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를 떠올리면 흔히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명분론이나 멈춰버린 농경 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인물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역동적인 '경제의 실험장'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은 박제가, 정약용처럼 익숙한 이름들 뒤에 숨겨진 현실적인 경제 분석가이자 정책 브레인으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합니다.
경제(經濟)라는 목적지, 궁리(窮理)라는 통로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는 흔한 경제 역사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문득 표지를 다시 보니 '경제를 궁리한'이라는 문구에서 '궁리'라는 글자만 색이 다르게 빛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자가 의도한 이 작은 변주는 이 책의 정체성을 단번에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단순히 부를 쌓는 법을 말하는 경제 서적이 아닙니다. 경제라는 절박한 과제를 앞에 두고, 조선이라는 국가의 전체적인 운영 방향과 존재 이유를 고민했던 선비들의 사유가 녹아든 깊이 있는 인문학 서적입니다.
설계자 정도전, 인사의 예절 속에 경제의 질서를 담다
특히 1장 정도전 파트를 읽으며 발길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왜 윗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는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그것이 어떻게 조선이라는 국가의 질서와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설계도가 되었는지 따라가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고려 말의 토지 독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쏟아낸 궁리들은 단순한 산술적 배분이 아니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어느 것 하나 그냥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조직과 전략을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화두를 던집니다.
현장에서 길어 올린 비즈니스 철학, 이지함
또한, 괴짜로만 알고 있었던 토정 이지함에게서 발견한 '사업 철학자'로서의 면모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고상하게 앉아 바다를 논하는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몸소 노를 저어 땀 흘리며 밀물과 썰물의 이치를 깨달았고, 그것을 상업의 실질적인 이익으로 연결했습니다. "절박하게 고민한 덕택에 항해와 상업의 달인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현장의 언어를 사유의 언어로 번역해낸 그의 치열함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숫자를 넘어 가치로 향하는 읽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사를 모르거나 경제가 낯선 독자에게도 한없이 친절하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용어의 벽을 세우기보다, 그 시대의 공기와 선비들의 숨소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지폐(저화)를 처음 찍어냈던 조지서 터가 지금의 홍제역 근처라는 소소한 사실부터, 규모의 경제를 미리 내다본 유수원의 냉철한 시선까지. 책은 독자를 서둘게 하지 않으며 문장 사이사이에 사유의 여백을 넉넉히 배치해 두었습니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닙니다. 돈이라는 유동성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를 읽고, 부의 편중이 가져올 사회적 균열을 걱정하며, 노동의 가치가 신분보다 먼저 평가받길 원했던 선비들의 '윤리적 시선'입니다. 그들의 궁리는 시대를 건너와 오늘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설계하는 세상은 어떤 가치를 향해 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시대를 설계했던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오늘을 바라보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경제적 활동들이 예사롭지 않은 '궁리'의 산물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