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동자 안의 지옥 -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
캐서린 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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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산후 정신증을 앓았던 한 여자의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산후 정신증으로 인해 느꼈던 감각 경험들, 정신 병원에서의 생활 등을 들려준다. 이전에 읽었던 <오래된 기억들의 방>에서 처음으로 산후 정신증에 대해 들었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매년 1400명 정도가 이 병을 앓는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후 대부분의 산모가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제 익숙한 사실이 되었지만, 환시나 환청까지 경험하는 정신증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진다.


출산 후 내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신 이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육체는 단지 주기 위해, 생명체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했다. 소모되는 것 이상이었다. 내 몸과 정신은 모두 케이토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이런 모호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내게 이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추었다. 나는 몸일 뿐이었다. 정체성이 없었고, 칠판에 적힌 숫자이며, 생명 유지 기관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p. 175)


아기를 안고 싶어서 몸을 기울여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아기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케이토의 눈이 악마의 눈으로 바뀌었다. 검은 눈에 번쩍이는 빨간 눈동자. 번쩍임. 그리고 보이는 케이토의 눈, 제임스의 눈, 제임스 어머니의 눈. 두려움에 떨며 나를 향해 번쩍 뜬 눈.

나는 숨을 쉬려고 노력했지만 호흡이 점점 짧아졌다. 방안의 벽이 두꺼워지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는 벽이 좁아진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p. 258)


그녀는 단순히 아이를 낳은 경험 때문에 산후 정신증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았던 과거의 경험, 전 남자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했던 경험, 자신의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싹튼 왜곡된 믿음 같은 것들이 모여 문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러한 상태에서 아이를 출산하자 갑자기 과도한 스트레스까지 받게 되어 더욱더 힘들어한다. 하나의 생명을 온전히 내 손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내 몸이 육아의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 자신이 사라진 것만 같은 불안감, 육아와 며느리의 역할에 대한 시부모의 기대가 부담스러운 마음.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녀의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보였다. 자신의 아이를 마냥 사랑할 수 없었던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웠고,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남편과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겪었던 실제 이야기를 담았지만 소설을 읽고 있단 느낌도 받았다. 굉장히 몰입감이 강한 에세이였다. 자신의 아이에게서 악마를 보았던 여자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에게, 모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픈 이에게 이 책 <네 눈동자 안의 지옥>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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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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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겨울밤 난롯가에 모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이 모임의 참석자 중 한 명이었던 더글라스는 사람들이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자신만이 알고 있던 끔찍한 이야기 하나를 풀어 놓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릴 적 누이의 가정교사로, 그녀가 처음 가정 교사 일을 시작했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가정교사 모집 공고를 냈던 이는 아이들의 삼촌이었는데, 그가 말하길 아이들은 2년 전에 부모를 모두 여읜 상태고, 가정교사로 채용되면 아이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엔 찜찜한 조건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돌보며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보고하거나 의논하지 말고 가정교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대화 도중 잠시 언급된 전임자(이전 가정교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첫 일자리에다가, 생각보다 후한 급여, 거기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고용주의 모습에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에서는 시작 부분에 인물관계도를 그려 두어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 전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소설의 내용을 미리 짐작해 보는 장치가 되어 읽으면서 알아가는 재미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소설의 인물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실 이 작품은 몇 주 전에 다른 번역으로 한차례 읽어보았다. 그때는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내용 자체가 모호하기도 했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아 집중이 잘 안되었고, 거기다 카페인의 부족까지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현대어로 쉽게 쓰였다는 이 책이 눈에 띄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내용을 알고 다시 읽는 작품이라 이해가 쉬운 것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지난번 책보다는 편안하게 읽혔다. 그러나 현대적인 문장 때문에 고전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 덜어진 것은 아쉬웠다.


이 작품은 명확하게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책은 유령이 실제하는가를 초점에 두고 볼 수도 있고, 가정교사가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시작된 망상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보다 후자를 생각할 때 더 무섭게 읽힌다. 처음 읽을 땐 유령의 정체와 숨겨진 비밀에만 집중하여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가정교사의 생각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게 보여 자꾸 눈길이 갔다. 거듭 읽을수록 공포 심리 소설의 매력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왜 헨리 제임스를 현대 심리 소설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나사의 회전>은 어둡고 습한 안갯속에서 펼쳐지는 으스스한 이야기에 모호함이 뒤섞여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었다. 심리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최초의 공포 심리 소설이라 불리는 이 작품도 읽어 보길 추천한다. 만약 이전에 이 작품을 읽었지만 번역에 불편함을 느꼈거나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이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고전을 멀리하는 청소년들에게 권해봐도 좋을 만한 책이다.



이 글은 책과 콩나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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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 외할아버지의 손자 키우기
정석희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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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함께 보낸 녀석들이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녀석들이 절대 기억하지 못할 한두 살을 우리는 진하게 같이 보냈다. 녀석들은 벌써 자기들이 기저귀 찼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는 서너 살 무렵의 기억들조차 점점 옅어지고 단편화될 것이다. 나로서는 이 무렵의 소중한 기억들을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사라지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부디 바라건대, 나의 손자들이 나중에 이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 11)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외할아버지가 두 손자들을 돌보며 보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쓴 에세이집이다. 저자의 큰딸과 작은 딸이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고, 모두 워킹맘이었던 터라 외가에서 두 아기를 쌍둥이처럼 돌봐 주게 되었다고 한다. 외손자를 봐주느니 파밭을 맨다’, ‘외손자를 귀애하니 방아깨비를 귀애하지’(p. 6) 같은 옛말도 있다지만, 저자는 오로지 내리사랑으로 외손자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손자들을 돌본 썰을 듣고 있으니 지나간 나의 육아가 떠올랐다. 젖을 언제 먹었는지, 대소변은 언제 얼마나 했는지 매일 기록하던 일상. 서툰 손으로 갓난아기를 목욕시키던 때. 한밤중 깨어나 우는 아기를 토닥이던 기억. 이것저것 육아 용품으로 가득했던 공간. 달큰한 아기 냄새. 지나고 나니 힘들었던 것은 모두 잊히고 그리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드는 생각은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보살핌을 받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이 나의 할머니에게도 행복한 기억이었을까. 이제는 그 질문을 건넬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지만, 내 기억 속에 남은 눈빛들에서 이미 그 답을 들었다고 혼자서 짐작해 본다.

 

도헌이와 경모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우리집을 아예 떠나기까지 만 3년 반 동안, 이렇게 우리집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집이 되었다. 어른들의 집에 아이들이 들어와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집에 어른들이 얹혀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내는 지금도 그때가 참 사람사는 것 같았다고 말하곤 한다. (p. 28)


요즘에는 조부모가 아이들을 돌봐 주는 경우가 많아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하는 이가 꽤 많을 것 같다. 돌봄을 주었던 이는 주었던 대로, 돌봄을 받은 이는 받은 대로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떠오르게 만든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이긴 하나 현실 육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예비 부모들이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황혼 육아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누구의 인생에나 존재하는사랑이 가득 담겼던 그때 그 순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 이 책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를 읽어 보길 추천한다. 이렇게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 할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딸들과 손주들이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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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센티 더 가까워지는 선물보다 좋은 말
노구치 사토시 지음, 최화연 옮김 / 밀리언서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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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이상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이 기분 좋은 대화의 비밀이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한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을 대화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기‘(p. 10)가 바로 그 핵심이다. 책 속에서 예시를 가져와 간단히 설명하자면, 야근 때문에 시간이 늦어져 만나기 어렵다는 썸녀의 문자 메시지에 저도 요즘 쉬는 날이 없어서 너무 지치네요. 최근에는 직원까지 줄어서 정신없이 바쁩니다.”(p. 36)라고 답장하는 경우와 유카 씨, 매일 야근하시느라 힘드셨군요. 일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해요.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같이 기운 나는 음식 먹으러 가요.”(p. 37)라고 보내는 답장의 차이이다. 전자는 자신을 대화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두고 말하는 경우이다. 당연히 후자로 답하는 사람이 호감을 얻기가 쉽다. 저자는 뛰어난 말솜씨가 없어도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대화법만 지키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이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데, 이런 방식의 대화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저자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대화법을 실천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분 좋은 말 한마디로 식당의 서비스가 달라졌던 일, 영업 실적이 올라간 영업 사원, 관심 있었던 여성의 마음을 얻어 진지한 교제로 발전한 남성 등 기분 좋은 말 한마디는 기분 좋은 결과물로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화법의 예시를 보고 있으니, 저자가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이고 글로써 읽고 있음에도 그 말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묻어 있다고 느껴졌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화법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소박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주인공이 에서 상대방으로 옮겨 가는 그 사소한 차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50센티 더 가까워지는 선물보다 좋은 말>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상대방의 호감을 얻는 대화 기술을 알고 싶은 이에게 추천 하고픈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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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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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가장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공항에서 사랑하는 이와 재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네모칸마다 하나씩 채워 모아 마치 커다란 타일 벽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연출한 장면 말이다. 이 소설집도 그 장면처럼 크리스마스를 맞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엮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에는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설정이나 인물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 하나의 줄기로 엮여 있었다. 2021년에 출간된 김금희 작가의 소설 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 수록된 작품이자, 이번 신간 <크리스마스 타일>의 가장 마지막에 실린 단편 크리스마스에는이란 작품이 이 이야기들의 시작점이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시작하여 그들 주변으로 뻗어 나가 여섯 편의 또 다른 스토리를, 가려져 있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반짝이는 이미지와 들뜬 분위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동안 보았던 크리스마스 영화나 소설들도 뭔가 마법 같은 일이나 특별한 행운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도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 책 속 인물들에게는 그런 극적인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도 매일의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현실에 더 가까워서 인지 과장된 듯 보이는 해피엔딩보다 훨씬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타일>은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엉망으로 보이기도 하는 내 삶도 괜찮을 수 있음을. 삶은 원래 그런 것임을 보여 주는 소설이었다. 김금희 작가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를 인상 깊게 읽었던 이에게, 지금의 계절에 맞는 소설을 찾는 이에게,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찾는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글은 출판사(창비)로부터 도서만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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