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 강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1. 어쨌거나 난 법학에 질려버렸고, 철학으로 방향 전환을 했어요. (21면)




2. 둘째 해에는 정말로 그랬어요.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거죠. 거기다 무엇보다도, 떠나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어요. (28, 29면)




3. 나는 마르크스를 읽고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고, 그 계시의 충격에 휩싸여 있었지요. (29면)




4.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내가 사회당의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30면)




5. 난 민족학자ethnologue가 되고 싶어했지요. 그런데 당시로선 사회학과 민족학 사이의 경계에 작은 구멍들이 많이 나 있었어요. (31면)




6. 유년기 이래로 나는 이국적인 것에 관한 호기심이 대단했어요. 조금씩 저축해놓은 돈을 골동품을 사는 데 써버리곤 했죠. 이러한 기질적인 요인 이외에도, 1930년경 민족학이라 명명된 학문 분야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학문이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하기를 갈망하고 있음이 신진 철학자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31면)




7. 게다가 나는 그와 함께든 다른 이들과 함께든 내가 유능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난 감히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에 가서 청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대단한 장소라고, 나보다 실력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33면)




8. 학생들은 지식에 대한 엄청난 갈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모든 주제의 책을 탐독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차, 삼차 자료들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었죠. 우리의 임무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그들에게 지적인 훈련을 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35, 36면)




9. 나는 현장 연구가가 아니었던 뒤르켐에 대해 반란을 꾀하는 민족학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현장 민족학을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을 통해서 발견하고 있었죠. 그러니 나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거지요. 내가 부름 받은 것은 한편으론 프랑스의 영향력과 다른 한편으론 콩트-뒤르켐의 전통을 영속화시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내 자신은 앵글로색슨의 영향 아래에서 민족학에 끌리고 있었으니,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던 겁니다. (37면)




10. 지적으로 엄청난 흥분 상태에 있었죠. 16세기 초창기 탐험가들의 모험을 다시 체험하는 기분이었어요. 나로서는 신세계Nouveau Monde를 발견한 셈이었습니다. (38면)




11. 그렇기 합니다. 하지만 그건 보잘것없는 내 재능 때문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었죠. 미국의 민족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니 다른 지역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남반구 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내 작업이 때를 잘 만난 셈이었지요. (43면)




12. 하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으로 볼 때, 더 이상 대학 교수가 될 희망이 없다고 확신하고 나니, 내 머리에 떠올랐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보자는 계획이 생겨났어요. (96면)




13. ‘슬픈 열대’를 집필한다는 것이 학문에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그 책은 최초한 초판에서는 조잡한 오류투성이였습니다. (97면)




14. 당시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의 종합이면서 동시에 내가 믿었던 모든 것 혹은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의 종합이지요. (98면)




15. 최초의 교수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마르셀 모스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가 담당한 강좌명은 ‘사회학’이었지만 사실상 인류학적인 것이었지요. (102면)




16. 난 미국의 ‘미국인류학자’ 혹은 영국의 ‘인간’에 해당하는 잡지가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107면)




17. 나는 우리와는 매우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경험을 연구하기를 원했어요. 이는 오직 우리 문화에만, 그것도 과거에만 관심을 기울인 푸코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죠. (117면)




18.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무규율의 정신으로 기울 수 있지요. 정확하고 규칙적인 의무들은 질색입니다. 프로그램에 따르고, 시험을 치르고,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등의 일 말이죠(가끔씩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요). 콜레주의 교수에게는 해마다 새로운 주제의 강의를 하는 의무 이외의 의무는 없습니다. (123면)




19.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콜레주 건물에 사회인류학연구소를 창설한 일일 것입니다. (124면)




20. 그는 서양 문명의 절대적 우월성을 내세웠고, 나의 상대주의를 비난했어요. 짐작하겠죠. 내 대답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아카데미에 지원했을 때 그는 나보다 2년 앞서 입회해 있었죠. 그가 날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난 감동을 받았지요. (137, 138면)




21. 오히려 민족학적 기질, 심지어는 고고학적 기질을 갖고 있는 편입니다. 그 때문에 내가 한국을 두루 돌아다닐 때 동행했던,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이던 학생들이 내게 불만을 품었지요. 그들이 서로 이런 말을 나누었다고 누가 내게 전해주더군요. “저 레비스트로스란 사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는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옳았어요. (144면)




22.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당신은 네 권의 ‘신화론’을 발간했죠. ... 그땐 매일 아침 다섯시나 여섯시에 일어나고, 주말이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진정으로 작업했다고 할 수 있지요. (145면)




23. 당신은 연구실에서 조용히 연구하는 것이 신문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렇고말고요. (148면)




24. 내가 왜 그렇게 많은 작업을 했겠어요? 작업을 할 때면 난 불안한 순간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작업하지 않을 때면 우울한 권태에 휩싸이고, 내 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작업하는 삶이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는 해줍니다. (153면)




25.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로이트 사상이 나의 지적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와 동일한 정도의 역할을 했지요. 프로이트는 표면상 아무리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일지라도 합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169면)




26. 사르트르의 관점은, 자신들의 학문이 인간 정신의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들 중 하나라고 간주하는 인류학자들의 관점과는 상반된 것으로 보였어요. 한편 사르트르는 인류학을 싫어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인류학을 제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81면)




27. 거기서 사르트르는 민족학자들의 인류학과 철학적 인간학을 구분했습니다. 전자는 인간을 단지 객체로만 파악할 뿐이며, 후자는 사르트르 자신이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객체-주체로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182면)




28. 사르트르는 철학을 닫힌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투쟁을 제외하고, 그는 외부, 특히 과학 영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어요. 반면에 메를로퐁티는 과학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요. 그는 사르트르에게 결핍되어 있는 호기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85면)




29. 내가 사르트르를 비판한 것은 그가 역사에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 철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사실 역사보다도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어요. 그러한 열정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187면)




30.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가 역사를 무시한다고 비판할 때, 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를 무시하거나 역사에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 대신에 당신들 사고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대한 발전 법칙들을 설정하기 때문이오.” (195, 196면)




31. 변수와 매개 변수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신적인 오성만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항상 실수를 해요.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지요.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196면)




32. 그래서 나는 중앙 브라질의 신화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이들 인접 민족들의 신화들이 서로 일치하고, 서로 겹치고, 서로 화답하고 혹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한 민족의 신화를 분석해보면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의미론적 전염병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점점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앞이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넓게 펼쳐진 경치가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르도록 자극하고, 거기서 시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8, 199면)




33. 그 점을 분명히 해 둡시다. 수개월, 수년 혹은 수십 년을 하나의 민족만을 연구하는 데 헌신하는 민족학자들은 우리 모두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론을 만들어내려 할 때 발생합니다. 단일한 그리고 배타적인 경험을 기초로 하여 이론을 만드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수백 혹은 수천 가지 중에서 가능한 한 가지 경우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199면)




34. 우리가 그런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우리 문화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경우 가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판단하는 당사자의 기준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타문화와 구분되는 삶의 양식과 가치 체계를 지닌 문화에 소속되어 있기에, 나의 문화와 매우 다른 문화들이 자동적으로 내게 매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 민족학자로서 그런 문화들을 연구한다면 나는 최대한 공감하면서 객관적으로 연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들은 다른 문화들보다 내게 덜 어울립니다. (231면)




35. 가치와 삶의 방식이 자신의 공동체와 부딪히지 않는 공동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덜 우호적인 공동체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덜 우호적인 공동체와도 평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233면)




36. 단일 문화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한 사회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태초의 시간에서부터 모든 문화는 끊임없이 섞이고, 빌려오고, 혼합하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진행 속도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요. (233면)




37. 영국, 독일 등 모든 서양 사회는 불가능한 동화의 문제에 뚜렷이 직면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서양 사회에서도 문화들 사이의 공존은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234면)




38. 나는 사람들보다는 신앙, 관습, 제도에 더 관심이 많아요. 따라서 나는 현대 세계를 나누는 분쟁들과 동떨어져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소수 민족들을 옹호합니다. (234면)




39. 식민주의colonialisme는 서양이 저지른 큰 죄악입니다. ... 민족학이 식민주의의 보호 아래서 태어나고 발전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식민주의의 계획과는 달리, 심지어는 그 계획과 반대로 민족학자들은 여러 문화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기억을 잃어가는 신앙과 삶의 양식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35면)




40. 관찰하려면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235면)




41. 그 상황은 역사에 의해 탄생되고 실제로 복잡해진 상황들 중의 하나-다른 상황들도 있습니다-입니다. 법과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이름으로는 분명하게 위치시키기가 힘듭니다. (239면)




42.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아요. 안 그러면 독서할 시간이 없거든요. 신문은 읽습니다. 나는 정치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통해 교양인으로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해요. 나는 일간지 두 종과 주간지 세 종을 구독합니다. (241면)




43. 각 사회는 자신의 원칙과 가치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해줄 능력이 있을 때 유지됩니다. 어떤 사회가 아무것도 전달해줄 것이 없다고 느끼거나, 무엇을 전달해야 할지 더 이상 모른다거나, 다음 세대에 의지하게 되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244면)




44. 그 글에서 내가 제안한 것은,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 이래로 사람들이 해왔듯이 한 생명 종의 유일하고 특권적인 특성에 의거해서 인권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인권을 모든 종의 생물들의 권리 가운데 개별적인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권을 협소한 관념으로 이해할 때보다 더 넓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를 것이라고 나는 그 글에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역사적으로 스토아 철학과 연결되고,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극동의 철학들과도 연결되기 때문이지요. (249면)




45. 내가 이 ‘주체’ 논쟁에서 참기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철학 전통의 신봉자들이 보여주는 불관용입니다. 모든 것이 주체에서 시작되고, 온통 주체뿐이지요. 나는 사물과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으며, 사람들이 그러한 권리를 부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249면)




46. 왜냐하면 전통 철학이 독점권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전통 철학으로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공연히 싸워야 했지요. 전통 철학이 많은 접근 방식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분쟁은 사라집니다. (249, 250면)




47. 문화상대주의는 한 문화가 이 구분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에다 적용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반면에 각각의 문화는 자신의 문화 내에서는 우열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성원들은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이기 때문이지요. (252면)




48. 나와 루소의 관계는 애매합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나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루소를 읽노라면 나는 열광합니다. 나의 인식 속에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258면)




49. 그(제아미 모토기요)는 말하기를, 좋은 연기자가 되려면 관객이 연기자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죠. 그러면서 그는 ‘멀리서 본 시선’이란 표현을 사용했어요. 나는 그 표현이 자신의 사회를 바라보는 민족학자의 태도를 대단히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했어요. 민족학자 자신이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관찰자로서 그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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