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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ㅣ 문명지평 6
김헌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4년 전 서울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들은 강연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5년, 영국의 세계적인 미술가 마크 퀸(Marc Quinn)은 트라팔가 광장에 <임신한 앨리슨 래퍼>라는 제목의 조각 작품을 전시한다. 작품의 모델인 앨리슨 래퍼는 선천적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두 팔이 없는 래퍼의 몸은 이른바 '일반적인' 미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적 조화가 빼어나다고 인정받는 '밀로의 비너스' 또한 두 팔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이 작품에 사용된 대리석은 고전적으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의 기념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재료다. 높이 솟은 기둥에 올라앉은 앨리슨 래퍼의 모습과 그의 역동하는 생명력은 자신이 '새로운 비너스'라는 주장을 세상에 선포하는 듯하다.
15세기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매체가 등장한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 신화의 다양한 변용과 재해석을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고전을 향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 누구나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고전에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학적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 가치를 충분히 발굴해낼 수 있을까?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 담긴 고대인들의 상상력에 주목하여, 이를 읽기 쉽게 풀어내는 해설서다. 저자는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를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처럼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같은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을 분석한다. 하나하나의 장은 강의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그에 알맞게 친근감 있는 문체와 읽기 쉬운 문장들이 글의 재미를 더해 준다.
이 책이 다루는 독특한 통찰을 한 가지 들여다 보자. 호메로스의『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헥토르가 고국에 인도되고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장대한 트로이아 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그 마무리는 지나치게 소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호메로스는 그 이후로 트로이아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으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기리는 축제도, 전쟁의 종막을 알리는 선언도 없으며, 오직 헥토르의 죽음만이 기나긴 여운을 줄 뿐이다.
저자는 아킬레우스의 적수로서 그 못지않게 눈부신 영웅이었던 헥토르의 덧없는 죽음이 모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이 서사시에는 분노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아니 인간의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울림이 있다. 전쟁의 치열함도, 전쟁 속의 화려한 무공과 찬란한 명예도, 그것이 인간의 것인 한, 결국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스, 145)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끝맺음에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한 마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낱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오디세우스의 행보에도 의문을 던진다. 영웅 오디세우스는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세상을 떠돌던 중 오귀기아 섬에서 여신 칼륍소를 만난다. 칼륍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아무 걱정 없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그 섬에서 자신과 머물 것을 제안한다. 특이한 점은 이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칼륍소의 제안을 거절한다. 저자는 호메로스가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에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필멸자들에게 잊히는 대신, 필멸자들의 땅으로 돌아가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무거운 주제이면서, 언제나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엿보이는 '죽음'에 대한 상상력은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사유를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오디세우스의 일화들 중에서는 특히 '아무도 안'인 일화가 눈에 들어온다. 이타카로 향하는 여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이 사는 섬에 당도하게 되는데,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잡아먹는 거인 폴리메포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을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한다. 폴리메포스가 오디세우스의 꾀에 넘어가 눈을 잃자, 거인의 동족들이 달려와 그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묻는다. 그러나 폴리메포스가 할 수 있는 답은 "'아무도 안'이 그랬다"는 것뿐이다. '아무도 안'은 영어로는 'Nobody'에 해당하는 단어다. 이를 '아무도 아닌 자' 대신, 우리말에 매끄럽게 녹아들도록 '아무도 안'이라고 옮기는 지혜가 신선하다.
저자의 해설을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이 일화에서 발휘한 상상력에 어떤 통찰이 숨어 있었을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름'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는데, 오디세우스의 이 매혹적인 일화는 이름 혹은 제목을 다루는 논의에서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존재가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조건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에게는 개별적이고 고유적인 언어적 명칭이 부여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셀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름이 없는 사람은 '셀 수' 없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없고, 어떤 사회 질서에도 포섭되지 않고, 어떤 가치도 매겨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소거된 오디세우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며, 그 틈으로 오디세우스는 탈출에 성공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신화 속의 '영웅'이라는 점이다. 영웅은 언제나 독특하고 특출한 개인으로서 존재 가치를 얻는데, 영웅을 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이름이다.
이 책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독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사고력에 감탄할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그러한 감탄의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길을 열기를 바라는 듯하다. 고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 가치를 충분히 발굴해낼 수 있을까? 앞선 질문에 대한 답 또한,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따라가는 이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디세우스는 왜 칼륍소를 버리고 이타카로 돌아갔을까? 안티고네는 왜 크레온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형제를 매장해야 했는가? 운명의 손에 놀아나는 오이디푸스에게 과연 진정한 자유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자유인가? 고대 그리스 신화는 그 방대한 세계관만큼이나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져 온다. 그에 답하기 위해 이제는 우리의 상상력이 날개를 펼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