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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 삶, 용기 그리고 밀림에서 내가 배운 것들
율리아네 쾨프케 지음, 김효정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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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추락해 밀림에 떨어졌다.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으나 비행기 잔해는 흩어져 찾을 수 없고 단 한명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1일 후 탑승객 중 한명이었던 열일곱살 소녀만 혼자 살아 돌아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재난영화의 시놉시스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상황!
1971년 크리스마스이브, 페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거의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사고에 대해 처음 듣는다면 영화 같은 일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도저히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저런 사고보다 더 기막힌 사고들을 많이 봐왔기에 놀라움의 강도가 떨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비행기 추락사고에서는 기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생존자가 있었다. ‘율리아네 쾨프케’라는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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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는 그녀가 사고 발생 40주년을 맞아 2011년에 펴낸 책을 흐름출판에서 번역 출간한 것이다. 직접 겪은 사건이니만큼 그녀의 생생한 상황 묘사와 큰 사건을 이겨낸 의지와 용기, 그리고 부모님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이 책이 만약 이런 면만 부각되었다면 단순한 수기에 그쳤을 것이나 그에 못지않게 독자에게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만만치 않다.
50년이나 지난 사건을 상기시켜 가닿은 이 책의 세계관은 언론문제와 환경문제이다. 재난사건의 생존자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와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작금의 우리 현실과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환경문제는 주된 의제로 다뤄지지조차 않는 지구와 생명에 대한 근본적 질문도 던지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이 단순히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인간승리에만 초점을 맞춰 자기계발서류의 독서용으로 다뤄지지 않길 바란다.
그럼 사고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보자.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것이다. 비행기에서 추락해 살아난 것도 신기한데 대체 밀림에서 소녀 혼자 어떻게 버텼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율리아네 부모님이 동물생태학자였고, 페루의 다우림(‘정글’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는 ‘다우림’으로 표기)에서 연구를 했고, 그녀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로빈슨 크루소처럼 과일 따먹고 사냥하고 뗏목 만들어 강을 건너고 그랬던 건 아니다.
당시 그곳은 우기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없었고 먹을 거라곤 비행기에서 추락할 때 있었던 사탕 몇 개가 전부였다. 재규어나 악어의 위협을 견뎌야했고, 오만가지 종류의 벌레들이 공격해 와서 밤에는 잠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낮엔 강 속에 들어가 헤엄쳐(아니 둥둥 떠서 이동하는 것에 가까운) 이동하고 밤엔 뭍으로 나와 눈을 붙였다. 강 하류쪽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알려준 지침 덕분이었다.
"밀림 속에서 길을 잃으면 흐르는 물을 찾아서 따라가야 해. 그러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올거야.."
배고픔과 맹수, 벌레의 공격도 힘들었만 팔에 생긴 구더기가 계속 번식하고 살을 파고 들어가는 고통도 힘들었다. 키우던 개의 다리에 생겼던 동일한 일을 떠올려 등유를 부으면 구더기들이 빠져나온다는 게 생각났지만 석유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런데 10일째 되던 날, 기적처럼 빈 배와 오두막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곳에 들어가 구더기들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p.161
힘이 없어서 통 뚜껑을 돌려 열기까지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통 옆에서 발견한 작은 호스 토막으로 가솔린을 빨아들여 상처에 똑똑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팔 속의 구더기들이 아래쪽으로 달아나려고 살을 더 깊이 파먹는지 죽을 듯이 아팠다. 하지만 결국에는 표면으로 올라왔다. 펼친 반지로 상처에서 서른 마리 정도의 구더기를 꺼내고 나서 나는 기진맥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절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지만 당장은 내가 해낸 일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후 전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 했고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율리아네를 끈질기게 쫓아다녀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다. 그녀는 페루에서 대입시험을 치고 싶었으나 아빠가 독일로 보내게 된 결정적 사건이 결국 일어났다. 친구의 권유로 수영장에 갔다가 나오는 순간 들이닥친 기자들과 원치 않는 인터뷰를 당했던 것이 저녁 뉴스에 방송되어 아빠가 보게 된다. 자신의 딸이 비키니 차림으로 그네에 앉아 카메라를 향해 미소지으며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온 세상에 떠벌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너는 네 엄마를 그런 식으로 애도하는구나.”
라는 아빠의 한마디는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는 엄마와 같이 탄 비행기에서 혼자만 살아돌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빠와 계속 서먹한 관계였다. 게다가 아빠가 타지 말라고 했던 항공사 비행기를 탄 것도 자신 탓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페루를 떠나기 싫었다. 부모님이 독일인이어도 자신의 고향은 페루였고, 또 밀림 팡구아나였다. 결과론적으로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었고 아빠의 권유로 박쥐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쓰려고 마음 먹으면서 고향 같은 그 곳, 팡구아나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이 동물학자로 성장하게 된 것도, 일반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 부모님의 지대한 영향 덕분이었다. 특히 그녀의 아빠가 2차대전 후 독일에서 대서양을 건너 남미까지 가게 된 여정은 인간승리의 표본을 보여준다. 페루의 한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2년 반 만에 그곳에 도착한 것이었으니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긴 여정이었겠는가. 그 때의 이야기해주면서 아빠는 율리아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뭔가를 이루겠다고 정말로 굳게 결심하면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어.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돼. 율리아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모든 발걸음은 부모님의 유산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긴 과정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
율리아네는 독일에서 대학을 마친 후 아빠가 계신 페루의 팡구아나에서 나비에 관한 연구로 논문도 쓰고 실질적으로 동물학자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드디어 부모님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그녀에겐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318
사고 후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운 것은 바로 이 밀림, 이 숲의 은밀한 영혼이다. 그것은 1년 반에 걸친 연구 과제를 진행중인 지금에야 내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나는 추락 사고후 비가 쏟아지는 밀림에서 절망에 빠진 채 한없이 외로운 밤을 보내던 시간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내 삶을 자연과 인간을 섬기는 의미 있는 대의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연구기지에 돌아와 부모님 없이 내 스스로 부여한 연구 과제를 완수하자. 갑자기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나의 임무에는 이름이 있다. 바로 팡구아나라는 이름이다.
밀림지역이 없는 곳에 사는 우리는 열대우림의 황폐화와 지구온난화의 상관관계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환경교과서에나 나올 정도로 치부하며 관심도가 떨어진다. 그러나 분명 지구 생태는 변하고 있고, 같은 장소를 두고도 개발하려는 이와 보존하려는 이가 공존한다. 기적과 같은 삶을 살게 된 이 책의 주인공이 전하는 남미 어딘가의 생태이야기가 과연 우리와 별 상관없는 이야기기일까 한번 곱씹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미디어에서 다루는 제목들도 밀림을 녹색지옥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마뜩찮다. 그곳은 녹색지옥이 아니라 인간이 감히 다 알 수 없는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이 온존하는 곳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반의 반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그곳을 지키려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된 데는 부모님과 비행기 추락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지만, 독일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도 한 몫했다. 그녀에게 그 사건과 팡구아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고 연락이 왔고 고심 끝에 그녀는 결정했다. 그래서 이 책도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은 2011년 율리아네가 56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팡구아나를 남편과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1971년, 사건 현장으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또다시 사고 후로, 시점이 순차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현재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과거 겪어내야 했던 힘겨운 시간들이 순간 이동하지만 읽어내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라 부르는 팡구아나를 지키는 일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모든 것은 이 밀림에서 시작됐다. 생사를 건 기나긴 여정 중에 나는 만물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어떤 것도, 어떤 생명도 그냥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때 이후로 나는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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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추락사건의 단 한명의 생존자라는 선정적 소개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사고로 이끌어주었다. 특히 그 사건을 보도하고 파파라치처럼 그녀의 뒤를 쫓는 미디어의 태도는 지금이나 50년 전이나 비슷하구나 싶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질 낮은 기사, 왜곡을 넘어 거짓 기사를 토사물처럼 뱉아내는 언론들을 보니 그런 것은 미디어의 더러운 본성인가 싶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레기들처럼 말이다. 언론 뿐아니라 일반인들도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세계 도처에서 답지하는 편지들 중 그녀를 응원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가당찮은 음로론부터 비난과 혐오까지. 사람이 사람에게, 그것도 험한 일 겪은 소녀에게 그렇게 가혹한 손가락질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다. 이 부분에서는 한국의 일베집단이 떠올랐다. 아니 일베까지 갈 것도 없이 검찰의 받아쓰기만을 하는 언론의 말을 진실로 믿고 일가족을 난도질하는데에 가담하는 사람들과 뭐가 다를까.
힘든 시간들을 견뎌내고 동물학자가 된 율리아네 쾨프케의 용기있는 삶에 경외를 표한다. 팡구아나를 지키려고 하는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다우림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나라의 환경과 생태를 지키는 누군가의 행보를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 혹은 그녀의 삶을 알게된 이들에게, 그녀의 발걸음이 다른 걸음걸음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