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불편함은 점차 안도와 다정함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저자인 잉그리드 클레이튼은 이 반응이 저의 결함이나 고쳐야 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 신경계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어였다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제 자신을 호구라고 자책하며 짓눌렀던 무거운 수치심을 걷어내 주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멈추지 않는 롤러코스터 중간에 매달려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진짜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저를 지우며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순응 반응에서 나타나는 거짓말에 대한 서술을 읽을 때는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혹은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조각내어 감추었던 행위들이 도덕적인 부정직함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딘가에 안전하게 보관하려 했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는 해석은 저에게 큰 구원이 되었습니다. 타인의 궤도를 돌며 그들의 빛에만 의지했던 제가 이제는 제 내면의 질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조차도 치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갈등이 두렵고, 누군가에게 거절을 하는 일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안의 건강한 투쟁 반응을 조금씩 일깨워보려 합니다. 겸손을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삶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하며, 복종도 오만도 아닌 그 어딘가에서 저만의 중심을 되찾는 연습을 시작하려 합니다.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 문턱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이 기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타인을 달래는 것으로는 결코 나의 고통을 달랠 수 없다는 준엄한 진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를 잃으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관계는 세상에 없으며, 나 자신과 먼저 다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회복의 시작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오늘도 습관적인 미안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저는 이 책의 문장들을 떠올리며 잠시 멈춰 섭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봅니다. 지금 너의 마음은 안녕한지, 그리고 네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