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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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라는 책의 제목에 너무 매몰됐었던 건지, 책 소개를 대충 읽었는지 나는 이 책이 스파이 소설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전직 CIA 비밀 요원이었던 아마릴리스 폭스의 자전적 에세이였다. 저자는 22살에 최연소 여성 비밀요원으로 선발되어 수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6개국의 테러집단을 추적했다. 현재는 작가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방송활동도 겸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교수였던 아버지는 외국 정부에 에너지 정책을 조언하는 일을 하느라 늘 출장이 잦았고 영국출신 어머니의 가정교육 아래 풍요로운 인문학적 경험을 하며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세계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버마 국경 난민을 돕기 위한 자원 활동을 신청했다. 그 때부터 이미 요원의 재능이 다분했던 걸까? 첩보작전을 펼치듯 위장결혼을 하여 아웅산수치 여사의 인터뷰를 하게 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국제법과 신학을 공부한 후 미국 조지타운 대학원에서 테러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여 CIA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최연소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이제 그녀는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못한 채 세계 각국에서 비밀 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을 스파이 소설로 착각한 나는 영화 <무간도>를 상상하며 숨막히는 서사가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삶과 CIA요원으로서의 활동을 시간 순으로 기록했기에 드라마틱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소설적 즐거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나처럼 착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목만 보고 오해한 독자라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겠다. 저자 자신의 삶과 몸담았던 조직의 활동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독자로서 의문도 생겼다. 이렇게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직인 CIA가 하는 일을, 아무리 요원 한명의 활동이지만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해 그들이 허가했을지 궁금했다. 어느 정도의 절충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 가능하지만 그래도 이런 책을 낼 수 있는 문화라니 놀랍다. 클린턴이나 트럼프의 측근이었던 이들이 폭로성 책을 출간하는 것을 봐도 미국은 이런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는 나라는 맞는 모양이다.

 

내 착각을 자책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 접어두고 책을 읽어 나가다보니 CIA라는 조직과 미국 리더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에 개입하고,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반군을 지원하기까지 한 미국의 역사를 보자면 이 책에서 드러나는 미국 우선주의 사고방식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테러범으로 오인 체포해서 불구로 만들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행위에 저자가 반기를 들자 팀장은 그 책임은 미국 시민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답을 한다. 세계에서 저지른 추악한 행위를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와 하워드 진 같은 학자와 저런 조직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라는 것을 실감했다.

 

부부의 성생활조차 정해진 매뉴얼대로 해야 했고 간극을 좁힐 수 없었던 일반인과의 결혼과 이혼, 부모와 형제 자매에게 조차 자신의 일을 비밀에 부쳐야 했지만 저자는 요원으로 활동했던 기간 동안 충실하고 능력있는 직원이었다. 그러나 첫 딸 조이가 비밀 요원의 딸로 살게 될 미래가 어떨지 그려졌을 때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연극 배우같은 삶을 아직 너무 어린 딸이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CIA를 떠났지만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살려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앞날이 더욱 기대된다. 이 책은 이미 브리 라슨이 주인공으로 낙점되어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또 그녀는 넷플릭스의 <중독의 비즈니스>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권위를 실추시키고자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성장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감사를 보면 애정을 가늠할 수 있다.

 

CIA의 남녀 요원들에게. 여러분은 힘들게 일하지만 그만큼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윤리와 법률, 삶과 죽음의 문제와 씨름합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지휘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하죠. 자신의 삶과 꿈을 담보로 재앙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음지에서 활동합니다. 여러분이 충성하는 대상은 성조기, 미국 헌법, 그리고 신이나 사랑처럼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힘입니다. 저는 당신들 사이에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전통 속에서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를 지금과 같은 여성으로 성장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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