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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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매3책 이벤트의 세번째 책 <나의 할머니에게>를 받고 표지를 보니 전형적인 구부정한 할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초록무성한 나무를 좇아 표지 위쪽으로 올라가보니 작가 6명의 이름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본 작가, 책을 읽어본 작가, 이름 첨 본 작가까지. 이런 단편집의 경우 골라 읽는 맛이 있다. 누구의 소설을 먼저 읽을까 머리를 굴리며 표지를 넘기고 속지를 한장 넘기니 작가들의 싸인이 있다. 예상치 못한 이런!!

선물받은 기분이라 어깨가 으쓱해졌다. 싸인을 이쁘게 한 손보미 작가의 소설을 먼저 읽어야지~ 하면서 <위대한 유산>을 골랐다.

그런데...

아, 이건 뭔가?

스릴러? 아니 공포물에 가까운데...

할머니 소재의 소설집인데, 분명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왜 따뜻한 정과 사랑이 넘치지 않는거지?

분명 이 소설집, 다산북스 직원이 재미있게 읽었다며 강추했는데...

결말도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맛 모르는 아이스크림 골랐다가 실패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이 나쁘단 뜻이 아니다. 그저 예상과 달라 놀랐단 뜻이다.)

설마 다른 소설도 이렇진 않겠지? 다음으로 는 제목이 맘에 드는 걸로 고르자!

강화길작가의 <선베드>를 두번째로 읽었다.

아! 이번에도...

할머니는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아녔다.

할머니의 손녀인 주인공'나'는 어떤 사안이 거슬리면 앞뒤 안가리고 흥분하는 스타일이다. 내용은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해있는 할머니에게 방문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거기서도 급흥분했다가 후회를 하게 되고 유방암 걸린 친구 명주가 같이 간 덕분에 컨트롤 할 수있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주인공의 상념을 보면, 결국 사랑하는 그녀들(할머니와 명주)이 떠날까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모두 내 탓이라고 느끼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리라는 것.

할머니, 이런 게 살아 있다는 거야?

두 사람의 어깨에 머물러 있던 햇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허리가 아팠다."

p.101

↑↑ 각 단편 안엔 화가 조이스 진의 그림이 들어있다.

 

 

겨우 두 편 읽고 실망하긴 이르다!

<아몬드>를 재미있게 읽었으니 손원평 작가의 <아리아드네 정원>을 읽어보자! 제목도 이쁘니까 내용도 그럴거야~

그것은, 또! 나의 오산이었다!!

이 소설에도 인자한 할머닌 나오지 않는다. 넘쳐나는 노인들을 등급 매겨 관리하는 사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잉여다. 저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였고 그들의 2세가 사회의 젊은 층이 되었지만 양극화가 고착화된 사회에서 그들에게 젊음이란 축복이 아니었다. 오래 사는 것이 결코 좋은것만은 아니며, 계급및 계층 갈등을 다루는 이 내용들은 비단 근미래가 아닌 현실의 문제이다. 앞으로 더 심화 고착화될 사회 문제, 내게도 닥칠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세번째 소설까지 실망아닌 실망을 하다보니 그냥 읽자! 싶었다. 최은미 작가의 <11월행>은 친정엄마와 나, 그리고 딸이 함께한 템플스테이를 소재로 했고, 윤성희 작가의 <어제 꾼 꿈>은 할머니가 되지 못한 주인공이 여동생의 손주들과 놀아주는 이야기다. 이 두 소설은 내게 그리 감흥을 주지 못했다.

6편의 소설을 골라읽는 재미는 이제 한 편을 남겨두었고 기대없이 백수린 작가의 <흑설탕 캔디>를 펼쳤다. 어쩌다보니 마지막에 읽게 된 소설이었는데, 아~~~ 이러려고!! 이 소설에서 감동받으라고~ 이게 딱 네 취향이지? 하고 숨겨두었던 맛을 마지막에 뙇! 내놓은 듯했다.

<흑설탕 캔디>의 주인공 할머니는 권나실 여사! 할머니의 유품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어본 손녀가 그 일기 내용을 토대로 상상해보는 내용이었다. 권나실 여사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로 죽어서 손주들 챙겨주러 아들네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그 아들이 프랑스 파리에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같이 떠나게 된다. 그 곳에서 약 1년 간 프랑스 할아버지 브뤼니에씨와 시간을 가지게 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굳이 '데이트'라고 명명하지 않는 이유는, 권나실 여사가 남편이 죽은 후 오롯이 여자로서 남자와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남자와 피아노를 매개로 가까워지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으며 아이처럼 좋아라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햇살을 보며,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차오르는, 그 감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는 권나실 여사.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흑설탕 캔디> p.67

 

 

노인들이 흔히 "마음만은 이팔 청춘"이라고 말하듯 몸은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쓸 수 없어도 마음은 젊음 그대로라고!

쩍쩍 갈라진 땅에 단비가 내려 메말라버린 줄 알았던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나지만 그것은 늙은이에게 형벌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늙었으니 어쩔 수 없지, 현실을 직시해야지! 라며 몹시도 현실주의자인양 말하는 젊은이는 자신에게만은 청춘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곧 <아리아드네 정원>속 미래처럼 F유닛에 내던져질지도 모르는데...

 

이 소설집을 읽다보니 그동안 나는 할머니라하면 무조건 희생하고 가족들에게 무한 애정을 베푸는 존재로만 그려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말도 안되는 고정관념이다. 인간은 제각각 다르며 개성적 사고를 하며 살아간다고 여겼으면서 왜 할머니를 천편일률적인 존재로 규정했는지... 나는 내가 규정한 할머니가 될까? 아닐 것같다. <아리아드네 정원>의 지윤을 보며 저렇게 되는 건 아닐지 섬칫해놓고선 말이다.

예상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둘은 이별하게 되었고, 브뤼니에씨에게서 받은 작별의 말은 대멍사 두 개와 동사 한 개라고 일기에 적혀 있었다. 손녀는 그 세 단어를 상상해본다. 나도 상상해봤다. 이 소설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적어놓았던 것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좋았다. 할머니의 일기를 토대로 손녀가 예상하는 내용이지만 독자에게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볼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작가노트에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슈만의 "크라이슬레이나" 16번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미츠코 우치다의 연주를 찾아들었다. 클라라를 향한 슈만의 사랑이 격정적으로 때론 서정적으로 우치다의 섬세한 손길로 그려졌다. 이런 곡을 들으며 썼으니 사랑스런 나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겠다.

백수린 작가의 희망사항이 잘 전달되었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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