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명작의 이해
이재원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졸업학년이던 내가 교정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봄날이었다. 선생님께서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두고 논의할 시간을 주셨던 것이 떠오른다. 당시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누구보다 예술을 좋아하는 예술학도들이었는데도 그 질문에 상당히 비관적인 태도로 임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박물관과 미술관, 음악회당, 도서관에 꾸준히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이 삶의 실제적인 조건을 바꾸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근대 유럽의 이상주의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다. 근대 유럽의 몇몇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서게는 예술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가 유독 두드러진다. 이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대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예술적 실천에 옮기려 한 작가들도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연극을 통해 관객을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예술 수용자로 거듭나게 만들고자 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기존의 연극에 서술자의 존재를 도입하여, 관객이 무대와 객석 간의 긴장을 인지하고 연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생소화 효과(또는 소격 효과)'다.

이 책의 저자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을 해설한 장에서, 『사천의 선인』이 생소화 효과를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극의 형태인 비유극이라고 설명한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우화의 특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우화는 본질적인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하며 추상 속에서도 구체적이다"라고 하면서, 서사극 역시 구체적인 사건의 묘사를 하되, 그 속에서 사회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독, 238)

"신들이여!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게 그렇게 비싼데 어떻게 착할 수가 있습니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에서, 주인공 셴테가 착하게 살기를 당부하는 신들에게 남긴 말이다. 셴테는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선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지만, 신들은 그런 것이 '착한 여인의 의심'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약간의 돈을 주고 셴테를 떠난다. '선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셴테는 욕심 많은 이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주는 한편으로, 냉철한 사촌형제인 슈이타를 가장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셴테는 선하기에 살아갈 수 없고, 슈이타는 선하지 않기에 살아갈 수 있다. 셴테의 인격이 분열되는 것은 신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저자는 『사천의 선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우화라고 해설한다. 브레히트는 교훈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대신, 관객이 비판적 거리를 두고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서사극의 구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

"셴테는 마지막에 신들 앞에서 "선하고 그러면서도 살아가라는 지난날 당신들의 명령은 번개처럼 나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지요"라고 항변한다. 이렇게 두 인물로 분열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소외 현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 234)

자본주의적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을 받지만, 우리가 배운 가치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헤매게 된다. 사랑도, 자유도, 덕도, 자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브레히트는 등장인물인 셴테를 통해 예리한 시선으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바로 그 봄날의 강의실에서, 우리 학생들은 모두 예술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음악회당을 방문하고 미술관을 관람해도, 그런 경험이 이른바 '밥을 먹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긍정적인 지점도 분명 있었다. 적어도 예술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상과 다른 경험을 통해 내가 삶의 의미와 사회의 가치를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면, 예술은 간접적으로나마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셴테에 공감하고 셴테의 삶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올바른 가치가 어떤 것이고 우리가 이러한 부조리함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자연히 고민하게 된다.

『독일 명작의 이해』는 이처럼 독일 문학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해설과 함께 작품과 작가의 배경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무 편의 문학 작품은 국내외에 잘 알려진, 독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 보아야 할 명작들이다. 책의 저자들은 한 편 한 편의 해설에 <작품 이해를 위해 생각해 볼 문제들>을 달아 놓았다. 독자들은 풍부한 배경지식을 통해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를 가지고, 다양한 질문들에 스스로 답하는 경험을 거쳐 사고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