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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선옥 작가 소설을 읽은 적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안다고 읽었다고 생각하다니...
그렇다.
이번 소설집 <은주의 영화>로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이다. 창비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았다.
전남 곡성이 고향인 작가의 사투리가 판소리처럼 리듬감있게 등장인물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없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시간적 배경은 다른데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속에 있다. 그나마 가까운 것이 쌍용차 사태가 배경인 <설운 사나이>다.
운을 뗐으니 <설운 사나이>를 먼저 보자. 영화배우 이영애와 같은 이름의 여자주인공은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고, 손님으로 오던 근처 초등학교 선생 이강호 덕분에 책을 읽는 맛에 빠지게 된다. 일주일에 하루 노는 일요일을 뒹굴거리던 그녀에게 독서라는 취미가 생겼고 이강호에게 설레는 마음이 생겨나던 차에 홀아비 차우진을 소개받는다. 그와 데이트를 하면서 이강호와 비교하게 되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그에게 더이상 호감이 가질 않아 그만 만나자고 한다. 그녀에겐 영혼의 밥인 책을 읽고 정신적으로 통하는 대화를 나눌 상대로 이강호가 적격이지 차우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나 차우진이 투쟁하느라 공장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그의 아들 두리를 통해 알게 되면서 그녀의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이강호와의 통화에서 그를 향한 믿음은 얼음장 깨지듯 쩍 갈라져 버린다.
그는 책을 가지고 고상하게, 수준높은 어휘를 구사하지만 사회문제에는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백면서생이고 다르게 말하면 책에 갇힌 개구리인 셈이다.
영혼의 밥을 사랑이라고 말했던 차우진이 하는 투쟁은 진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독서나 음악을 듣는 문화생활 대신 그 시간에 술 마시러 간다는 그의 말에 실망했던 이영애는, "사는게 이케 서룹다"는 차우진 노모의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소설은 그 말을 뒤로 하고 끝났다. 아빠에게 물을 가져다 준다며,
"나도 배고픈데 울 아빠도 디게 목마르고 배고프겠다"는 두리의 말에 우두망찰했음에 틀림없다. 아버지라서 그렇겠지만 저렇게 어린 아이도 공감능력이 있는데, 선생이고 책을 많이 읽는 이강호는 어떤가? 코옆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마도 두리와 노모와 함께 현장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 주위에 많은 이강호들이 있을 것이다. 나또한 그러하다.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나서서 행동하진 못하지만 큰권력앞에 힘들게 투쟁하는 단체나 내대신 적극행동을 하는 곳에 정기후원을 하는 정도로 면죄부를 주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면죄부가 무관심을 촉발하고 있는게 아닌가 돌아본다. 책은 많이 읽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관심과 공감을 주어야 할 대상을 모륻척하고 살고 있는게 아닌가. 가족에게도,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멀리 있는 북극곰에게도...
소설이 8편이나 실린 책인데 한 편으로 너무 길게 썼다.
<은주의 영화>는 영화를 찍고싶은 취준생 은주의 카메라에 투영된 이모 상희와 철규모친 박선자씨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5.18 당시 직접적 피해는 없었으나 다리를 절게 된 이모, 아들 철규를 잃은 박선자씨 둘은 모두 여성이고 피해자이자 약자이다. 보상을 받을 수 있는 5.18의 직접피해자는 아니어도 그 사건은 어떤 형태로든 그곳에 살았던 약자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자신의 숨겨두었던 비밀스런 고통을 은주의 카메라에 대고 풀어내며 그들은 후련함을 느낀다. 그 행위는 카메라앞이었기에 가능했고 영화라는 매체가 담아낼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5.18을 소재로한 책이나 소설을 접하면서 피해당사자와 가해자에 천착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달았다. 이 소설이 다루는 인물들을 통해 낯설게 보기의 경험이 가능했고, 큰 사건 주변에 오히려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 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유효한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공선옥 소설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소설들이 지금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 가닿아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까. 말을 걸 수나 있을까? 혹은 누가 이 소설들에 말을 걸어오기나 할까? 소설이라는 물건이 세상에 의미가 있기는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러하다.
"네, 작가님! 충분히 의미 있어요! 작가님의 소설은 제게 말을 걸어주었고요, 저는 답하고 싶은, 더 이야기 나누고픈 맘이 생겼어요. 등장인물들의 삶을 보며 맘 아팠고요, 그들 하나하나에게 눈맞추고 공감하고 싶어요. 소설 밖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더 관심 가지며 살게요. 마지막에 계속 소설을 쓸 거라는 다짐을 응원하고 기다릴게요."
감히 내가 뭐라고 작가를 응원한다는 어쭙잖은 멘트를 날리는가??
글을 쓰는 이 시간이 야밤이라서 이러는 거라고 눙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