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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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는 2009년에 출간된 이래 아일랜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모두가 읽는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작년에 <말없는 소녀>로 영화화 되어 이번 달에 국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지 15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번 영화 개봉을 앞두고 원작 소설이 번역되어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받아 읽었다.

이 소설의 분량은 1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은 ‘노동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초고에서 얼마나 덜어내고 덜어내어 이만큼이 남았을까. 줄인만큼 적확하고 밀도 있는 언어의 조탁은 번역문을 읽는 독자에게도 매끄런 천을 어루만지는 듯한 만족감을 선사해 주었다.

주인공 아이가 먼 친척집에 맡겨진 시간도 어느 해 여름 한철에 불과하다. 아이는 친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친절과 환대를 킨셀라 부부에게서 받는다. 인생을 통틀어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만한 때는 몇 번이나 있을까. 그 경험이 이후의 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결정적 사건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 저런 결정적 사건을 겪은 아이라면 다가올 인생의 파고를 쉬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8~9세 정도 되는 여자 아이다. 부모와 킨셀라 부부의 말과 행동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투과되기에 단순 서술에 가깝다. 이는 독자에게 평가할 기회를 준다. 부모의 태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며 킨셀라 부부의 다정함을 언급할 수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부모도 배움이 있어야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부모의 학력에 가중치를 두었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고학력보다 필요한 건 나이가 들어도 계속 공부하는 자세이며, 부모의 사고방식이나 성정이 자녀에게 더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무심함(또는 무례함)은 말투에서도 보이지만 킨셀라 부부의 집에 데려다 주던 날 딸의 짐도 내려주지 않고 가버린 것만 봐도 평소 태도가 어떠했을지 알 수 있다. 킨셀라 부부는 가정의 안온함과 아빠와 엄마로서의 성역할 모델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헤어질 때가 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자녀 많은 집 아이들이 울고 떼쓰면 제 것을 챙기게 된다는 생존 본능적 행동을 하게 마련인데 아이는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옷가게 점원이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잘해준다고 말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현하는 대신 거리에 나오자 강렬한 햇빛에 눈이 멀 것 같다고 한다. 곧바로 마음 한구석으로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구름이 껴서 제대로 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킨셀라 아주머니의 딸이라는 말이 눈이 부실만큼 좋지만 현실은 딸이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문장인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날 엄마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만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한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무슨 일’이 무엇인지는 독자도 잘 알고 있다. 몇 달 안 되는 시간동안 아이는 훌쩍 커버렸다. 아저씨는 우편함까지 뛰어가서 우편물을 가져오는 달리기 연습을 시켰다. 그래서 집에 돌아올 때 쯤엔 처음보다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저를 데려다주고 떠나는 아저씨의 자동차 소리를 듣고 아이는 뛰어나갔다. 울퉁불퉁한 자갈을 세차게 밟으며 진입로까지 달려 내려간다. 이윽고 만난 아저씨는 아이를 안아들었고 아주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어깨너머로 부둥켜안은 셋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빠가 보이자 아이는 아저씨의 품에서 말한다. 아빠라고. 그 아빠는 누구를 부르는 말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이렇게 끝이 나지만 독자마다 그 후의 이야기를 상상해 볼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마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 찾아와 종알거리는 소녀의 모습을 그려봤다. 빨강머리 앤만큼 수다스럽진 않겠지만. 무채색이었던 아이가 저만의 색과 향기를 띠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영화에서 마지막을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해진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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