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말을 하는 아빠가 있을까 싶지만 분명 있을 것이다. 자식을 패는 아빠가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있다. 10여 년 전, 그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 때였는데, 기역자로 꺽인 옆 동이었고, 우리 보다 한 층 아래 집이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을 아빠가 골프채를 휘두르며 때리고 아이는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체 초등학생이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저럴까?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고 아빠가 아들을 때리는 건 처음 본 충격으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장면이 끝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리적 폭행만 폭행이 아니다. 위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말로 상처를 주는 것도 폭행과 마찬가지다. 직접적 폭행의 상흔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져 사라지지만 언어폭행으로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문장대로 실현이 되는 저주받을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1등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던 <변신 인 서울>의 주인공 반희는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1등에서 2등으로 삐끗하고 내려왔다가 5등으로까지 떨어지게 된 반희는 1등을 한 수지에게 위해를 가한다. 수지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낄 짓을 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찍고, 수지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만든다. 아빠의 말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하는 친구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다. 그러나 반희는 자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런 짓까지 벌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되돌리기에 너무 멀리 와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반희는 토끼가 되기로 한다. 토끼가 되면 학교에 안 가도 되고 시험도 안 쳐도 되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수지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 반, 두려움도 반이다.
그런데! 시험날 아침 눈을 떠보니 토끼가 되어 있었다.
위 내용은 책의 줄거리라고 할 수 없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아니다. 토끼로 변해버린 반희의 기억 일부는 소실되었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른다. 친구의 문자나 전화 내용으로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유추해 본 것이다. 반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반희도 제 행동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토끼가 되고 싶어했는지 어쩐지도 모른다. 토끼로 변했으면 좋겠다는 반희의 무의식이 저렇게 만들었을거라고 예상한 것일 뿐이다.
<변신 인 서울>은 제목만 봐도 예측 가능하지만, 저자 한정영 작가도 작가의 말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 했다고 밝히고 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일어나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 벌레가 된 그가 환영받을 리가 없다. 회사 동료도, 가족도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소설은 사람이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한 개연성을 따질 틈도 없이 그레고르의 가족들에게 분개하게 만든다. 단순히 벌레라는 흉측한 외양 때문에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돈을 벌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돈을 벌어오니까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이다. 쓸모가 있을 때만 아들이고 오빠인데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으므로 가족들은 그를 방에 가둬둔채 즐거운 마음으로 피크닉을 떠났다.
<변신 인 서울>도 카프카의 <변신> 마지막과 같다. 반희네 가족들은 반희를 없는 존재 취급하며 소풍을 떠나고, 반희는 혼자 방에 남아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전히 토끼로 변한 꿈일거라고 생각도 한다. 방에서 나가기 위해 자해를 하다가 들리지 않지만 꺼내달라고 외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깨었지만 여전히 토끼였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카프카의 <변신> 첫문단과 같으며 벌레가 토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보다 훨씬 잔인하고 슬프다. 카프카는 돈을 벌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가치로 자본주의를 비판했지만 한정영 작가는 우리나라 10대의 존재가치는 단 하나, 성적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비판한다. 성적, 학교 등수로 존재 가치를 판별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살았고 그렇게 자란 10대가 어른이 되어도 이 시스템은 바뀌지 않고,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이 시스템 안에서 고통당하도록 그대로 두는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이상하다는 것은 알지만 아무도 나서서 바꾸려하지 않으니 모두의 암묵적 지지하에 시스템이 유지되는 중이다. 아이들조차 성적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인지하지 못한채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모든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반희가 저지른 행동과 마음은 정반대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기도 하지만 토끼가 되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반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고 학교도 가고 싶다. 십대의 특징인 흔들리는 감정과 유사하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하기 싫은 반면, 자신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1등을 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청소년 고민 상담의 1위가 이 내용이라고 하니 아이들에게 성적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성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만든 것도 어른들 탓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 너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아이의 성적 향상을 위해, 대입 정보를 얻으려고,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녔고, 아이의 자존감을 올리려면 어떻게 할지 전문가가 쓴 책에서 찾으려 했다.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은 그런 헛수고 대신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소설 속 반희의 부모를 보며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부모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 자식이 1등하기를 강요하고, 공부를 못하면 투명인간 취급했던 자신의 모습을 책에서 확인하며 부끄러워하길 바란다.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한 존재임을 제발 깨닫길 바란다. 자식은 성적을 잘 받아오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란 것도.
나는 반희 엄마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반희의 방에서 발견된 토끼가 반희일 거라고 짐작한 이후 그의 행동은 정말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엔 누나 반지가 반희의 방으로 들어가려하자 이제 토끼 없다며, 제 집으로 갔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반지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뻔히 눈뜨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반희의 심정에 감정이입 되었다. 성적 하워권 아이들이 학교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싶다. 아이에겐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공부에 목숨 거는 가식적 행동을 하는 엄마들이 이 책을 읽고 아래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