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욘더
김장환 지음 / 비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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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서 나 여기 있어. 사라지지 않았어. 이곳으로 와줄래?”라는 홀로그램 메시지를 받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베일에 싸인 공간 욘더로 나아가는 한 남자. 소설은 상실의 슬픔과 절절한 그리움, 다시 만나기 위해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용기 등 사랑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출판사의 <굿바이, 욘더> 소개 중 위 내용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나는 위와 유사한 소재를 다루는 미디어에 늘 회의적이었다.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면 죽었는데도 잊지 못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만나겠다고?


나는 기대했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을지, 작가가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에 적극 동감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주인공 홀은 아내 이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고 바이앤바이(가상 현실 기술을 바탕으로 세워진 추모 사이트)에 가서 아내를 만난다. 그러나 홀은 아내로 현현한 아바타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는 존재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욘더라는 다른 세상, 아내 이후가 있는 곳으로 간다. 욘더에 간다는 뜻은 그곳에 가 있는 사람이 초청을 해야만 갈 수 있는데 실은 자살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즉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욘더라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기대했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으나 근미래 유비쿼터스가 상용화된 세상에 쓰인 기술들을 현재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고래로부터 인간이 꿈꿔온 불멸, 내세, 천국 같은 소재들이 자연스레 기술과 연결되어 감탄했다.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았고 개연성을 따질 구석도 없었다. 이 소설이 2011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놀랐다. 그제서야 작가 김장환씨의 이력을 확인했더니 철학 전공자였다. 어릴 때부터 소설, SF 장르문학을 탐독했으며 뉴질랜드의 심심한 환경을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낸 소설이 <굿바이, 욘더>이다.


바이앤바이에서 만난 아내 아바타 대신 진짜 아내가 있다는 욘더로 떠나는 주인공에게, 나는 설득되지 못했다. 홀이 이후가 죽은지 2년이 지나도록 못잊는다는 게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지 다른 표현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캐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욘더에서 아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홀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늘 행복하기만 한 욘더가 천국이라는데 과연 저렇게 지내면 진짜 행복할까? 우리는 하루하루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일상 속에서 찾는 기쁨을 행복이라 여기고 감사한다. 어려움과 결핍, 불안이 없이 행복감만 있는 곳이 천국은 아니다.


결국 이후가 먼저 욘더에서 느끼는 행복감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체 없고 의미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둘은 결정한다. 자신만의 천국을 소거하기로. 이후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들이 딴지를 걸 수 없도록 과학기술로 세팅해 놓았다. 미래에 이루어질 과학, 의료기술을 소설 속에서 구현시켰는데 그런 세상이 현실에서 곧 이루어 질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꾸었다. 아무리 허황된 꿈이어도 이루어져왔다. 현재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미래를 산다. 당장 오늘 저녁 뭐 먹을까부터 무슨 대학에 갈 것이고 졸업을 하면 어디에 취직을 하겠다는 계획은 모두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을 구호처럼 외치며 살아간다.


상상하는 미래가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무한대로 상상한다. 작가는 전반부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외상 거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개인의 삶을 추동하는 것인 반면 진보하는 기술이 가져올 파급에 대해서는 도외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파급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면 파국이 오는 것인데 외상에 외상을 거듭하다 파산하게 될 것이라며 장진호 박사의 입을 빌어 경고한다. 기술의 디스토피아는 기술이 약속했던 것을 배달하지 못할 때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배달해 왔을 때라고. 어떤 형태일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이후와 홀이 자신들의 천국을 소거하겠다는 멘트, “이걸 원하지 않아.”는 완벽한 행복이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기술문명을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욘더로 가려고 자살자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 이것이 기술 발전의 명암이다. 누군가는 적극 수용하고 즐기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 이 좋은 걸 왜 누리지 않느냐고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을 믿지 않아도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사랑보다는 미래사회를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고 깊이 있는 생각들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죽은 사람은 망각하고, 행복만 있는 세상보다는 매일을 아등바등 살며 가끔 누리는 행복에 감사하는 삶이 축복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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