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올해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최초의 SF물이라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오수완 작가의 <에케 호모>를 서평단 자격으로 받아 읽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서 작가를 검색해봤더니 한의사이면서 소설까지 쓰는 사람이다. 그의 인터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을 인용한다.
"늘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것, 나만 쓸 수 있는 걸 쓰려고 한다. 누군가 쓸 수 있다면 굳이 나까지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서로의 삶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걸 써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쓰는 것 역시 시간 낭비다. 쓰는 동안 재미없는 이야기라면 읽는 데도 재미없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읽으라고 권할 수는 없다."
시쳇말로 개나 소나 소설 쓰는 시대라고 한다. 나도 시도해봤지만 역량 부족만 절감했던 적이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서로의 삶을 낭비하는 짓’이었구나 싶다.
<에케 호모>는 문명이 파괴된 근미래에 중년 남성 ‘노먼’과 여자아이 ‘서브’가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뭐든 수리할 수 있는 노먼은 말을 하지 못하는 서브를 돌보면서 여행을 한다. 서브에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는 노먼은 보호자, 어쩌면 선지자처럼 보인다. 둘의 여행에서 만나는 인간 군상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는 이들이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것은 책이다.
소설의 처음에서 책을 14,725권이나 소유하고 있는 여성에게 도서관에서 나왔다고 하는 남자가 찾아온다. 책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말한다. 그 책들이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며. 30년 만에 엑스포가 다시 시작된다는 라디오 광고를 들은 뒤 여성은 책을 그대로 둔 채 집을 떠난다. 노먼을 찾기 위해, 그의 노트와 그림책 한권을 들고. 그 후의 줄거리는 노먼과 서브의 여행기이며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이야기가 프롤로그로 다시 돌아와 연결되는 구조이다.
둘의 여행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것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 물질 문명인가?이다. 노먼이 파괴되고 고장 난 물건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의미심장하다. 노먼은 서브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 지켜준다. 처음엔 과도한 보호에 의문을 품었지만 마지막에 노먼이 누구인지 드러나면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존을 위협받던 아이가 살아남았다. 활자를 사랑했던 아이는 책을 모으고 책과 함께하는 어른이 되었다. 자신을 지켜주었던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책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 나온다. 서두에 소개한 작가의 인터뷰 내용과 연결되는 듯하다.
p.188
당신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싶어. 왜 이 책이냐고 하면, 이 책이 어떤 의미냐고 하면,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어. 당신이나 나와 상관있는 이야기인 것도 아냐. 그런데도 이 책을 읽어주고 싶은 건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여기 나오는 소년이 당신과 이름이 같은데다가 어딘가 닮아서일까. 어쩌면 당신이 내게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고 바라서인지도 몰라. 그때, 우리가 함께 여행했을 때 말이야.
이제 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웃고 편히 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