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산에 산다
최성현 지음 / 시루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서 산에 산다>의 저자 최성현씨를 몇 년 전 <녹색평론>에서 처음 만났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이 그를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당시에 그의 책들을 찾아보았으나 읽지는 못했다. 이번에 가디언 출판사에서 나온 <그래서 산에 산다>의 저자 소개를 읽는 순간, 그 때 기억이 떠올라서 서평단에 신청했다.

 

<그래서 산에 산다>2006년 출간되었던 <산에서 살다>의 개정판으로 자작시 열세 편과 하이쿠 열다섯 수도 추가로 실었다.

 

강원도에서 자연농법으로 자급자족하며 사는 농부의 일기, 혹은 에세이다. 이 책은 도시에 뿌리박고 살면서 언젠가는 자연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로망을 심어줄 것 같다. 산에서 농사 짓고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움을 굳이 일부러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편하게 도시에서 계속 살겠다고 할 것이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자연에 대한 것이지만 자연을 여행 삼아 다녀온 사람의 단상이 아니다. 그 곳에서 직접 생을 영위하는 사람의 글이기 때문에 꽃, , 산짐승, 하물며 작은 곤충까지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철새인 벙어리뻐꾸기의 이동을 보면서 저자가 깨달은 바는 거의 법정 스님의 강독인 줄 알았다.

 

p.118

 

멀리 가는 것에 못지않은 어려움이 한곳에 정착해 사는 삶에도 있다. 한곳에서도 무수한 일들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바뀐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일들을 통해 우리는 벙어리뻐꾸기처럼 먼 곳을 가지 않고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깊고 아름다운 여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제가 있다. 사는 곳에서 좋은 여행을 하려면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언젠가는 철새처럼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실을 잊을 때 우리의 삶은 썩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육신을 버려야 한다. 떠나야 하는 것인데, 그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가진 것에 집착하게 된다. 소유로 애를 태우게 된다. 덕을 쌓기보다는 야박한 짓을 하기 쉽다. 사람보다 물질이나 돈을 더 귀하게 여기기 쉽다.

 

 

책 내용 중에 반야심경과 불교에 관한 것들이 꽤 있다. 저자의 책을 찾아보니 불교 역서도 있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이라는 제목으로 반야심경 해설서이다. 불교의 생명 중시 사상이 몸에 베인 것일까, 아니면 산에 살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늘 자연과 대화한다. 더 나아가 양해를 구하기도 하는데 말벌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말벌이 저자의 집에 집을 지어서 떠나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강제로 헐어내는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결국 쫓아냈다. 저자는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고단했다고 표현한다. 그 다음 해에도 말벌이 집을 지어서 지인의 추천으로 모기향을 피워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모기향에 덤벼드는 말벌의 행동이 기이하여 벌집을 확인해보니 애벌레가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했다. 벌집 곁에 창문이 있어서 비닐로 통로를 내어 그 창문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말벌님에게 편지를 썼다.

 

말벌님에게

평화롭게 살기 위한 조치입니다. 같은 문을 쓰다 보니 서로 부딪치는 등 그동안 서로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쏘이기도 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창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말벌님의 삶을 존경합니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말벌 한두 마리가 그 비닐통로를 통해 창문으로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 뒤로 말벌들이 모두 창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말벌집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스스로 처치하지도 못해 119를 불러 태워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말벌과 사람, 지위고하 없이 모두 같은 생명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말벌에게 사람에게 하듯, 오히려 더 깍듯하게 대했다. 책으로 자연보호를 배운 우리는 감히 생각도 못한 태도이다. 도시에 살면서 어쩌다 등산이라는 이름으로 산에 오르는 우리로서는 저자가 사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배울 것은 배우고 자신이 해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선 따라해보는 것도 좋겠다. 저자가 독자를 가르치려고 쓴 글은 아닐 것이지만 배울 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나는 최근에 죽음학 관련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잘 죽기 위한 여러가지 준비 중 사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죽음 이후 장례 절차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자는 인간도 지구 전체로 보자면 엄청난 유기질 자원이라고 했다. 아마존 원주민 수아르 족의 풍장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런 장례 방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문화상 풍장을 하기 힘들고, 뭣보다 장소가 부적합하다. 저자는 아직도 매장과 화장 말고 다른 방법을 고민중이라한다. 최근 수목장도 하는 추세이지만 그것 역시 화장을 먼저 해야 한다. 자연속에서 사는 저자가 풍장을 가장 자연스런 장례법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가 산에 사는 이유를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해 뜨기 직전에 일어나서 논밭을 돌아보는 시간이 가장 좋고,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내던 새가 드디어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준 날이 가장 기쁜 날이고, 가을엔 청설모 우렁각시에게 겉껍질을 깐 밤을 얻고, 왕소등에 아줌마에게 조공하는 피는 산에 사는 세금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산에 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