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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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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전시회를 찾는 사람들은 갈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몇 가지 있다.
'언제 가면 조용히 감상할 수 있을까?'
북적이지 않는 시간대를 생각해본다.
'도슨트와 오디오 가이드 중 어떤 설명을 들어볼까?'
도슨트 해설의 경우에도 시간 확인은 필수다.
이런 고민의 이유는 감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만약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화가의 전시라면 한 번만 가지는 않는다. 전시실을 나오면서 드는 아쉬움은 엽서나 굿즈 구매로 달래기도 한다. 혹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도록을 사기도 하는데 그림 사이즈가 작아도 보고 싶은 그림을 혼자, 조용히, 독점?하고 싶은 이유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감상가이드용 책이 나왔다.
오시안 워드의 <혼자 보는 미술관>이다.
이 책은 미술 감상 초심자들을 위한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일단 각 그림에 대한 설명이 한 두페이지로 길지 않아 부담감이 적다. 키워드를 제시하여 그대로 대입해가면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키워드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인데 감상법 각 단계의 영어 단어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영어라도 입에 착 붙는다. 이 키워드를 바로기억해서 순서대로 감상하는 것은 물론 무리다. 그러나 저자의 조언대로 책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보다보면 감이 올 것이다. 단, 주의사항이 있다.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후루룩 읽는 것은 비추다. 90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타불라 라사’식으로 감상하는데 몇 시간만에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 책을 고른 독자라면 분명히 그림에 관심이 있을 것이고, 미술작품 감상법에 대한 책이라는 사전 정보가 있었을 것이므로 설마 한번 읽고 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출판사 리뷰단 자격으로 받았다. 받자마자 한 번 훑어보니 이 책은 한 번만 읽고 리뷰를 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ABULA RASA’의 키워드를 하루에 하나씩만 읽어도 열흘이 걸리고, 작품 하나하나에 대입해 감상한다면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릴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의 성격이나 배경지식에 따라 속도는 다르겠으나 이 책은 급하게 읽으면 제 맛을 알 수가 없다. 천천히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으면 그 참맛이 우러나는 책이다. 처음 본 그림도 여러번 보고 설명도 읽으면,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미술작품과 인문학적으로 연결한 에세이집은 여러 권 읽어보았는데 이 책처럼 감상법 위주로 만든 책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그리고 속지가 두꺼운 것도 내 취향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보통 책갈피 사용을 까먹고 책귀를 마구마구 접는 스타일인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명화를 훼손하는 것만 같은,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마지막에 작품목록과 참고문헌까지 수록되어 있어서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제 TABULA RASA가 뭔지 알아보자.
Time (시간 : 오래, 자주, 계속의 힘)
Association (관계 : 말을 걸고 마음을 나누고)
Background (배경 : 아름다움의 출처를 묻는 일)
Understand (이해하기 : 얼마나 마음을 열 수 있는가)
Look again (다시 보기 : 작품도 내 마음도 매번 다를 때)
Assessment (평가하기 : 정답이 없다는 말은 정답이다)
Rhythm (리듬 : 간격과 박자와 배치의 유쾌함)
Allegory (비유 : 그럴듯한 생각과 있음직한 사실들)
Structure (구도 : 그림 속 풍경, 액자 밖 프레임)
Atmosphere (분위기 : 느낌은 아우라가 된다)
프롤로그에서 TABULA RASA로 감상법 설명 후에야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주제는
Philosophy, Honesty, Drama, Beauty, Horror, Paradox, Folly, Vision 이다. 각 장의 영어 제목은 Art as~ 로 시작하고 한글로 제목과 부제를 따로 달았다.
1장을 예를 들면 영어 제목은,
Theme 1. Art as Philosophy 이고 한글로는 사유는 붓을 타고 : 철학이라는 캔버스 이다. 8개의 회화작품을 소개하며 미술에 표현된 철학적 세계를 고찰한다.
프롤로그에서 배운 감상법 중 RASA를 활용한 그림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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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3
리듬, 알레고리, 구도, 분위기의 원리를 활용해 재빨리 훑어보면 도움이 된다. 사진작가의 작업실처럼 양이 정면으로 환하게 조명을 받고, 그 뒤는 새까맣기 때문에 리듬은 단조로워 보인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양털이 삶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흥미를 갖게 한다. 우리 시선은 화면을 가로질러 어린 양의 묶인 다리로 내려간다. 단순하고 꽉 짜인 구도에서 십자 모양으로 묶인 다리를 묘사한 이 아랫부분이 작품의 절정이다. 수르바란은 이 주제를 열 번도 넘게 되풀이해서 그리면서 복잡한 요소를 하나씩 버리고 가장 본질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머리 위 후광과 글자가 새겨진 회색 석판을 없애 관람자가 참고할 만한 요소를 거의 남겨 두지 않았다.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가 대조되면서 이상하게 과장되고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장면이 연출되어 분위기 효과도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알레고리 덕분에 우리는 이 그림을 희생양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렸다고 상상할 수 있다.
위처럼 각 장의 주제에 어울리는 그림들을 프롤로그에서 배운 감상법에 대입한 설명이 나오므로 초심자들도 쉽게 감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한 장씩 혹은 그림 하나씩 천천히 꼼꼼하게 보고 읽기를 추천한다.
이 리뷰에서 TABULA RASA 감상법 각각에 대한 설명을 모두 다 하는 것은 무리다. 그 중 배경에 대한 부분을 소개한다.
Background(배경)
우리는 유명 작가에게 붙은 천재라는 딱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의깊게 보지 않는다. 작품의 제목과 작가, 제작 시기만 알아도 작품 감상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벽에 붙어있는 설명을 보고 정보를 조금 더 얻어 작품의 몇 가지 특징을 파악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야기 속에 담긴 종교적인 의미만 알면 다른 정보를 찾아서 읽지 않아도 충분히 감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성경 장면이나 신화 장면 때문에 당황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는 자료를 더 찾아 나서기보다 여러분의 직감을 믿고 여러분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다. 언제나 그림을 먼저 찬찬히 감상하고 난 다음 설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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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그림만 보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웬만큼 조예가 깊지 않다면 화가와 마라와의 관계,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배경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면 저자의 말대로 작품을 먼저 감상한 후 설명을 읽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그림만 보면서 이렇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손에 쥔 편지는 받은 것일까? 쓴 것일까? 오른 손에 펜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쓴 것 같기도 하다.
죽은 사람 표정 치고는 평화롭다.
뒤쪽이 검기 때문에 마라의 벗은 상체와 흰 시트가 선명하게 부각되고 좌측에 치우친 몸이 안정적으로 보인다.
우측에 있는 상자 아래쪽에 쓰여진 글자는 마라와 다비드인데 두 이름을 써놓은 의미는 무엇일까? '
그림을 보며 위처럼 자유롭게 감상한 후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이다.
p.29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자 행렬이나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혁명 정부의 선전 업무를 책임졌다. ‘민중의 친구’인 장 폴 마라의 초상화를 그릴 때, 빛의 효과를 이용해 그를 극적이면서도 영웅적으로 묘사하면서 죽음을 순교처럼 표현한 것은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전혀 놀랍지 않다. 피부병에 시달리던 마라는 증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목욕을 하다가 젊은 여성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 여성은 그림 속 마라가 쥐고 있는 거짓 편지를 이용해 마라를 만났다. 분명 아픈 상태였고 젖은 수건을 쓰고 있지만, 마라의 얼굴을 보면 죽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듯하다. 그리스나 로마 조각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평온하고 부드럽고 깨끗한 얼굴이다. 마라의 축 늘어진 몸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슷하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상 <피에타>의 자세와 닮았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여러 요소를 거리낌없이 바꾸면서 피에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마라의 죽음을 모든 인간의 몸부림과 고통으로 해석하기 위해서였다. 수백 년 전의 작품인 피에타의 영향력은 그때까지 살아남아 마라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 다비드의 그림에서 그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위 설명을 읽고 마라 죽음의 배경, 피에타 자세의 안정적 느낌, 다비드의 창작 의도까지 알게 되었다. 이처럼 그림 속에 숨어있는 스토리텔링을 알게 되면 훨씬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다.
각 그림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읽는다면, 이 책은 천천히 오래오래 읽어야 할 책이다. 옆에 두고 나만의 도슨트로 삼기에 손색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