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는 2009년에 출간된 이래 아일랜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모두가 읽는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작년에 <말없는 소녀>로 영화화 되어 이번 달에 국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지 15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번 영화 개봉을 앞두고 원작 소설이 번역되어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받아 읽었다.
이 소설의 분량은 1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은 ‘노동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초고에서 얼마나 덜어내고 덜어내어 이만큼이 남았을까. 줄인만큼 적확하고 밀도 있는 언어의 조탁은 번역문을 읽는 독자에게도 매끄런 천을 어루만지는 듯한 만족감을 선사해 주었다.
주인공 아이가 먼 친척집에 맡겨진 시간도 어느 해 여름 한철에 불과하다. 아이는 친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친절과 환대를 킨셀라 부부에게서 받는다. 인생을 통틀어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만한 때는 몇 번이나 있을까. 그 경험이 이후의 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결정적 사건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 저런 결정적 사건을 겪은 아이라면 다가올 인생의 파고를 쉬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8~9세 정도 되는 여자 아이다. 부모와 킨셀라 부부의 말과 행동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투과되기에 단순 서술에 가깝다. 이는 독자에게 평가할 기회를 준다. 부모의 태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며 킨셀라 부부의 다정함을 언급할 수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부모도 배움이 있어야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부모의 학력에 가중치를 두었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고학력보다 필요한 건 나이가 들어도 계속 공부하는 자세이며, 부모의 사고방식이나 성정이 자녀에게 더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무심함(또는 무례함)은 말투에서도 보이지만 킨셀라 부부의 집에 데려다 주던 날 딸의 짐도 내려주지 않고 가버린 것만 봐도 평소 태도가 어떠했을지 알 수 있다. 킨셀라 부부는 가정의 안온함과 아빠와 엄마로서의 성역할 모델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헤어질 때가 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자녀 많은 집 아이들이 울고 떼쓰면 제 것을 챙기게 된다는 생존 본능적 행동을 하게 마련인데 아이는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옷가게 점원이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잘해준다고 말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현하는 대신 거리에 나오자 강렬한 햇빛에 눈이 멀 것 같다고 한다. 곧바로 마음 한구석으로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구름이 껴서 제대로 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킨셀라 아주머니의 딸이라는 말이 눈이 부실만큼 좋지만 현실은 딸이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문장인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날 엄마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만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