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평점 :

즐거운 어른의 유쾌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어찌나 킥킥거렸는지 옆에 있던 남편이 궁금해하기에 읽어주었더니 한참을 같이 낄낄거렸다. 얼마 전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일본책을 읽었는데 그 책의 산문판 느낌이다. 76세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고개 끄덕이게 하는지, 이런 실력을 그간 어떻게 숨기고 사셨을까. 그런데 어르신이라 하면 너무 늙은 것 같으니 작가님이라 해야겠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와 이연실 편집자의 꼬드김에 못이겨 책을 내겠다고 수락했지만 쓰다 보니 자신이 할 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글이 술술 나왔다니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공력을 이번 기회에 십분 발휘하신 것 같다.
출판사에선 새로운 이야기꾼을 발굴해낸 것이겠지만 나처럼 독자 입장에선 이모 같이 편하게 수다 떨 글친구를 만난 느낌이라 반가웠다. 76세임에도 배우고 실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세상에 당당하며 하고 싶은 말에 거리낌이 없다. 분명 다져온 지난 시간의 힘 덕분이겠지만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태도와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였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80을 바라보는 나이라면 신문물에는 관심이 없고 라떼 시리즈만 시전하여 뒷방 늙은이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요양병원 신세를 지거나 집에 있더라도 매일같이 병원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분위기가 좀 우울하다. 내 주위의 어른들이 대부분 이러하기 때문에 이옥선 작가님처럼 활기차고 즐거운 어른은 사실 처음이다.
딸 김하나 작가의 책을 읽어보았고 북토크에서 직접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참 밝고 유쾌했었다. 어머니의 영향이 어찌 없을까. 딸이 엄마의 재능을 알아보고 70대에 작가로 데뷔시키다니 누구나 부러워할 모녀지간이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교사 출신이라서 늘 책과 함께 살았고, 육아일기를 책으로 낼 수 있을 정도의 필력이었으니 김하나 작가도 모친의 능력을 사장시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고하신 남편분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혼자가 되니 더 자유로워졌다고 하신 것처럼 여유롭게 글쓰기에 매진해서 이번 책이 나온 것일 거다. 나도 남편이 없는 지난 주말 이틀 간 리뷰를 다섯 편이나 썼는데, 이번 주에는 한 편도 못쓰고 결국 남편이 자러 들어간 이후에야 이 글을 쓰고 있는 형편이니...
살아오신 인생 굽이굽이를 회상하는 내용에선, ‘아, 왜 나 이 일들 다 알지, 왜 이렇게 비슷한 경험인가...’했다. 비슷한 점 또한 많았다. 요가 수련한지 20년 째(물론 띄엄띄엄 한 적도 있고 머리서기 됐다 안 됐다 하고), 점 보는 거 안 좋아하고, 뭐든 아껴 쓰는 게 체질화 되어 있고, 모르는 게 있으면 책으로 배우고 등등. 이러니 친한 이모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더 깜짝 놀란 건 이 부분에서였다.
“제사 지내지 말고 그날은 시간 나면 좋은 장소에 모여서 맛있는 밥 먹어라.”
내가 우리 애들 중학교 때부터 해오던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랑 이렇게 사고방식이 비슷한 다른 사람과 글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게다가 가까운 부산 해운대에 사시다니~~
나는 목욕탕에 자주 가지 않지만 목욕탕에서 만나고 싶은 어른이다. 바쁘기도 하거니와 목욕탕에 간다 한들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며 옷 벗고 남들과 무람없이 얘기하기에 몹시 껄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님의 목욕탕 찬가를 읽으며 나도 나이 들면 달목욕 끊어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하나 부정적인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여형제가 없다보니 남들과 오래 수다 떠는 걸 못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남 참견하는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작가님 목욕탕 수다는 생생 정보통 역할뿐 아니라 농수산품 공동구매장이며 에너지 충전소였다. 세상 모든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듯 목욕탕 수다에서 즐거울 일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금 언짢은 일쯤이야 유쾌하게 웃어넘기는 것도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게다.
읽은 책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것 중에 내가 읽어본 책도 꽤 있고 모르는 책을 소개받기도 했다. 아래는 키케로가 쓴 <노老 카토 노년론>을 인용한 부분인데 노인이 그저 나이가 많다는 것을 벼슬처럼 구는 게 아니라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기에 용기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육지를 바라보며,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항구에 들어가는구나 생각한다네. 하지만 노년의 마지막 날이 정해진 바가 없는 고로, 의무의 과업을 돌보고 수행하며, 그러면서도 죽음을 가볍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삶을 이어가는 것이 노년의 올바른 삶이네. 그렇게 노년이 청년보다 더 대담하고 용감해지는 것이지.
나는 사십대 때부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고 여겼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연년생 아들 둘을 낳았고, 열심히 키워 스무 살에 각각 독립시켰다. 친구들보다 육아에서 빨리 졸업해서 그런지 아이 키우느라 끙끙대는 이들을 보며 ‘금방 지나간다, 품을 수 있을 때 더 품어줘라.’ 말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더니 웬만한 일들엔 시큰둥해져서 그러려니 했다. 일을 쉰 건 코로나 팬데믹 즈음 3년 정도뿐 성격상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럼에도 무언가 뚜렷하고 번드르르한 결과를 손에 쥐지 못한 열패감이 있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라는 책을 읽었을 땐 아, 난 쫌 힘들겠다 싶었는데, 이옥선 작가님처럼 유쾌하고 건강한 할머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패턴도 비슷하고(달목욕 빼고ㅋ) 사고방식까지 유사하니 말이다. 우겨볼란다. 그럼 나도 칠십대엔 책을 낼 수 있을까나?ㅎㅎ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