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모든 소설 중에 '토지'를 최고로 걸작이라 여기기에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특별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박경리 대표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읽게 된 '표류도'는 다시금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필력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표류도'는 연애 소설이라는 표피 안에 넣을 수 없는, 슬프고도 고독한 한 여성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 미망인이 주인공이기에 박경리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주인공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박경리 선생님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도 이 소설이 가진 매력과 중량감은 크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1950년대 사생아를 낳은 전쟁미망인이 헤쳐 나가야 했던 녹록지 않은 삶과 사회적 잣대로 보면 '불륜'이라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가 개연성 있게 그려집니다.
소설 자체의 재미와 감동, 현재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사회적 통념을 넘어 여주인공이 행복한 삶의 선택을 하도록 응원하게 되는데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의지와 진실되면서도 인간적으로 연약한 부분까지 독자로서 이해하게 되어서입니다.
연애 이야기가 이야기의 축을 이루지만 '감정'을 기반으로 한 사랑은 지나고 나면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카운터의 '청동 꽃병'이라는 앞에서의 복선은 작품 후반에서 (스포일 수 있어 구체적인 사건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파국적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주인공은 인간의 슬픔, 괴로움, 비극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함께 하는 낮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소설 마지막 열장도 남기지 않은 부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남아 있었습니다. 삶을 부정하기도 감당하기도 어려운 불행.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소설 <토지>와 박경리 선생님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표류도>의 주인공 '이상현'은 글을 쓴다는 점이나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순수한 면에서 소설 <토지> 최서희가 사랑했던 '이상현'이 떠올랐습니다. 소설 속 기생 소화가 아편쟁이가 되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부분은 <토지>의 기화(봉선)가, 현회의 여학교 시절 이야기에서는 <토지> 상의의 학교 생활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소설 <토지>의 애독자로서 이 소설의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강현회'는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지만 같은 학생 대학생 신분이었던 남편이 한국 전쟁 중에 죽게 되자 결혼식을 못했기에 졸지에 사생아를 둔 엄마가 됩니다. 당시의 사회적 시선으로는 용인될 수 없었기에 학교 교직에서 쫓겨납니다. 생계를 위해 다방 마담으로 지내며 밤에는 번역을 하며 살아갑니다. 신문사 논설위원이자 좋은 집안 출신인 가정이 있는 '상현'과 사랑에 빠지는 '현회'
한국전쟁이후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리대금과 부동산으로 부를 이루는 동창 부류는 가난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현회'를 도덕과 규범으로 비난합니다. '현회'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욕망, 현실적 제약과 처지 앞에서 갈등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녀의 삶에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듯 소설 속 배경과 사건은 정교하고 인물의 감정선은 섬세하고 생생합니다.
주인공 '현회'는 홀로된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 유복자 딸, 그리고 종업원인 광희를 돌보지만 광희의 경우 남자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걷다 불행하게 죽습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상현'과 '김환규' 두 인물은 연인감, 남편감의 전형을 보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이 치사스럽고 징그럽기만 한' 현회에게 환규가 하는 말 속에서 이 소설에 작가님이 담아둔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나 다 몇만 년을 살지 못합니다. 속된 말이지만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죽어갈 수밖에 없지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각 떨어져서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들입니다. ..."
"산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확실한 기간 동안 자기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강한 에너지가 될 수 있거든요."
",,,상현이는 감정의 대상이요. 찬수(죽은 남편)는 지성이 대상이요. 환규는 의지의 대상입니다. 의지는 인간의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의지의 세계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애정이나 일이나 죽음까지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변의 죽음보다 자기 자신의 일이 더 절실한 문제입니다. 일은 산다는 뜻이요. 사람은 움직이는 섬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표류도.
사람은 누구나 홀로 각각 떠내려가는 외로운 섬 같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각자 '의지'의 세계로 저마다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고, 인연이 되면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혹은 조금 떨어진 거리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에는 혼자 물속으로 잠겨야 하는 때를 맞이하게 되는 존재.
직접적인 설교가 아닌 이야기의 힘을 빌려 사랑과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 책, <표류도>였습니다.
아직 제가 읽지 않은 박경리 선생님의 다른 책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가슴 설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