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의 목격자 - 한국전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 전기
앙투아네트 메이 지음, 손희경 옮김 / 생각의힘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종군기자라는 단어는 내게 직업으로 다가오기보다 왠지 모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쳇말로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마냥 멋지게 들린다는 뜻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맥락없는 느낌의 근거는 어디서 온걸까 생각해봤더니 헤밍웨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것도 참 근거없긴 매한가지인 것이, 그저 내가 아는 종군기자가 달랑 헤밍웨이 한명뿐이라 그런것이란 생각이 드니 좀 부끄럽긴 하다. 그런데 한국정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라는 이름을 봤을 땐 깜짝 놀랐다. 아니, 한국전쟁에 여자 종군기자가 왔었다고? 1950년에 여자가 종군기자로 올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한 번 더 놀랐다. 무슨 영화배우인줄 알았다. ‘아, 책 표지를 옛날 영화에서 가져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거리트 히긴스’ 본인의 사진이었다. 저런 얼굴로 그런 험한 일을 했다고?

과연 마거리트 히긴스의 전기 <전쟁의 목격자>를 읽어보니 그녀는 내 선입견과 유사한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살았다. 그 시선 안에는 부러움과 질투, 관심과 유혹이 공존했다. 그런 시선을 받을 만큼 그녀는 충분히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더해 지성도 겸비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기필코 얻어내고야마는 집념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난 그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이 책은 작가 앙투아네트 메이가 쓴 그녀의 전기이다. 70여 년 전에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했다는 이력보다 책표지의 외모에 끌릴 수밖에 없는 이 외모지상주의적 시각을 탓하며 표지를 넘겼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920년 9월 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1차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었고 어머니와 파리의 공습대피소에서 만났다는 것이 그녀의 운명의 시작이었던 게 아닐까싶다. 그녀는 홍콩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생후 6개월부터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 역시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될 두 번째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부모가 미국 오클랜드의 섀벗코트라는 곳에 정착했고 마거리트는 그 동네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시기어린 눈총을 받았다. UCLA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서 기자로 입사하게 될 때까지 닥쳤던 여러 난관들을 그녀는 깔끔하게 클리어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일등공신은 그녀의 외모와 직진하는 그녀의 성격 덕분이었다.
UCLA의 동문 ‘버딘 프랭클’의 증언을 보면 그녀의 매력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p.58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매기(마거리트의 애칭)는 늘 리더였는데 부드럽고 조용한 방식으로 권력을 손에 쥐었어요.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언제 끝낼지 결정하는 것은 그녀였어요. 대체로 매기가 매력을 발산하면 사람들은 그게 자기에게도 유리하거나 심지어 원래 자기 아이디어였다고 확신했어요. 매기에게는 귀엽고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지 대단히 유혹적이었어요. 1950년대 후반에 브리지트 바르도가 무척 인기 있었을 때, 난 대학 시절의 매기 생각이 자주 났어요.”
또한 그녀의 추진력은 컬럼비아대학의 저널리즘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는 과정을 무용담처럼 말했던 칼 애커먼 학장의 입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대학원의 여성정원이 모두 찼다고 규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끈질기게 학장에게 요구했고, 그는 결국 여성학생처장을 설득하면 수락하겠다고 하자 기어코 그것까지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나흘 안에 추천서 다섯 통을 첨부한 고등학교와 대학교 성적표를 제출하라고 했다. 40년대에 서부에서 동부까지 그 서류들을 어떻게 다 보낸단 말인가? 그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항공우편으로 받아냈고 학비까지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끝내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 후 마거리트는 “트리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전 세계의 전장을 누비게 된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폭력성을 목도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군인도 종군기자도 남자뿐인 전장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p. 130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마거리트는 종종 외로웠다. 그녀의 빼어난 외모는 때로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여러 파티에서 모욕적인 희롱을 당한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성기자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동지애에서 배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놀랐다. 재능과 용기를 갖춘 여성은 남성 기자들이 보기에 기자로서의 역량뿐만 아니라 남성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예쁘장한 금발 미녀의 외양 뒤에 지칠 줄 모르는 경쟁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그들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했다.
다음은 <라이프>지의 ‘칼 마이댄스’의 평가다.
p.254
남성저널리스트들은 언제나 서로를 비판했어요. 보도에서 부정직하거나 게으르거나 어쩌면 알코올의존증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자가 여러 사람과 자고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혹평을 받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매기를 향해서는 끊임없이 퍼부어졌던 비난이지요. 남자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는 고려할 만한 가치조차 없던 문제가 여성을 묘사할 때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보도를 자기들만의 특권적인 영역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영지인 전쟁에 침범한 여성이 남자와 동등한 재능을 갖추었고 때로 더욱 용감하다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건 품위있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죠. 예전 도쿄에서 있었던 칵테일파티에서 매기는 매혹적이고 여성스러웠으며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전선에서 그녀는 전적으로 일에만 몰두했어요. 그녀는 체제, 그러니까 군대라는 남성들의 세계와 전투를 치러야 했던 직업 무대에서는 아주 냉철했습니다. 남자였다면 존경받았을 경쟁심과 결단력 같은 바로 그 자질 때문에 남자들은 매기를 괘씸하게 생각했어요. 그들은 매기의 도덕관념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이 느끼는 괘씸한 마음을 표출했죠.
마거리트는 종군기자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일해야 했고 한편 여성으로서 남성과 총성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여성이기에 치러야만 했던 이 이중고에 대해 그리 불만스러워하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시각이 그러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자신의 상황에 대해 투덜거리기보다는 자기 앞에 주어진 덤불을 하나하나 헤치며 앞으로 그저 앞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과 폴란드 러시아등 유럽 각지를 누비며 <트리뷴>의 베를린 지국장으로 근무하던 그녀는 1950년 4월 도쿄에 도착한다. 그녀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한국은 여자가 갈 곳이 아니라며 만류했지만 그의 동료 ‘키스 비치’는 “그녀라면 괜찮아.”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인정받는 종군기자가 되어 있었으며 한국전쟁 최초의 여성종군기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그녀는 일반 병사들과 같이 잠들었고 몇 주간 씻지도 못하고 같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장을 누볐으며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에도 함께 했다. 한국의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p.204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한국과 자유 한국 사이의 경계선이 되어 버린 위도 38도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 위도선은 일본 전쟁 포로들을 나누는 문제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미국과 러시아가 임의대로 선택한 것이다. 합의에 따르면 위도선 위쪽에서 항복한 모든 일본인은 소련의 포로가 되고, 위도선 아래쪽에서 항복한 일본인은 미국의 전쟁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연립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게 러시아와 미국 양쪽 모두에게 분명해졌을 때, 이 위도선은 총과 철조망이 빼곡한 영구적인 장벽으로 변했다.
당시에 이미 그녀는 객관적 상황을 토대로 이런 시각을 표현했는데 우리는 오랜 시간 장막에 가려져있다시피 했고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팩트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학교에선 물론 반공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전반에 가득 찬 반공이데올로기는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라는 정설을 의심할 여지없이 살아왔다. 물론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도 많으며 학교교육현장에서도 특별히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설득력 있는 칼럼을 썼던 마거리트는 해외 취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것으로 확인 가능하지만 그녀의 저널리즘에 대한 긍정적 평가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p.290
“한국의 정치 행위를 바라보는 매기의 견해는 그 솔직함, 우리 다수가 강하게 느끼면서도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단순한 표현, 전장의 비극과 거기에 밀접히 관계된 사람들의 행태에서 관찰되는 희극사이를 오가는 완급 조절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 그녀의 글은 짧은 문장에서도 상황을 풍부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듯하다. 전투중인 병사들에 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그녀는 풍자를 잊지 않고, 관찰한 것들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널리 인용될 만한 진실한 울림을 담고 있다.”
육군성의 정치역사학자 S,L.A. 마셜의 평가다.
그녀에 대해 다르게 평가한 종군기자도 있다.
“그녀의 에너지와 무모함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했죠.”
그러나 마거리트는 자신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총에 맞을까봐 걱정해서는 결코 기사를 따낼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막무가내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몸 사리지 않고 다른 누구보다 맨 앞에 서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생애를 읽으면서 놀랍고 존경스런 마음이 솟아오르는 한편 안쓰러운 마음도 절로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그러나 그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마거리트는 자신의 외모적 매력을 십분 활용했으며 그에 더해 일적인 능력도 최대치를 끌어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거의 모두 사용해서였을까? 그녀는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도 하고 남매를 낳고, 각계 유명 인사들과 인터뷰도 하며 인기 칼럼니스트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베트남에 다녀온 후 희귀한 열대성 질환으로 1966년 1월 3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마거리트는 죽음의 손길에서 여러 번 비껴간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자신과 함께했던 행운에 대해 1955년 자서전 <뉴스는 둘도 없는 것>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p.286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주위를 둘러싼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살아남는 경이를 전달 할 수 없다. 운명, 숙명, 천명... 무엇이라 하든, 나는 한국에서 내게 할당된 몫 이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마 내가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온 직후에 자주 행운이 따르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외조부가 베트남에서 얻은 열대성 열병으로 사망했고, 그녀가 생후 6개월만에 여행을 갔던 곳도 베트남이었으며, 그녀의 마지막 취재지와 열대성 질환을 얻어온 곳 역시 베트남이었다. 이거야말로 운명인건지, 신기한 반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전 종군기자로서 마거리트 히긴스의 활약상이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전기이다보니 한국전쟁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지 않는 게 당연했고 오히려 그녀의 전 생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외모때문에 능력이 가려지는, 그렇고 그런 뻔한 여성으로 사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전장에서 활약했던 마거리트 히긴스의 생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