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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시 묻는다 ㅣ 인문학 공동연구 총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6월
평점 :
아직 대학생이었던 2018년,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기 Y가 넋두리를 해 왔다. Y가 일하는 매장에 곧 키오스크가 설치될 예정인데, 주문 절차가 자동화되니 사람이 예전만큼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조만간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은 글로든 말로든 많이 접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생각 이상으로 아직 낯설기만 하다. 올해 방문했던 속초의 유명 횟집에서는 로봇이 테이블을 인식해서 서빙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일행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고 불평했지만, 로봇이 가져다 주는 음식이라고 해서 딱히 사람이 가져다 주는 음식과 맛이 다르지 않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기술 비관론에 의해 인간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실제로 기계가 인간의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을 지켜본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그리고 시시각각 발전해 가는 기술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거듭 자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특별한 과제다. 서울대학교출판부의 신간 『인간을 다시 묻는다』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진 14인이 '인간'을 주제로 학술대회에 발표한 글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다시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각각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영혼과 의식, 인간의 욕망과 좌절, 인간의 본성과 자격이라는 대주제를 이룬다. 각 장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에 다가가려는 작은 실마리를 하나씩 쥐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 ― 「인공지능과 인간: '두 문화'의 공존을 위하여」
이 책의 첫머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수학자 캐시 오닐은 인간의 편견을 코드화한 알고리듬을 '수학살상무기'로 개념화했다. 알고리듬은 인간의 특성인 주관성을 배제하므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알고리듬을 설계하는 인간의 의도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인간이 알고리듬을 설계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스스로 기계학습을 하도록 데이터를 제공하더라도 이러한 편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데이터 집합에서 특정한 정보가 빠진 경우, 그리고 훈련 재료가 되는 데이터 자체가 편견을 반영하는 경우에 그렇다.따라서 저자는 인공지능 또한 인간의 윤리적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과, 인공지능 개발자들과 사용자들이 올바른 윤리 의식을 함양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을 읽는 도중, 201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의 <불온한 데이터> 전을 관람하면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이 떠올랐다. 자크 블라스의 <얼굴 무기화 세트>(2011-2014)다. <얼굴 무기화 세트>는 이 글에서 논의하는 인공지능의 편향성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씹다 뱉은 풍선껌 덩어리처럼 생긴 가면이 등장한다. 가면은 그 가면을 쓴 사람이 안면인식 기술로 탐지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게끔 하여, 저항적 상징물의 기능을 수행한다. 블라스는 동성애자의 안면인식 데이터를 수집하여 성적 지향을 파악하는 연구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인식 기술이 피부 색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데이터 알고리듬의 불평등을 지적하고자 한다. 과연 데이터는 그 자체로도 완전히 공정하다고 할 수 없으며, 데이터 활용의 측면에서도 불평등을 확산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가장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윤리의 영역이 중요해진다는 사실은, 기계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그림 한 폭을 그려내는 것 같다.
곧이어, 저자는 인공지능에 대한 모순된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공지능 사용자들은 인간이 가지는 사회적인 본성 탓에 인공지능을 인격체로 여기게 되는데, 인공지능에게 일종의 주체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관점은 인공지능을 완전히 객관적인 행위자로 보는 관점과 충돌한다. 저자는 논의를 이어나가면서, 인공지능을 인간의 경쟁 상대로 상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적 부문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지점에 주목한다. 알고리듬으로 인간의 예술적 활동을 보조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된 것이 그 사례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적수가 아닌, 인간 능력의 한계를 확장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예술적 협업을 기대하는 동시에 그러한 예술의 저자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오픈에이아이' 사의 알고리듬 모델은 사용자가 짤막한 글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글을 완성시켜 주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해당 알고리듬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하여 투고한다면, 그 글은 과연 저자가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이 창조한 예술작품은 오롯이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작품보다 얼마나 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마주하면서, 언젠가는 예술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통념마저도 부정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1) 저자는 2016년 개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챗봇 '테이'를 예시로 든다. '테이'는 기계학습 알고리듬을 통해 인간 사용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일부 악의적인 사용자들이 각종 혐오가 포함된 말을 가르치는 바람에 '테이'는 그러한 혐오적 표현을 그대로 활용하게 되었고, 챗봇 계정은 곧 폐쇄되었다.
인간의 욕망과 좌절 ― 「부귀의 지향과 억압: 중세의 청빈에서 근대의 부로」
이 글에서 저자는 부가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근대 이후의 시대상과 가난이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과거의 시대상을 대조한다. 고대와 중세의 종교는 대체로 빈(貧)을 이상적인 가치로 다루는 동시에 부를 경계했으며, 부자가 죄를 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선을 행해야 한다고 일렀다. 여기서 저자는 '빈곤의 찬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종교적 이상에서와 달리 실생활에서 빈자는 경멸의 대상이었고, 빈곤은 불가항력적 원인에 근거해서만 정당화되었다. 노동이 불가능한 '정직한' 빈자들은 죄를 씻으려는 부자들의 자선으로 물질적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들은 구원으로 열리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는 여전히 죄를 씻기 어려웠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고리대금업을 가장 악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 주어 채무자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하는 일은 신에게만 속한 것, 즉 시간을 파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은행업의 정당화는 필요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리대금업을 정당화할 여러 조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가난을 긍정하고 부를 정당화해야 했던 역사적 흐름이 뒤집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를테면 17세기 네덜란드의 빈민은 범죄자와 더불어 통제 하에 노역을 하는 기관에 속했으며, 특히 근대 이후로 부는 가난보다 더욱 긍정적인 가치가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전환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여전히 부의 추구에 대한 죄악감이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른바 '타락한' 빈곤은 어느 시대에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중세 시대에도 몸이 불편한 이나 자발적으로 빈곤을 선택한 이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빈자들은 경멸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니 가난에 대한 경멸은 어느 시대에든 똑같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경멸은 게으름에 대한 경계와 동위에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나태해지지 않고 생산적으로 노동하여 결실을 맺으라는 메세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태함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노동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빈자들만이 구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 더 나아가 나태함에 대한 경멸은 인간의 '금기'를 이루는 가치일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생산적 존재로 살아가려면 인간의 충동을 억제할 이성적 금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부에 대한 경멸 또한 재화의 독점을 막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금기일 것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답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금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다움을 설명하는 말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만큼 인간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라는 시대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주 근본적인 노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인간을 다시 묻는다』는 열네 가지의 다양한 관점과 해명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발걸음을 보여 준다. 나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이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에 금세 푹 빠져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