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딸이 되려고 몇 생을 넘어 여기에 왔어
이순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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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딸이 되려고 몇 생을 넘어 여기에 왔어>는 육십대에 낸 첫 에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순하 작가의 필력 내공이 돋보이는 책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60여 년의 시간 동안 먹고 사는 일이 이다지도 파란만장할 수가 있을까. 이북에서 내려온 작가의 아버지, 대구에서 한의원을 했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에 외갓집 식구들 및 친구와 먹었던 음식들을 작가가 하나씩 차려낼 때마다 대한민국 현대사가 펼쳐졌다.

 

이 책은 음식에세이이며 작가의 자서전이자 한국 현대사 속에 숨은 생활문화사이기도 하다. 매 꼭지는 하나의 음식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 같았다. 아버지가 첩실을 여럿 두었어도 참아야만 했던 엄마, 쥐고기를 먹고 기력이 회복된 언니의 이야기, 여중생에게 휘두르던 교사의 일상적 폭력, 키다리 아저씨 같았던 친구의 아버지, 지금 상식으론 어불성설인 작가 시어머니의 행동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소재가 되는 음식의 유래와 조리법을 자신과 가족 및 주변 인물들의 삶과 맛깔스럽게 버무려 일품요리로 차려냈다. 눈과 코를 자극하는 문장들은 비유로 넘실거려 독자를 아름다운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여자는 갱죽에 수제비를 떠 넣고 있었다. 화덕의 화기를 돋우려고 부채로 불을 일구었다. 넘실거리는 화력에 뜨거워진 여자의 얼굴은 홍옥처럼 붉었다. 그녀는 선 채로 뜨거운 갱죽을 소리 없이 먹었다. 여자의 소음 없는 수저질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에 대한 비정이 비탄으로 바뀌어 귓속의 달팽이관이 울듯 마른 울음을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온기가 사라진 구들목을 다시 데우는 데 내동댕이쳐져 흠씬 젖은 장작은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잔한 추억과 눈물로 범벅된 작가의 인생 음식들 중에서 독자가 먹어본 것도 있을 것이고 처음인 것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개된 음식을 보며 자신의 경험이 오버랩되면 공감할 것이며 생소한 음식은 맛보고 싶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음식들보다는 작가가 써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감정이입되었다. 뜨겁고 달콤한 호떡으로 인생의 쓴맛을 일찍 알아버렸던 중학교 때, 작가의 중학생 시절을 견디게 해준 영미와 영미 아버지 이야기에서 나도 내 친구 영미를 떠올렸다. 나의 중학교 시절을 가장 즐겁게 해준 친구가 바로 김영미였다. 작가처럼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영미와는 연락이 끊겼고 이후로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작가는 어른이 되어 영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친구는 엄마 병원비를 내지 못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작가는 수중에 있던 제 병원비 몇 푼을 쥐어주고 돌아섰는데 영미에게 병원비를 대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했다. 작가도 당시에 곤궁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 뒤늦게 돈을 마련하여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영미를 만날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작가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던 영미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신의 행동은 너무나 부끄러운 짓이었다. 작가는 호떡을 볼 때마다 용서를 떠올린다. 은혜를 갚을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혹여 작가의 친구 영미씨가 이 책을 보게 되어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백열전구가 절간의 풍경처럼 매달려 있던 어둠고 침침한 동굴 같은 호떡집이었다. 낡아빠진 양은쟁반에다 호떡을 담아주었다. 뜨거운 호떡을 베어 물면 먹물 같은 검은 설탕물이 줄줄 흘렸다. 혀가 델 정도로 뜨거웠지만 뜨거울수록 맛이 있었다. 호떡집을 자주 드나들다보니 호떡처럼 몸을 낮추어야, 뜨거워도 견더야 단것이 입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제 고통이 크면 타인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가난은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언젠가 은혜도 갚고 힘든 사람을 돌봐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행복을 저금해두었다 나중에 행복해질 수 없듯 말이다. 작가의 친정엄마는 젊은 시절 딴집 살림을 여럿 차린 남편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는데 남편이 52세에 세상을 뜬 후 가장이 되어 자식 넷을 먹여살려야 했다. 씩씩한 대장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년에는 페루로 이민간 셋째딸네에 가서 그 동네의 대모가 될 정도로 맘씨 넓고 자애로운 한국여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그리고 페루로, 일생을 종횡무진 거침없이 살다가신 작가 친정어머니의 생이 존경스러웠다. 작가도 사랑과 존경의 뜻을 담아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 같다.

 

마지막에 "늬 아버지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더라."는 당신의 말에 작가는,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삭고 삭아 이제는 향기조차 날아가버린 오래 묵은 씨간장 같은 말'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한 남자에게 오롯이 사랑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을까. 가족을 위해 한평생 열심히 살았던 사람에게 그다지도 큰 욕심이었을까. 같은 여자로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작가 친정엄마의 생을 이 책으로 만나보니 질곡의 세월을 살아낸 이 땅의 모든 엄마들에게 경외심이 든다. 물론 우리 엄마에게도.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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