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디 얀다르크 -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7월
평점 :

고등학교 때 아버지 자살!
대학교 졸업식날 어머니 자살!
지금,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중인 마흔살 여성이 있다.
그녀 이름은 사이안!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어릴 땐 성과 함께 붙여 읽으면 꽤 예쁜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한 때 LG 휴대폰 이름 싸이언과 비슷한 음가를 가진 특이한 이름이었고 또, 한 때 히트쳤던 드라마 대사, "이 안에 너 있다"를 누구나 읊어댈때도 자주 소환되었다.
그런 사이안이 "구디 얀다르크"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그녀는 국문과를 졸업했는데 IT업체에 취업을 했고 우리나라 IT업계의 산 증인으로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중견 IT기업에 취직해 꽤 건실한 직장생활을 하여 올해의 사원도 되어봤고 오년만에 전세자금 대출을 갚을 정도로 경제적 호사도 누려봤다.
그즈음 업계는 아이폰의 출시로 파란이 예고되었고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각종 앱과 게임들이 춘추전국시대를 열 즈음 게임회사의 개발자로 두번째 직장이 생겼다. 첫직장 상사였던 성과장의 선배가 만든 회사였다. 초반에 개발한 게임으로 일이 잘풀린다 싶었으나 웹하드사업과 게임 운영에 허덕였고 새로운 게임개발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만다.
☞ 여기서 잠깐!
이쪽 업계에 종사한 적이 있고 몇 다리 건너서라도 업계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고개 끄덕이고 무릎 칠 우리나라 IT업계 직원들이 겪는 잔혹사가 펼쳐진다. 작가 자신이 이 분야에서 일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디테일이 장난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것 같다" 라고 표현하는건 내가 아예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인중에 이 업계 종사자는 단 한명도 없고 온라인 게임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고스톱도 쳐 본적이 없다. 그러니 주인공의 직장생활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상사와 원청업체의 갑질, 그리고 남자 상사들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성적 농담과 추근거림들이다. 요즘이라면 당장 조치를 취했을 사내 성추행이 버젓이 일어나고 식당이나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으니... 우리가 언제 그런 시대를 살았었나 싶다.
다시 돌아와서, 그녀는 어쩌다 '구디 얀다르크'가 됐을까?
두번째 직장이 쫄딱 망한 후 취업한 곳은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작은 IT업체였다. 그곳을 시작으로 삼년간 가디와 구디의 여럿 회사를 거치며 생존 투쟁을 벌이다 정신차려보니 노조를 설립하고 있었고 그녀는 '구디 얀다르크'가 되어 있었다. 느낌 오겠지만 구디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약자이고 얀다르크는 잔다르크를 사이안의 이름 에서 변형한 것이다. 평소 이안으로 불리기보다 야니로 더 자주 불렸기에 줄여서 얀이 되었고 잔 대신 얀이 들어간 것이다.
노조설립까지 하게 된 것은 그녀가 그리 강한 의협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잔다르크처럼 전쟁을 이끌고 산화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늘 일이 벌어지는 대로 잘 휩쓸렸고 그 속에서 언제나 일을 차고 해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직딩들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릴 내용들이 그득하다. 우리나라 직딩들의 고달픈 삶이 그녀 인생 전체에 점철되어 있는 것이지 IT업계 종사자라서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직장생활의 애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친구, 연인들의 이야기가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만약 직장이야기만 있었다면 아주 지루했을 것이지만 작가는 영리하게도 샌드위치처럼 여러가지 맛을 느낄수 있게 구성해 두었다.
특히 그녀가 나이를 먹을수록 일에 치여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가는데 애인마저 없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강영민과 오영일이란 남자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소설적 재미는 꽤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꿈만 같던 시절을 선사해준 남자는 강영민. 퇴로 없는 막다른 길에서 부모처럼 자살을 선택할 일만 남았다고 여기는 그녀에게 한줌 희망의 빛을 쏴준 오영일.
물론 현실에 대입시키면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에게 서울대 출신의 일류 매너남과의 아름다운 추억과 현재 12살 연하의 남자친구는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 한 몸 건사하느라 힘들게 살아온 가난한 그녀에게 그 정도 선물은 해주고 싶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엔딩이 만족스러웠다. 전쟁터 같은 곳에서 잔다르크처럼 명멸해버리지 않는 엔딩이라서~~
p.238
이제야 잔다르크가 전쟁에서 연승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가 지었던 승리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자신 있게 전진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는가? 전투에 승리했을 때에도 다음 전투를 준비하느라, 닥쳐올 위기를 걱정하다가 전쟁에서 패배했고 이렇게 늙어버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였던 그녀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
약봉지를 변기에 버릴까 아니면 서랍장에 넣어둘까 고민하고 있다. 분명한 건 잠시 뒤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가 내 품에 안길 거라는 것이다.
대주자였던 오영일이 투수가 방심하는 사이 홈스틸 성공으로 게임을 끝내버리는 장면에서 중계진들의 환호와 함께 사이안의 머리에도 폭죽의 불꽃이 팡팡 터졌을 것이고, 독자인 나도 같이 펄쩍펄쩍 뛰었다.
작가는 차기작에 좀 더 거친 사람들의 얘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소설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