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다시 묻는다 인문학 공동연구 총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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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대학생이었던 2018년,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기 Y가 넋두리를 해 왔다. Y가 일하는 매장에 곧 키오스크가 설치될 예정인데, 주문 절차가 자동화되니 사람이 예전만큼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조만간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은 글로든 말로든 많이 접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생각 이상으로 아직 낯설기만 하다. 올해 방문했던 속초의 유명 횟집에서는 로봇이 테이블을 인식해서 서빙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일행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고 불평했지만, 로봇이 가져다 주는 음식이라고 해서 딱히 사람이 가져다 주는 음식과 맛이 다르지 않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기술 비관론에 의해 인간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실제로 기계가 인간의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을 지켜본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그리고 시시각각 발전해 가는 기술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거듭 자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특별한 과제다. 서울대학교출판부의 신간 『인간을 다시 묻는다』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진 14인이 '인간'을 주제로 학술대회에 발표한 글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다시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각각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영혼과 의식, 인간의 욕망과 좌절, 인간의 본성과 자격이라는 대주제를 이룬다. 각 장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큰 물음에 다가가려는 작은 실마리를 하나씩 쥐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 ― 「인공지능과 인간: '두 문화'의 공존을 위하여」

이 책의 첫머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수학자 캐시 오닐은 인간의 편견을 코드화한 알고리듬을 '수학살상무기'로 개념화했다. 알고리듬은 인간의 특성인 주관성을 배제하므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알고리듬을 설계하는 인간의 의도와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인간이 알고리듬을 설계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스스로 기계학습을 하도록 데이터를 제공하더라도 이러한 편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데이터 집합에서 특정한 정보가 빠진 경우, 그리고 훈련 재료가 되는 데이터 자체가 편견을 반영하는 경우에 그렇다.따라서 저자는 인공지능 또한 인간의 윤리적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과, 인공지능 개발자들과 사용자들이 올바른 윤리 의식을 함양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을 읽는 도중, 201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의 <불온한 데이터> 전을 관람하면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이 떠올랐다. 자크 블라스의 <얼굴 무기화 세트>(2011-2014)다. <얼굴 무기화 세트>는 이 글에서 논의하는 인공지능의 편향성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씹다 뱉은 풍선껌 덩어리처럼 생긴 가면이 등장한다. 가면은 그 가면을 쓴 사람이 안면인식 기술로 탐지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게끔 하여, 저항적 상징물의 기능을 수행한다. 블라스는 동성애자의 안면인식 데이터를 수집하여 성적 지향을 파악하는 연구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인식 기술이 피부 색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데이터 알고리듬의 불평등을 지적하고자 한다. 과연 데이터는 그 자체로도 완전히 공정하다고 할 수 없으며, 데이터 활용의 측면에서도 불평등을 확산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가장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공지능에서도 윤리의 영역이 중요해진다는 사실은, 기계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그림 한 폭을 그려내는 것 같다.

곧이어, 저자는 인공지능에 대한 모순된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공지능 사용자들은 인간이 가지는 사회적인 본성 탓에 인공지능을 인격체로 여기게 되는데, 인공지능에게 일종의 주체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관점은 인공지능을 완전히 객관적인 행위자로 보는 관점과 충돌한다. 저자는 논의를 이어나가면서, 인공지능을 인간의 경쟁 상대로 상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적 부문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지점에 주목한다. 알고리듬으로 인간의 예술적 활동을 보조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된 것이 그 사례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적수가 아닌, 인간 능력의 한계를 확장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예술적 협업을 기대하는 동시에 그러한 예술의 저자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오픈에이아이' 사의 알고리듬 모델은 사용자가 짤막한 글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글을 완성시켜 주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해당 알고리듬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하여 투고한다면, 그 글은 과연 저자가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이 창조한 예술작품은 오롯이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작품보다 얼마나 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마주하면서, 언젠가는 예술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통념마저도 부정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1) 저자는 2016년 개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챗봇 '테이'를 예시로 든다. '테이'는 기계학습 알고리듬을 통해 인간 사용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일부 악의적인 사용자들이 각종 혐오가 포함된 말을 가르치는 바람에 '테이'는 그러한 혐오적 표현을 그대로 활용하게 되었고, 챗봇 계정은 곧 폐쇄되었다.

인간의 욕망과 좌절 ― 「부귀의 지향과 억압: 중세의 청빈에서 근대의 부로」

이 글에서 저자는 부가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근대 이후의 시대상과 가난이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과거의 시대상을 대조한다. 고대와 중세의 종교는 대체로 빈(貧)을 이상적인 가치로 다루는 동시에 부를 경계했으며, 부자가 죄를 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선을 행해야 한다고 일렀다. 여기서 저자는 '빈곤의 찬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종교적 이상에서와 달리 실생활에서 빈자는 경멸의 대상이었고, 빈곤은 불가항력적 원인에 근거해서만 정당화되었다. 노동이 불가능한 '정직한' 빈자들은 죄를 씻으려는 부자들의 자선으로 물질적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들은 구원으로 열리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는 여전히 죄를 씻기 어려웠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고리대금업을 가장 악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 주어 채무자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하는 일은 신에게만 속한 것, 즉 시간을 파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은행업의 정당화는 필요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리대금업을 정당화할 여러 조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가난을 긍정하고 부를 정당화해야 했던 역사적 흐름이 뒤집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를테면 17세기 네덜란드의 빈민은 범죄자와 더불어 통제 하에 노역을 하는 기관에 속했으며, 특히 근대 이후로 부는 가난보다 더욱 긍정적인 가치가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전환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여전히 부의 추구에 대한 죄악감이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른바 '타락한' 빈곤은 어느 시대에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중세 시대에도 몸이 불편한 이나 자발적으로 빈곤을 선택한 이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빈자들은 경멸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니 가난에 대한 경멸은 어느 시대에든 똑같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경멸은 게으름에 대한 경계와 동위에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나태해지지 않고 생산적으로 노동하여 결실을 맺으라는 메세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태함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노동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빈자들만이 구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 더 나아가 나태함에 대한 경멸은 인간의 '금기'를 이루는 가치일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생산적 존재로 살아가려면 인간의 충동을 억제할 이성적 금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부에 대한 경멸 또한 재화의 독점을 막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금기일 것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답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금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다움을 설명하는 말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만큼 인간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라는 시대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아주 근본적인 노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인간을 다시 묻는다』는 열네 가지의 다양한 관점과 해명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발걸음을 보여 준다. 나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이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에 금세 푹 빠져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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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 - 영국정부와 예술 정책
김정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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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 죽어도 화가는 안 될 거예요." 미술을 시작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했던 다짐이다.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경제적 효율'을 배우기보다는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경제적 효율과 철학적 의미는 현실적 차원에서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치이며, 먹고 살 수 없다면 예술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화가들이 공장식 화실에서 주문을 받거나, 메디치 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거나, 가족의 사적 보조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 주로 민간 기업이나 재단이 후원자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점만 빼고, 현대에도 이러한 양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업과 미술관의 유착 관계는 과연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이 정말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예술의 상품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는 역사적 시간선을 따라 영국 정부의 예술 정책을 검토하는 연구서이다. 저자는 현대에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미술의 상품화의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며, 미술관과 박물관이 상업화되는 현상이 영국에서 가장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꼽는 핵심 키워드는 '대처 정부의 예술 정책'이다.

이 책은 크게 대처 정부 이전과 이후의 영국 예술 정책과 그 파급력을 돌아보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공공 부문에서 예술을 지원하는 정책이 국민의 문명화와 교양 함양이라는 교육적 목적으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8세기에 대영박물관이 개관한 이래로 영국의 공공 박물관들은 수집가 개인의 소장품들을 구매하여 설립되었으며, 19세기에 테이트 갤러리가 개관했을 때까지도 영국 정부의 지원은 마찬가지로 소극적이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 제도 또한 예술 분야의 예산을 줄이려는 정부 탓에 난항을 겪었다. 연구자들은 이 까닭을 검소한 청교도 전통과, 예술 분야의 성장이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믿음에서 찾으려 했다.

예술 기관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은 꾸준히 형성되었으며, 그들 측의 주장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영국의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지원이 적으며 세금 혜택도 적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2차대전 이후 정부는 영국예술회의(ACGB)를 설립하여 예술을 지원하고자 했고, 대처 정부는 예술 기관들이 민간의 보조를 더 용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세제를 개혁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대처 정부의 예술 정책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한다. 그만큼 저자는 이 시기의 정책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대처 정부는 정부 예산의 지출을 전반적으로 삭감하고자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문화예술 기관은 민간 부문에 매각되지는 않았으나, 민간 자본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업문화에 편승했다. "대처리즘은 "자유 경제와 강한 국가"라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윤리로의 회귀를 의미했고, 사치 가의 광고 방식은, 앞서 소개한 1979년 총선을 위한 포스터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대처의 철학이 구체화되는 것을 촉진했다." (문, 236) 민간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대처 정부는 기업 스폰서십 계획을 도입했다. 이는 기업이 예술 기관의 스폰서가 되고 현금으로 보상을 받는 제도다.

기업이 예술 기관을 후원하는 이유는 첫째로 문화와 친근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고, 둘째로 광고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게다가 미술 스폰서십을 통해 기업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금전적 이익도 얻게 된다. 저자는 기업이 미술을 통해 적극적으로 광고 효과를 얻은 사례로 영국의 앱설루트 보드카를 든다. 이 회사는 무려 800여 명이 넘는 미술가들에게 앱설루트 보드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했다. 결과적으로 미술가와 미술관, 기업의 자본은 한 데 뭉쳐 앱설루트 보드카가 "일종의 글로벌 미술관"이 되었다는 광고를 현실화했다.

이러한 대처리즘 퍼포먼스의 영향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미술 컬렉터 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찰스 사치, 그리고 영국 현대미술의 급부상을 가져온 yBa에 얽힌 이야기 등 대처리즘 정책의 다양한 아웃풋들에 주목한다. "21세기 대영박물관의 '위대한 궁전' 또는 '거대한 안뜰'로 직역해 볼 수 있는 그레이트 코트의 '유리 하늘' 아래서는 "접근, 우수함, 교육,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DCMS의 이념에 따라 18세기 중엽 이후 영국이 예술을 통해서 강조한 국가의 명예, 국민의 문명화, 문화주의와 기업문화정신이라는 상이한 이상들이 "돈을 위한 가치"라는 우산 아래에서 마찰 없이 공존하게 됐다." (문, 456) 저자가 그리는 윤곽을 쫓아가면서, 우리는 처음의 그 의문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은 정말 존재할 수 있는가? 예술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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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명작의 이해
이재원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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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졸업학년이던 내가 교정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봄날이었다. 선생님께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두고 논의할 시간을 주셨던 것이 떠오른다. 당시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누구보다 예술을 좋아하는 예술학도들이었는데도 그 질문에 상당히 비관적인 태도로 임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박물관과 미술관, 음악회당, 도서관에 꾸준히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이 삶의 실제적인 조건을 바꾸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근대 유럽의 이상주의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다. 근대 유럽의 몇몇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서게는 예술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가 유독 두드러진다. 이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대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예술적 실천에 옮기려 한 작가들도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연극을 통해 관객을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예술 수용자로 거듭나게 만들고자 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기존의 연극에 서술자의 존재를 도입하여, 관객이 무대와 객석 간의 긴장을 인지하고 연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생소화 효과(또는 소격 효과)'다.

이 책의 저자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을 해설한 장에서, 『사천의 선인』이 생소화 효과를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극의 형태인 비유극이라고 설명한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우화의 특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우화는 본질적인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하며 추상 속에서도 구체적이다"라고 하면서, 서사극 역시 구체적인 사건의 묘사를 하되, 그 속에서 사회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독, 238)

"신들이여!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게 그렇게 비싼데 어떻게 착할 수가 있습니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에서, 주인공 셴테가 착하게 살기를 당부하는 신들에게 남긴 말이다. 셴테는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선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지만, 신들은 그런 것이 '착한 여인의 의심'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약간의 돈을 주고 셴테를 떠난다. '선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셴테는 욕심 많은 이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주는 한편으로, 냉철한 사촌형제인 슈이타를 가장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셴테는 선하기에 살아갈 수 없고, 슈이타는 선하지 않기에 살아갈 수 있다. 셴테의 인격이 분열되는 것은 신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저자는 『사천의 선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우화라고 해설한다. 브레히트는 교훈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대신, 관객이 비판적 거리를 두고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서사극의 구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

"셴테는 마지막에 신들 앞에서 "선하고 그러면서도 살아가라는 지난날 당신들의 명령은 번개처럼 나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지요"라고 항변한다. 이렇게 두 인물로 분열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소외 현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 234)

자본주의적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을 받지만, 우리가 배운 가치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헤매게 된다. 사랑도, 자유도, 덕도, 자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브레히트는 등장인물인 셴테를 통해 예리한 시선으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바로 그 봄날의 강의실에서, 우리 학생들은 모두 예술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음악회당을 방문하고 미술관을 관람해도, 그런 경험이 이른바 '밥을 먹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긍정적인 지점도 분명 있었다. 적어도 예술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상과 다른 경험을 통해 내가 삶의 의미와 사회의 가치를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면, 예술은 간접적으로나마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셴테에 공감하고 셴테의 삶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올바른 가치가 어떤 것이고 우리가 이러한 부조리함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자연히 고민하게 된다.

『독일 명작의 이해』는 이처럼 독일 문학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해설과 함께 작품과 작가의 배경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무 편의 문학 작품은 국내외에 잘 알려진, 독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 보아야 할 명작들이다. 책의 저자들은 한 편 한 편의 해설에 <작품 이해를 위해 생각해 볼 문제들>을 달아 놓았다. 독자들은 풍부한 배경지식을 통해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를 가지고, 다양한 질문들에 스스로 답하는 경험을 거쳐 사고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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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미디어와 아시아 정체성 - 혼종성과 저항성의 경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9
윤선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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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COVID-19 바이러스가 발견되어 전세계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2월에, 나는 독일을 여행하고 있었다. 당시는 중국을 중심으로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을 때였고, 유럽 국가들에는 발병 사례가 거의 없었다. 우리 일행은 베를린행 직항 노선이 운항되지 않기 때문에 핀란드를 한 차례 경유하는 핀에어 항공기를 이용해야 했다. 경유 비행편에 탑승하려고 셔틀버스에 올라탄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버스 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우리 일행을 둘러싸고 원이 그려졌다. 그 원이란 사실상 암묵적인 접근 금지선이었다. 다들 우리를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사람이 북적여 여유공간이 별로 없었는데도 아무도 우리 일행 근처에 오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버스를 쾌적하게 탈 수 있었지만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었는데, 그 버스에 올라탄 후에 나는 '아시아인'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꾸준히 나에게 질문을 던져 왔다. 아시아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그리고 글로벌 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포지셔닝되는가? 해외에서 살아가려면 나의 고유한 정체성을 어디까지 지키고, 어디까지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 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이번에는 『글로벌 미디어와 아시아 정체성』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은 기존의 아시아 연구로 아시아적 정체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그 대안으로 수용론적 관점에서 해외 한류문화 수용자들의 사례를 분석하여, 아시아적 정체성의 실마리를 모색하고자 한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자국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비판적 관점을 가진 해외 수용자들이 한류에서 그 대안을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적 정체성 논의의 어려움은 크게 네 가지의 근거에 기초한다. 첫째는 아시아 지역을 공동체로 묶어 주는 구심점이 약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시아에도 경제 협력을 위한 기구가 존재하나, 견고하고 지속적인 조직적 실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이질적이어서 지리적 인접성 외에는 공유하는 요소가 많지 않다. 둘째는 문화적 차원에서도 구심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유교나 불교 문화로 아시아 정체성을 일원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저자의 관점에서 이들 종교는 민생의 기반이 되기보다 권력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민중적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셋째는 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초기의 움직임이 제국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기 일본에서 시작된 아시아주의 운동은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의미를 가졌으나, 제국주의 정당화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치명적 한계를 가진다. 넷째는 모든 아시아 국가가 서구화를 거쳤기 때문에, 아시아를 논의할 때에도 서구중심적 관점에 기반하는 혼종적 시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시아적 정체성을 저항성과 혼종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또한 벽에 부딪힌다. 우선 저항성은 아시아가 공유하는 제국주의 역사의 경험을 관통하는 요소로, 서구에 대항하고자 하는 저항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첫째로 저항성에 기반한 문화적 시도들이 실제로는 서구의 모방으로 귀결된다는 점, 둘째로 아시아 내부에서 문화의 흐름이 가지는 역동성을 저항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셋째로 저항성이 문화 수용자들의 일상적 영역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저항성 논의의 한계를 검토한다.

저항성의 대안으로 제시된 혼종성 또한 한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혼종성 개념이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의 위계적인 융합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의 주체성 상실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뿐만 아니라 혼종성은 첫째로 아시아 내부의 갈등과 경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고, 둘째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마블 히어로 시리즈 중에서는 최초로 흑인 영웅을 주연으로 한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을 때, 시대적 배경이 현대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토착 문화를 적극적으로 살린 연출에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블랙팬서>의 강렬한 전통의상과 음악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내내 머리에 맴돌며 의구심을 품게 했다. 서구에서 비슷한 영화가 아시아인을 주연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배경에 이른바 '정통 오리엔트적인' 연출이 짙다면 그 영화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블랙팬서>에서 이러한 전통색을 적극적으로 살린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나를 가장 납득시켰던 설명은 흑인과 아시아인의 역사적 배경이 상이하다는 것이었다. 아시아인에게는 서구의 시선에서 오리엔트로 대상화되는 역사가 있었으나, 아프리카계 흑인에게는 자신의 뿌리를, 그리고 정체성을 부정당한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블랙팬서>에서는 주인공이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충실히 답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어째서 <블랙팬서>가 그런 연출을 채택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혼종성 담론의 유래를 지적하는 저자의 시선은 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반드시 전통과 뿌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전혀 다른 역사적, 인종적 맥락에서 제기된 주장으로 아시아를 해명하기에는 난점이 있다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정체성을 구제하는 다른 방도는 무엇일까? 저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싶은 것일까?

저자는 아시아적 정체성의 연결고리를 대중문화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현 미디어 대중문화는 서구 문화를 흡수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아시아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 현장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서구 문화의 수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류 드라마 수용자들은 자국민들이 잃어버린 가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을 한류 드라마 해석에 투영하고 있으며, 일본에 거주하는 걸그룹 팬들은 여성적 저항성의 상징인 '긴 다리'라는 코드를 한국 걸그룹 문화에서 읽어내고 있다. 이런 면모를 보면 해외에서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은 공통적으로 대안적 사회와 문화를 향한 욕망에 기반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이나 동유럽의 한류 문화 수용자들은 자국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그 대안을 한류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를 읽다 보면 '대안적 삶을 향한 욕망'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나 또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대안을 찾으며 타국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스스로가 위치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과 싫증으로, 무엇이든 '내가 아닌' 것, '나의 현실이 아닌 것'을 찾아 우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면에서 욕망이라는 키워드는 현대 인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숙명으로 얽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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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문명지평 6
김헌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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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4년 전 서울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들은 강연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5년, 영국의 세계적인 미술가 마크 퀸(Marc Quinn)은 트라팔가 광장에 <임신한 앨리슨 래퍼>라는 제목의 조각 작품을 전시한다. 작품의 모델인 앨리슨 래퍼는 선천적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두 팔이 없는 래퍼의 몸은 이른바 '일반적인' 미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적 조화가 빼어나다고 인정받는 '밀로의 비너스' 또한 두 팔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이 작품에 사용된 대리석은 고전적으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의 기념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재료다. 높이 솟은 기둥에 올라앉은 앨리슨 래퍼의 모습과 그의 역동하는 생명력은 자신이 '새로운 비너스'라는 주장을 세상에 선포하는 듯하다.

15세기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매체가 등장한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 신화의 다양한 변용과 재해석을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고전을 향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 누구나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고전에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학적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 가치를 충분히 발굴해낼 수 있을까?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 담긴 고대인들의 상상력에 주목하여, 이를 읽기 쉽게 풀어내는 해설서다. 저자는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를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처럼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같은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을 분석한다. 하나하나의 장은 강의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그에 알맞게 친근감 있는 문체와 읽기 쉬운 문장들이 글의 재미를 더해 준다.

이 책이 다루는 독특한 통찰을 한 가지 들여다 보자. 호메로스의『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헥토르가 고국에 인도되고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장대한 트로이아 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그 마무리는 지나치게 소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호메로스는 그 이후로 트로이아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으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기리는 축제도, 전쟁의 종막을 알리는 선언도 없으며, 오직 헥토르의 죽음만이 기나긴 여운을 줄 뿐이다.

저자는 아킬레우스의 적수로서 그 못지않게 눈부신 영웅이었던 헥토르의 덧없는 죽음이 모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이 서사시에는 분노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아니 인간의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울림이 있다. 전쟁의 치열함도, 전쟁 속의 화려한 무공과 찬란한 명예도, 그것이 인간의 것인 한, 결국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스, 145)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끝맺음에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한 마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낱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오디세우스의 행보에도 의문을 던진다. 영웅 오디세우스는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세상을 떠돌던 중 오귀기아 섬에서 여신 칼륍소를 만난다. 칼륍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아무 걱정 없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그 섬에서 자신과 머물 것을 제안한다. 특이한 점은 이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칼륍소의 제안을 거절한다. 저자는 호메로스가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에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필멸자들에게 잊히는 대신, 필멸자들의 땅으로 돌아가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무거운 주제이면서, 언제나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엿보이는 '죽음'에 대한 상상력은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사유를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오디세우스의 일화들 중에서는 특히 '아무도 안'인 일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타카로 향하는 여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이 사는 섬에 당도하게 되는데,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잡아먹는 거인 폴리메포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을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한다. 폴리메포스가 오디세우스의 꾀에 넘어가 눈을 잃자, 거인의 동족들이 달려와 그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묻는다. 그러나 폴리메포스가 할 수 있는 답은 "'아무도 안'이 그랬다"는 것뿐이다. '아무도 안'은 영어로는 'Nobody'에 해당하는 단어다. 이를 '아무도 아닌 자' 대신, 우리말에 매끄럽게 녹아들도록 '아무도 안'이라고 옮기는 지혜가 신선하다.

저자의 해설을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이 일화에서 발휘한 상상력에 어떤 통찰이 숨어 있었을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름'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는데, 오디세우스의 이 매혹적인 일화는 이름 혹은 제목을 다루는 논의에서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존재가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조건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에게는 개별적이고 고유적인 언어적 명칭이 부여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셀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름이 없는 사람은 '셀 수' 없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없고, 어떤 사회 질서에도 포섭되지 않고, 어떤 가치도 매겨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소거된 오디세우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며, 그 틈으로 오디세우스는 탈출에 성공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신화 속의 '영웅'이라는 점이다. 영웅은 언제나 독특하고 특출한 개인으로서 존재 가치를 얻는데, 영웅을 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이름이다.

이 책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독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사고력에 감탄할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그러한 감탄의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길을 열기를 바라는 듯하다. 고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 가치를 충분히 발굴해낼 수 있을까? 앞선 질문에 대한 답 또한,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따라가는 이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디세우스는 왜 칼륍소를 버리고 이타카로 돌아갔을까? 안티고네는 왜 크레온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형제를 매장해야 했는가? 운명의 손에 놀아나는 오이디푸스에게 과연 진정한 자유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자유인가? 고대 그리스 신화는 그 방대한 세계관만큼이나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져 온다. 그에 답하기 위해 이제는 우리의 상상력이 날개를 펼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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