.

 

(3)

민음사: 주제에 전념하거나 전념하지 않을 수 (×)

펭귄판: 그것에 나 자신을 접착시키느냐 마느냐 ()

김창석: 그 주제에 골몰하거나 말거나 (×)

j’étais libre de m’y appliquer ou non

 

<책의 주제=>였던 상태에서 벗어나 <><책의 주제>와 붙일 수도 뗄 수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전념이나, ‘골몰이라는 의지적심적 상태와는 무관하다. 다소 표현의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으나, 펭귄판 이형식의 번역만이 오역을 피했다.

 

(4)

민음사: 내 눈에 부드럽고도 아늑한 어둠은, 내 정신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정말로 모호하기만 한 그 무엇으로 느껴졌다. (×)

펭귄판: 아마 나의 오성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김창석: 나의 정신에...아마 더욱 쾌적하며 더욱 아늑할지도 모르는 일 ()

une obscurité, douce et reposante pour mes yeux, mais peut-être plus encore pour mon esprit

 

<어둠이 눈에는 부드럽고 아늑하지만, 나의 정신에는 훨씬 더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정신에 느껴지는어둠의 속성이 민음사 부분에서는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이는 누락해도 좋을 사소한 내용이 결코 아니다.

정신은 기본적으로 원인을 따지고 지성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그런데 어둠은 정신이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에도, 정신에게 눈보다 훨씬 더 (plus encore) 부드럽게 아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독특한 시각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5)

민음사: 점점 멀어져 가더니, (×)

펭귄판: 상당히 먼 곳으로부터 ()

김창석: 그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

 plus ou moins éloigné

 

기차의 경적소리가 다소 멀리서, 어떤 숲 속의 새의 노래처럼, 들린다는 의미이다.

민음사판의 <점점 멀어져 가는> 변화상은 원문에 없다. 펭귄판은 plus ou moins의 관용적 해석을, 김창석판은 축어적 번역을 했다.

민음사판은 역자가 본인이 가진 통속적인 이미지를 원문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

화자의 이미지 속에는 민음사판과 달리 기차가 <멀어져가는> 부분이 없다. 화자의 이미지는 <막연히 먼 거리감>을 담고 있다. 이 막연함을 어딘가 숲속의 새의 노래라는 이미지가 더 강화한다.

민음사 판은 멋을 부리느라고 자신의 통속적인 이미지의 변화상을 굳이 넣어서 오역을 만들고 말았다. 펭귄판과 김창석 판은 뉘앙스의 차이는 있으니 옳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6)

민음사: 밤의 침묵 속에 따라다니는, (×)

펭귄판: 아직도 밤의 적막 속에서 나그네를 따라오고 있는 ()

김창석: 아직도 밤의 고요 속에 뒤쫓아 오는 ()

qui le suivent encore dans le silence de la nuit,

 

프랑스어의 ‘encore’이라는 뜻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차치하자.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왜 이 아니고 아직도인지 알 수가 있다. 내용을 풀자면, 낯선 등불 아래서 바로 얼마 전 나누었단 한담과 인사말들이, 혼자 밤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듯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 될 이유가 없다. ‘아직도는 얼마 전의 인사말과 닿아있는 관계적 시상이지만, ‘은 절대적 시상이다. 민음사 번역은 사전적 의미로도 앞뒤 맥락으로도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문단에서 최소 총 6개의 오역이다. 더 큰 문제는 기존 번역들에 비해 훨씬 더 오역이 늘었다는 것이다. 민음사 번역은 전공자임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은근히 기존의 번역을 깎아내리지만, 기존 번역에서 오역이 아닌 곳마저 오역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어느 번역본이 더 자연스러운지, 깊이 있는지 하는 문제에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자연스러운 번역이어야지, <자연스러운 오역>이어서는 곤란하다. (혹시 '창조적 오역'(?)을 말한다면 도대체 위의 어떤 부분들에서인가?)

텍스트의 미세한 떨림이전에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부터 제대로 포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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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민주주의 2 대우고전총서 44
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이용재 옮김 / 아카넷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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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가독성이나 용어 선택 등의 번역의 질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내용 이해의 측면에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책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다룰 여력은 없고, 번역 소식에 책을 구매하려고 미리보기로 내용을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어서, (*문고 사이트에서) 미리보기로 공개된 부분을 임의적 표본으로 삼아 살펴본다.)

 

1.

 

211아메리카인들의 철학적 방법에 대해는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도 아주 유명한 부분이다. 번역서의 27-28쪽에 걸친 문단은 미국인들의 철학적 방법이라고 할 만한 것의 주요 특징을 말하고 있다. 문제는 그 문단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 주요 특징은]...사물의 이치를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탐색하는 것, 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결과를 추구하는 것,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서는 것 따위이다.”

 

그런데 바로 두 쪽 뒤 30쪽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아메리카인들은 형식이나 절차 따위를 경멸하는데, 형식이라는 것을 그들과 진리 사이에 놓인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막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 철학적 방법인 사람들이 <형식을 경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토크빌이 미국인들에 대해서 모순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혼란스럽다.

이는 앞 구절의 내용과도 일관적이지 않다. <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결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서려> 한다고?

토크빌이 횡설수설하는 것인가?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서는 것Flammarion 판에서 “viser au fond à travers la forme”이라고 되어 있다. “viser à A à travers B”는 "B 너머(가로질러) A를 겨냥한다(겨눈다)"는 말이다. <밭을 가로질러(밭 너머) 늑대를 겨냥한다>고 하는 경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그렇다면 애초의 문장은 <형식 너머(혹은 형식을 가로질러) 본질을 겨냥한다>는 뜻이며, 좀 더 직역에 가깝게는 <틀 너머 바탕을 겨냥한다> 정도가 되고, 뜻만 살리면 <형식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한다>, <틀이 아니라 바탕을 보려한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번역을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fond’본질로 번역하느냐 바탕으로 번역하느냐, ‘다가선다가 여기서 무슨 뜻이냐 따위의 문제는 제쳐두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à travers”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이해 때문에 토크빌의 진단이 모순이 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취지는 미국인들은 유럽인과는 달리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형식에 기대지 않고, 진리에 다가가려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형식을 경멸하고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간다>고 하면 안 되고,  <형식을 건너뛰어> 혹은 <형식 너머로> 본질을 겨냥한다고, 좀 더  내용을 살리는 쪽으로 하면 아예 정반대로 <형식을 통하지 않고> 본질에 다가가려 한다고 써야 한다. 역자가 내용을 정반대로 이해한 셈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형식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서는 것과는 반대다.

 

외국어 해독 능력이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누가 그런 걸 자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앞뒤 맥락에도 맞지 않고, 두 쪽 뒤에 나오는 대목과 곧바로 상충하는 식으로 이해한 내용이 책에 들어있다면, 이는 가볍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가령,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데 두 쪽 사이에 모순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 책을 신뢰할 수 있을까?

 

 

2.

 

미리보기에 공개된 부분만으로 판단할 때, 역자는 대체로 간단한 내용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지는 부분들에서는 부정확한 이해를 내보인다.

(물론 하필이면, 미리보기에 공개된 부분만 잘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모든 부분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글의 평가는 몹시 한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고, 무시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출판사는 토크빌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 원전 완역본 출간이라며 자신만만한 문구로 책을 광고한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조금 낯부끄러울 텐데, 아마 기존의 번역본과 차별화를 꾀해 판매를 진작하려는 의도겠지.

 

그러나 여기서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 말고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문구일지 모르겠다. <유려한 문체를 포착?>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룬 대목 전체를 가져와서 간단히 살펴보자.

 

Comme c’est à leur propre témoignage qu’ils ont coutume de s’en rapporter, ils aiment à voir très clairement l’objet dont ils s’occupent ; ils le débarrassent donc, autant qu’ils le peuvent, de son enveloppe, ils écartent tout ce qui les en sépare et enlèvent tout ce qui le cache aux regards, afin de le voir de plus près et en plein jour. Cette disposition de leur esprit les conduit bientôt à mépriser les formes, qu’ils considèrent comme des voiles inutiles et incommodes placés entre eux et la vérité.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만을 믿는데 오랫동안 익숙해진 까닭에, 아메리카인들은 자신과 관련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꼼꼼하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사물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며 사물에 대한 통찰을 가로막는 칸막이를 제거하고 사물을 감싸는 모든 장막을 벗겨낸다. 그리고 마침내 사물을 가장 명료하게 포착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아메리카인들은 형식이나 절차 따위를 경멸하는데, 형식이라는 것을 그들과 진리 사이에 놓인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막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아카넷 판> 30쪽 첫째 문단)

 

 

<오랫동안 익숙해진>다는 내용은 없다. <꼼꼼한 관찰>은 좀 곤란하다. <사물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도 무리다. <사물에 대한 통찰>? <마침내...명료하게 포착>? 으응? 어디에 이런 내용이?

특히 <절차>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형식적 절차”, “절차와 형식을 따름등의 관용적 표현 하에서 형식을 이해하여, 역자가 과감히 삽입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토크빌이 쓰고 있는 형식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거치는 틀에 맞춘 의례적 과정이나 절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 파악과 관련된 철학적인 의미다. “절차라는 단어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

 

물론 내가 번역자의 더 깊은 이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과연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정말 아닌 것 같다.

 

번역의 유려함은 제쳐두고 소위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옮겨보면 얼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목격한 것에만 의존하는 습성이 있기에, 그들은 자신이 대하고 있는 사물을 아주 명확하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물을 더욱 가까이에서 환한 빛 속에서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사물의 겉포장을 벗겨내고, 그들과 사물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치우고, 사물을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모든 것을 들어낸다. 이러한 정신적 성향으로 인해 그들은 이윽고 형식을 경멸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은 형식을 그들과 진리 사이에 놓인 쓸모없고 성가신 장막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토크빌의 문체를 평가하기는 힘들더라도, 그의 논지 전개의 유려함은 알 수 있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목격한 것에만 의존한다. --> 그래서 사물을 뚜렷하게 보고 싶어 한다. --> 그러려면, 사물을 밝은 곳에서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 미국인들은 사물의 겉포장을 벗겨내고, 우리와 사물을 가로막는 것을 치우고,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을 모두 들어낸다. --> 그 결과 미국인들은 형식을 경멸하기에 이른다(conduit).>

 

그러니까 이야기가 미국인들의 인식론적인 경향성에서 시작해서, 사물을 <뚜렷하게 보려는> 욕구로 넘어가고, 그를 위한 미국인들의 인식론적인 활동의 특성으로 전개되어, 최종적으로 형식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는 것이다.

 

과연 <아카넷>의 번역이 <유려한 문체를 포착>했노라고 그토록 자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유려한 논지 전개> 만이라도 제대로 포착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카넷> 출판사는 토크빌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 원전 완역본 출간이라고 주장한다.

<원전 완역본>은 맞는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토크빌 특유의 <유려한 문체를 포착했다>는 주장과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가 의심스럽다면, 원전 완역본이라는 가치는 크게 퇴색될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아마 <아카넷> 측에서 기존의 번역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까지는 주장할 수도 있겠다만, 이대로라면 상술에 젖은 과대광고라는 평가를 피해가기는 어렵겠다.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한' 새로운 번역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유려한 문체' 운운할 때가 아니다. 

 

p.s. 나는 역자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역자는 자신의 이해가 닿는 한 힘껏 번역했으리라고 믿는다. 다만 <유려한 문체>니, <원문의 정확한 의미>니 떠들어대면서 독자를 우롱하는 출판사의 파렴치함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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