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조각 미학 일기 - 미학생활자가 바라본 미술, 음악, 영화
편린 지음 / 미술문화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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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서평이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컬처블룸 카페에서 서평단 자격으로 <조각조각 미학일기>를 받아 읽었지만 감히 책을 평한다는 서평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글이 되지 못함을 미리 고백하고 시작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안 일을 하고 sns를 둘러보며 잠시 쉬다 보면 종이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속독을 하게 되고 허겁지겁 마감일에 맞춰 서평을 써냈다. 그런데 이번 책 <조각조각 미학일기>는 빠르게 읽을 수 없었고 급하게 글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서평 마감일은 다가왔다. 이 책을 일독만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그 짓을 하고 있어서 낯부끄럽고 저자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예술 관련 서적들을 읽어왔고 미술관을 다니며 보는 눈을 키우려고 노력했으며 영화를 보면 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쪼개지 않은 둥그런 수박의 겉만 핥아놓고 그 속의 색과 속살의 질감, 냄새까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해왔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잘 아는 내 일상과 감정이 들어있는 글은 일기인데 그것은 또 공개하기 싫다. 서평단 자격으로 쓰는 글에 내 얘기를 넣는 게 주저되므로 결국 일반론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런 습관이 굳어져버린 것 같아 요즘 쓰는 글이 점점 성에 차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잘 모르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자! 그동안 영화를, 미술을, 음악을 이렇게 철학자와 그의 사상으로 연결한 글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각조각 미학일기>는 차원이 달랐다. 공부하듯이 읽게 만드는 책이었다. 저자는 미학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암호, 단서, 편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사용해 미술 작품, 영화를 9편 소개하고 그 안에서 종횡무진 철학의 세계를 내달렸다. 그 길을 따라가려니 버거웠다. 그가 소개한 철학자들의 이름과 저서의 제목 정도는 알아도 책을 읽어본 적은 없으므로 철학이론을 설명할 때는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저자는 편린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서울대에서 미학과 국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저자 소개에 단상을 짧게 메모한 촌평들을 오리고 붙이고 꿰매서 글을 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구한다고 했는데 이 책의 각 꼭지보다는 짧은 글을 쓸 때 해당하는 것일까?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각 작품과 연결한 철학자들과 그 이론은 단상을 오리고 붙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책 속 작품들의 제목과 철학자 이름만 봤을 때는 대부분 아는 것이었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안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아는 게 아니니까. 이 책을 한 번 읽었다 해서 내가 다 이해했다 할 수 없으므로 평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아홉 꼭지 전체를 요약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 <헤어질 결심>과 알랭 바디우를 연결한 꼭지 완전히 붕괴된 시간을 읽은 소감만 써보려고 한다.


저자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압도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은 어떻게 우리를 압도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압도하는가였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을 가져와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태의 이름과 어부가 알고 있는 명태의 이름, 즉 종류의 차이를 말한 후 무한한 명태의 세계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 지극히 일부만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여기에서 바디우의 존재의 고유명은 공백이라는 말은 무한한 명태는 너무도 많아서 파악될 수 없는 자리, 아무리 베테랑 어부라도 절대로 다가볼 수 없는 자리, 그래서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무한한 지평에 위치하며 그곳을 바디우는 공백이라 부른다. 바디우는 지식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리너구리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물에 대한 이해, 우리가 확보한 진리의 지평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바디우를 따라 진리가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진리를 만든다고 했다. 바디우가 사건에 의해 진리가 생산되는 시퀀스에는 예술, 과학, 정치, 그리고 사랑, 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사랑을 진리 생산의 절차로 포함시킨 것을 인용했다.


사랑은 사건의 좋은 예입니다. 내가 사무실의 동료를, 또는 다른 누군가를 소개받습니다. 그것은 거의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즉시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또한 그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역에는 많은 편차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만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은 비둘기의 걸음으로도래한다는 니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엄청난 역사의 기원점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붕괴=사랑이라는 생각이 이 영화의 근본적 메시지라고 하며 이것이 다른 통속적인 사랑 영화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호도되고 왜곡된 사랑의 모습(사랑이란 불완전한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서로를 완전하게 만든다)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과 바디우는, ‘사랑은 붕괴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나도 공감했으며 존중을 설명할 때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김주환 교수의 유튜브 강의에서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중한다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 심하게 고개 끄덕였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상대를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는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며 존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수용하는 태도로 간주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생긴 저항감을 사랑의 힘으로 무조건 억누르는 것이 존중이 아니라 심각한 태도로 마찰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내 안에서 소멸시키거나 그 차이가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 양 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주체에 대해 말해야 한다. 주체는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를 생산한다. 기존에는 사건이 입각하고 있는 진리는 주체가 생산한 것이고, 진리에 입각하여 사건을 만드는 것 역시 주체(주체진리사건)라고 보았으나 바디우는 사건진리주체의 순서로 뒤집었다. 사건이 진리를 생산하고 모종의 진리가 생산되는 과정의 일꾼으로서 참여하는 주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주체였던 것이 아니라 몸을 던지는 순간에만 주체가 된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확신, 어딘가로 몸을 던지겠다는 결심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제목으로 연결해 보자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인 사랑이 주체 입장에서 본다면 곧 결심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질 결심을 내릴 때 주체가 된다. 그런데 제목이 왜 사랑할 결심이 아니라 헤어질 결심일까. 진정한 존중을 위해서는 저항감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 성숙을 위해서는 혁명적 사건이 있어야 하듯 하나를 창조하고 서로를 치유하는 것에는 파괴와 상처라는 전제가 생략될 수 없다.


결국 아물게 될 상처, 나를 죽이지는 못하되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상처는 사실 상처가 아니다. 영원한 상처, 살 안쪽에 패인 상처, 나를 죽일 수 있는 상처, 그러니까 서래가 들어가 앉은 구덩이의 깊이만큼 패인 상처가 진정한 상처다. 우리는 그 상처의 깊이와 무늬로 인하여 우리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다. 또한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된 그 상처는 사랑이라는 사건의 흔적이며, 사랑이라는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 그 파괴의 현장에 우리 자신이 있다. 이 모든 사건과 진리는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또한 그래서 아름답다고 저자는 말하며 평생 이 진리를 옹호할 결심이 되어 있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제목이 왜 헤어질 결심일까 생각해봤지만 쉬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통과하여 저자가 파괴의 현장에 있는 우리, 사건과 진리라고 말한 사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미학을 공부하면서 아름다움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중이라고 했다. 그 구덩이의 끝에 모든 아름다움의 이유를 알려줄 최종적 근거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파헤치고 있다. 파헤쳐 나온 돌조각들을 가지고 노는 법을 미학이 가르쳐주었다고. 그의 이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할 수 없고 철학을 모르는 내가 앞으로 만날 예술 작품과 철학을 서로 꿸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책을 여러 번 꼭꼭 씹어 읽어야겠다는 결심만 할 뿐...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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