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다산책방 테마소설
최민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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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우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우울하다고해서 모두 우울증인 것은 아니다. 우울한 마음이 들 때, 혹은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공통적으로는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다고 한다. 마음의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은 일견 손쉽게 치료될 것 같은 한편 자살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간단히 치료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는 해도 죽고 싶은 심정을 호소할 때 누군가 위로해주거나 아니 그 심정을 들어주기만 했다면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없고 지인 중에 우울증 환자도 없어서 그에 대해서는 미디어를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접할 뿐이었다. 이번에 다산북스에서 출간된 멜랑콜리를 테마로 한 소설집, <보라색 사과의 마음>을 읽고 우울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신진작가 6명의 단편소설을 묶은 단편집이다. 혹 우울한 상태이거나 본인과 유사한 상황을 이 책에서 접한다면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편의 소설들은 각기 다른 우울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상실 때문에 아픔을 겪는 소설이 여러 편 된다. 표제작 <보라색 사과의 마음>은 여동생을 잃은 언니가, <그 다음에 잃게 되는 것>에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눈빛이 없어>는 직장동료를 잃은 발전소 직원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제 각기 다른 연유로 잃었어도 이 세상의 상실은 한결같이 슬프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 경중의 무게를 비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가 읽는다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황을 통해 주위 사람들을 이해하는데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주위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른다. 누군가와 같은 일을 동시에 겪었다 해도, 비록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고 해도 각자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누군가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물며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일을 겪은 이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말은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공감한다는 말은 또 어떤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모르지만 나라면 이러할 것 같다! 아니, 이러할 것이 분명하다!며 자의적으로 상대방을 해석한다. 그러니 난 너를 이해한다며 손을 다독이거나 등을 쓸어내리는 것조차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6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명징하게 깨달았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처럼 자기중심적인 말이 없다는 것을. 그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라색 사과의 마음>에 나오는 것처럼, 어릴 적부터 잘 익은 사과를 보라색, 덜 익은 사과를 회색으로 보아온 사람이라 해도 교육받은대로 사과를 빨간색과 녹색이라고 표현하고 산다는 것이다. 타인의 감각영역이 어떠한지 우리는 도통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은영은 동생 은주의 사망 장소를 애써 외면했는데 책 번역을 계기로 그곳을 찾아가 보게 된다. 동생이 그 장소에 왜 있어야만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건에 개입하게 되었을지를 가늠해 보아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이 소설에서 공감한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넘겨짚으며 살아온 게 아닐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혹은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겪은 것으로 상대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이러한 피드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며 나만의 각본대로 생각해왔으며 그것이 마치 정답인 것으로 여겨왔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저 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으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자위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본심을 모두 터놓고 말하며 살지는 않는다. 다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 서로가 자기 본위대로 해석해놓고 이해한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상대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어쩌면 순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과 연결되는 이야기는 <당신을 가늠하는 일>이었다. 미듬과 해운이 활자를 매개로 가까워진다는 부분이 좋았다. 마음에 드는 장면은 이 부분이었다.

 

p. 188

미듬은 해운의 저녁에 길들었다. 둘은 문장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해운은 한 달 내내 오후 4시의 희망을 읽어 내렸고 그 시를 완독한 날은 미듬의 어깨에 기대 울었다. 무엇이 그를 서럽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서투르게 연필로 그어진 문장이 그를 관통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문장을 나누는 사이라는 표현은 근래 읽은 문학적 표현 중 가장 설레었다. 책을 같이 읽는 사이라거나 시를 읽어주었다를 포괄하는 의미로 어쩜 이리 딱 들어맞으면서도 문학적일까. 난독증이 있는 해운이 기형도의 시를 한 달 내내 읽어낸 후 미듬의 어깨에 기대 울었다! 그 울음의 의미를 알 듯 말 듯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표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처럼 해운이 서러운 이유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서투르게 연필로 그어진 문장이 그를 관통했다는 문장은 공감을 의미함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을 가늠하는 일이 어려워도 사소한 지점에서 아주 작게나마 공감했다면, 이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써도 되지 않을까.

 

다른 소설들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 두 소설은 멜랑콜리라는 주제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 초점이 맞춰졌다. 작가의 의도는 달랐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해와 공감이라는 키워드가 크게 다가왔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던 터라 더욱 그러했던 모양이다.

 

마지막 소설 <눈빛이 없어>는 고 김용균 노동자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안타까운 사건을 소재로 다루었고 최근의 일이라 그것을 소환하게 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힘들었다. 화자 희곤이 현장 노동자였던 우재의 집에 세들어 살게 되면서 관찰자 입장에서 우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나 역시 관찰자가 되어 우재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던 만능 기술자 우재가 신입직원을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책임회피에 급급하는 회사측의 대응에 실망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사건 이후로 눈빛을 잃었다. 형형함이 사라진 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극적으로 회사생활을 했던 우재가 동료를 잃고 눈빛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은 분명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다산북스의 완독이 프로젝트로 받아서 읽게 된 소설 <보라색 사과의 마음>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을 해체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6편의 소설이 마냥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아니었다. 등장인물들의 불편한 상황들 속에 들어가 보는 일은 대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꿈이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허나 직접 겪어보지 못할 일들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만나면서 앞으로 주위 사람들의 이해 못할 행동들에 대해 이전보다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접근을 할 수 있으리라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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