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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6월
평점 :


전쟁은 우리에게는 더이상 피부에 와닿지 않는 단어다. 1953년에 휴전된 이후 이땅에서 전쟁이 재 점화되지 않았고, 전쟁을 겪은 세대가 점점 유명을 달리하고 있으며, 전후에 태어난 세대는 전쟁을 책으로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상에서 ‘참전용사’라는 말은 접하기 힘든 낱말이 되었다. ‘참전군인’이 아니라 참전 뒤에 용사라 붙인 데는 감사와 경외심을 표현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었고, 생존해 돌아왔다면 그들을 예우해줄 호칭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 가까이 된 현재, 참전용사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들을 기억하려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여기 참전용사를 사진으로 남긴 사진가가 있다.

라미 현, 그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전쟁에 참여한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을 책으로 냈다. 이런 프로젝트를 하게 된 사연을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의 프롤로그에서 발췌해 옮긴다.
2016년, Project-Soldier 중 첫 번째 기획인 <대한민국 군복>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시회를 방문해 사진을 감상하던 한 외국인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디어에서만 보았던 유엔군 참전용사였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 인사를 건네며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맞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 눈을 바라보면서 답했습니다.
“Yes, I am a Korean War Veteran, US Marine.”
(그래, 난 한국전쟁 미 해병대 참전용사야.)
그 순간 그의 눈에선 광채가 번뜩였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이었습니다. 37살, 수년간 사진작가로 활동해오면서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의 눈빛에 매료된 저는 처음으로 참전용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스튜디오에 돌아와 사진을 확인해봤습니다. 사진 속 그의 눈에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의문 한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저 분은 자기 나라를 위해서 싸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눈빛과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위와 같은 호기심에서 시작한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업을 계속 하기에 이른다. 나도 같은 궁금증이 일었다. 책에 소개된 29명의 참전용사를 만나면 궁금증이 풀릴지 기대하며 책장을 열었다.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80대 후반에서 90대였다. 열 일곱살 꽃다운 나이에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했던 청년이 이젠 백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된 것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경험했던 전쟁은 그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제각각 떠나온 곳과 배속된 부대가 달랐지만 그들은 비슷한 참상을 목도했고 몸과 마음에 상흔을 남겼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그들의 입을 통해 듣는 한국전쟁의 참상은 생생했다.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전장에는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마디로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려면 먹어야 한다. 과일 통조림을 돌로 찧어 꿀 같은 그 물을 먹었더니 도리어 갈증이 나서 맹물을 마신 후 설사와 구토를 한 사례는 약과였다. 꿀꿀이죽 한 그릇을 금반지 하나와 맞바꿔서라도 사먹어야 했고, 비행기에서 떨어진 미숫가루가 다 날려 바닥에 흩어진 것을 핥아먹어야 했다. 피란 도중 사산한 아이를 버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던 산모는 얼마 가지 못해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 폭격으로 날아간 손가락을 봉합하는 수술에 실패해 절단할 수밖에 없었고, 다리와 팔에 동시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참전용사였다.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장애를 입으면서까지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인터뷰에서, 사진 속 눈빛에서 보였다. 작가가 보았다던 그 자부심 말이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한국의 발전된 모습에 감격스러워했다. 그런 그들의 가슴에는 ‘애국’이라는 단어가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역사책 속의 사건 중 하나로 인식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참전용사의 기억과 기록은 전쟁이 무시무시한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지금 내 삶이 힘들기 때문에 그들의 기억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진작가 라미 현이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전후세대와 참전용사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참전용사가 모두 사라지기전에 그들을 기록해두려는 것이다. 남겨두는 것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작가가 애쓴 결과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잘잘못과 이념 논쟁을 떠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참전용사의 얼굴이 같이 떠오른다면! 작가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라 할 것이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