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고 작가는 자기소개에 썼다.

 

미안했다!

이 책에 아름다운 시들이 실린 건 알겠는데 내게 발자국을 남기진 못했다. 사실 나 같은 시 문외한은 아름다운지 아닌지도 잘 모르나 작가가 쓴 글 속에 들어있어서 아름다운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와 산책>이 한정원 작가의 첫 책이란다. 첫 책이 아닌 것만 같아 작가 소개를 다시 보니 단편영화를 연출했고 출연도 했단다. 세상을 보는 작가의 눈이 곱고 따뜻하다 여기며 책을 읽었는데 영화 연출을 했다니 어떤 영화인지 보고싶다. 작가는 대학 때부터 시를 썼다했고, 초등학교 때는 아는 언니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줬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의 싹이 들어있는 씨앗이었던게 아닐까 싶다.

 

나는 시와 친해지고 싶지만 영 쉽지가 않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시인들의 시나 국어시간에 배웠던 것 외에는 잘 모르고 찾아 읽으려 하지 않다보니 친해지지 못했다. 그렇게 습관을 들이지 못한 채 살다가 작년 가을부터 읽기 시작한 잡지 <창작과 비평>덕분에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잡지에서 우리나라 시인들을 소개하니까 어려워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고, 시인 추천도 받았다. 박정대 시인과 이정훈 시인이다. 박정대 시인의 산문시들은 형식상 접근하기 쉬웠고, 이정훈의 시는 직관적으로 이해되며 장면이 그려졌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시인은 백석과 이육사인데 그들의 시는 어렵지 않아서 좋다.

 

반면 우리나라 시 중에도 읽고 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들은 많았다. 시어의 함축성 때문이라는 거 잘 아는데 모국어로 시를 난해하게 쓴다는 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 수준이 이 정도이니 외국시를 쉽게 읽었을리 없다. <시와 산책>에서도 그렇고 말들의 흐름시리즈의 작가들은 외국시를 많이 인용했다. 외국시들이 오히려 직관적이라서 그런건지, 시인의 특이한 삶을 소재로 쓰다 보니 자연스레 시가 인용된 건지, 뭐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또는 작가의 취향에 맞는 시인이었을 수도...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라는 꼭지의 제목은 미국시인 에밀리 디킨슨시의 한 구절이다.

 

"나의 일은 맴돌기랍니다.

관습을 몰라서가 아니라 동트는 모습에 사로잡혔거나

석양이 나를 보고 있으면 그래요.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예요, 선생님."

 

작가는 1830년생인 디킨슨과 이웃하여 살았다면 가까운 이웃이 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자신과 디킨슨의 영혼이 몇몇 지점에서 겹쳐지기에 아무런 노력 없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디킨슨의 시를 읽어보면 그녀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이 추측성 입방아였을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시인이 말하는 맴돌기를 산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칩거의 이미지가 씌워져 있지만 대지가 딸린 자택 안에서 성실한 산책자로 살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것이다.

 

작가는 디킨슨의 시 무명인에서 말한 끔찍한 유명인보다는 캥거루 같았던 무명 시절을 사랑한다고 했다. 마음으로 친구 맺은 디킨슨처럼 작가도 시 쓰는 산책자가 되고 싶은 것 같다. 내 눈엔 이미 작가도 시 쓰는 산책자이다. ‘고양이는 꽃 속에를 보면 산책하며 춤 추는 시인이 나온다. 길고양이들을 위해 사료를 챙겨주는 장소가 벚나무 아래인데 작가는 그곳을 벚나무 식당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태어난 십 여 마리의 새끼 고양이들이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별이 되어 버렸다. 그중 하나 남은 고양이와 다른 성묘들을 위해 벚나무 식당을 여는 작가의 문장은 이렇다.

 

p. 149

 

나는 일부러 꽃그늘 밑에 그릇을 둔다. 몇 군데 나누어 준 밥그릇에 고양이들이 꽃잎처럼 둥글게 붙어 배를 채우는 동안, 나는 쪼그려 앉아 가만히 봄볕을 먹는다. 서로 다투지 않고, 나 자신과도 다투지 않는, 순한 시간이다. 나의 어린 고양이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벌이 되었을까, 꽃이 되었을까, 중간이 되었을까.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었을 리 없을 테지.

 

 

말을 잃을 정도로 슬픔에 빠졌던 작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은 다 침묵한다던 작가가 다음엔 어떤 책을 내놓을지 기대된다. 시집이면 좋겠다. 나는 그 시집을 들고 산책을 나갈 것이다. 걷다가 발길이 멈추는 어느 곳에서 시집을 펼쳐 조용조용 소리내어 읽어보고 싶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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