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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김정아 지음 / 샘터사 / 2026년 5월
평점 :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었습니다)
십 대 시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습니다. 퇴직 후에 여유가 생기면 세계 문학 고전들을 찾아 읽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김정아 번역가의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를 읽고는 그의 작품을 꼭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이왕이면 김정아 번역가의 번역본으로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작품 해설자로 김정아 번역가만한 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매일 새벽 2,3시에 일어나 네다섯 시간을 밀도 있게 번역에 바친 10년의 세월, 그 시간의 기록과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 해설을 담은 에세이를 읽은 후의 마음입니다.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김정아, 샘터)'
번역가로서 보낸 피땀의 시간들이 눈물과 감동으로, 웃음과 통찰, 성장의 기록들이 번역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도스토옙스키 작가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함께 생생한 감동을 주며 길을 열어 줍니다.
"선생님의 글에서는 번역자의 뇌와 도스토옙스키의 뇌가, 영혼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 사장님이 김정아 번역가에 한 말입니다.
도스토옙스키를 인생의 나침반이자 스승이라 부르며 살아온 저자는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완역을 의뢰하는 출판사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밤 8시 반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는 새벽 생활 꼬박 10년을 바쳐 네 장편 완역을 수행하는데, 몸은 허리, 목, 다리, 손목, 손가락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종합병원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저자는 이런 번역 노동에 대해 '제의(祭儀)', '문학의 신을 추앙한 끝에 종국엔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잘 읽히는 좋은 번역을 위해 고투한 번역가로서의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도스토옙스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과 존경, 그를 인생의 스승으로 나침판으로 여기는 번역가의 모습에 독자로서 함께 동화되어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고 매일 눈이 붓도록 펑펑 우는 모습에, 책상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공황장애 증상에, 소설 속 비속어 번역을 위해 <헬머니> 영화를 보는 모습 등 번역가로서의 삶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나는 이 장면을 번역하는 내내, 단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심장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문장이 아니라 통곡이었다.
번역은 문장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어떤 영혼의 마지막 진동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것을.
저자는 말합니다. 범인(凡人)들이 고통을 외면할 때, 도스토옙스키는 그 참혹한 심연을 피하지 않았다고요.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 직전 5분을 경험한 사람, 시베리아 유형을 살고, 간질과 도박과 가난과 자식의 죽음을 견뎌 낸 사람, 도스토옙스키, 그는 쓰러지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삶을 향한 찬가를 끌어올린 사람입니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인생과 작품이 말하는 것을 듣고 독자에게 울림 있게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고.'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고통을 통과한 사람, 도스토옙스키가 내놓은 결론. 무겁고 그래서 믿을 수 있다고요.
도스토옙스키가 내놓은 결론에, 10년의 시간을 도스토옙스키와 '영혼의 합선'같은 경험으로 그가 써놓은 글을 번역했던 저자의 결론에 깊이 공명하게 됩니다.
'죄와 벌'은 초록, '백치'는 흰색, '악령'은 검붉은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검정색 상징으로 번역책의 표지 색을 갖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 내면의 흐름과 사유의 발달,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적인 격랑의 결을 그대로 번역의 순서를 따랐기에 독서도 이와 같은 순서로 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위대한 문호의 빛을 따라 그와 함께 한 번역가의 여정은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자 삶과 문학에 대한 깊은 울림과 통찰이 함께하는 길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문학이 남겨 놓은 철학적 질문과 인간에 대한 연민, 삶을 놓지 않는 힘.
10년의 세월동안 그의 문장에 자주 멈춰서고 감동을 느꼈던 저자의 모습처럼 저도 그의 문학, 그 장엄하고도 위대한 예술을 끝까지 읽고 조금 더 겸허해지고 조금 더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