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아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북로드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그래도 괜찮아>“100만번 산 고양이의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이다. 작가는 이미 2010년에 작고했고, 이 책은 1986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책인데 이제야 한국에 번역되었다. 역자 이지수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34년이나 지난 책을 번역하는 것은 퍽 쓸쓸한 일이라고 밝혔다. 사노 요코가 행간마다 숨겨놓은 마음들이 얼마나 뜨겁고 또 차가웠을지 짐작만 하며 번역했다고 한다. 작가가 살아있었다면 짐작하지 않고 직접 메일을 보내 물어볼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86년에 나온 책이기에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아주 옛날 일들이다. 작가의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학창시절, 신혼초, 아들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 지인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등등.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사고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고개를 갸웃하게 할 내용도 있고, 작가의 엉뚱하고 쿨한 성격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있고,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들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것들은 직접 겪었다기보다는 한 편의 콩트같이 황당하고 웃긴 내용들도 있었다.

 

깊은 내막을 설명하지 않는 이야기들은 그 사이에 숨은 사연들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역자처럼 독자들도 짐작할 수밖에 없고, 작가의 못 다한 이야기들은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전개로 펼쳐질 수도 있겠다. 이 책의 내용들은 극적이거나 감동을 쥐어짜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담담한 어조가 편안하게 읽기 좋았다. 그동안 사노 요코의 에세이가 여러 권 나왔지만 이번 책은 오래 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맛이 있어서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내용 중 재미있게 읽은 몇 가지를 소개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돼” - p.117

전철에서 술 취한 야쿠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었을 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작가는 무서운 마음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어 그 남자에게 대답을 해준다. “누님, 사람을 죽이면 안 돼.”라며 자신은 그랬고 이젠 조직을 떠났다고 했다. 얼굴에 난 종기 때문에 곧 죽을거라는 그 남자에게 작가는 부스럼이라며 별거 아니니 병원에 가보라고 알려준다. 그들의 대화는 그 남자가 내릴 때까지 이어졌고 작가는 그가 내릴 곳을 알려주며 병원에 꼭 가보라고 당부하며 끝이 났다. 취객과 얽히고 싶지 않아 승객 모두 외면하는 전철안의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가의 일행조차 잡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작가는 다가와 옆에 앉은 남자와 말을 섞었다. 작가로서의 호기심이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누른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를 위해서입니다” - p.83

작가는 친구와 같이 땅을 샀는데 사기를 당해 일억엔(30년도 더 전에 일억엔이라니!!)을 날렸고 그로 인해 이혼이 더 빨리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사실 땅을 소개하던 부동산 업자는 사기꾼 같은 구석이 분명 있었음에도 작가는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를 친구에게조차 부끄러워 말하지 않았지만 이 글의 마지막에 밝힌다.

그 사기꾼 같은 부동산 업자의 미소라 히바리(일본의 유명한 가수 겸 배우)에 대한 때문이었다고. "그 불그죽죽한 얼굴의 탁한 목소리 모두가 거짓이었다 해도, 어쩌면 그의 만은 진짜였을지 모른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작가는 부동산 업자가 히바리를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들으며, 열일곱 살의 그가 열다섯 살의 히바리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결정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기 당하고 돈 날리고 이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저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쿨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대단하다! 싶다.

 

아까운 짓을 했구먼” p.168

작가는 열두살 때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더 있었지만 그 늦둥이를 유독 좋아했고 잘 챙겼다고 한다. 기저귀 빨고 엎어 키우고 학교까지 빼먹고 동생 유치원 앞에서 기다리면서 거의 키우다시피 했건만, 그 여동생은 아버지부터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구박했다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큰언니인 작가도 무서워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언니도 되게 심술궂었어. 난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언니 얼굴이 자잘한 알갱이 같은 점이 되어서 공중에 떠 있었어. 그게 엄청 무서운 표정이었거든. , 어릴 때 형제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아.”

 

어이쿠야! 등에 붙이고 다닐 정도로 엎어키웠더니 어찌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지... 아들 둘을 연달아 잃고 마지막으로 딸을 낳았다니까 동네 아저씨가 작가의 아버지에게 아까운 짓을 했구먼.”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작가는 아버지가 동생을 귀여워하지 않을까봐 더 동생을 챙겼는데, 동생은 사랑받은 건 다 까먹고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으니 참 어이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 이 글의 제목은 아마도 중의적인게 아닐까?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시대에 저 대사와 기껏 사랑줬더니 돌아온 동생의 대꾸에 대한 기막힘, 두 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병든 지인에 대한 글이다.

 

고생이든 가난이든 겪으면 된다. 하지만 있어줬으면 한다.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살아올 수 있었다. 가장 곤란할 때 나를 구해준 것은 저축이 아니었다. “괜찮아라는, 그 집 마루에서 당신이 해준 말이었다. 미치코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눈부신 인생의 사건은 없었을지 모른다.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만 겪으며 살아왔다. “괜찮아가 일천만, 일억의 저금보다 우리를 살려왔다.

 

우리의 인생에 뭐 그리 눈부신 일만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날들로 세월의 더께가 쌓여간다. 한 번씩 닥쳐오는 인생의 큰 파도는 겪어내면 된다. 그리고 괜찮아라는 한마디면 살아갈 수 있다. 누구는 돈이 최고라 하고, 누구는 건물을 가져야 최고라고들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저 있어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한다. 괜찮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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