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법이론
이상돈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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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이란 올바른 질서 또는 올바른 행동준칙(규범)을 말한다. 법조인들 사이에서 법인식(Rechtserkenntnis)은 흔히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올바른 질서 또는 행동준칙을 캐내는 사유활동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법적 실천은 자신들이 인식한 올바른 규범의 내용을 현실에 옮기는 사회적 행동이라고 본다. 이런 생각에서 법적 실천은 법인식 뒤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법은 인식에 앞서 이미 주어져 있는 실체가 아니며, 인식 또한 실천(사회적 행동)에 논리적으로 앞서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은 법의 재생산과정을 관찰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법은 의회의 법률제정, 행정관료와 법관의 법률적용, 법학자의 학설형성과 같이 법의 재생산구조 중심부에 속하는 행동들과 매스컴의 법에 대한 비평이나 사회단체의 입법 및 법률개정운동 그리고 시민의 반응 등과 같이 주변부에 위치하는 수많은 다양한 행동들 사이의 다양하고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이 상호작용의 과정은 올바른 질서 또는 행동준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 2면)




2. 그러나 이와 같은 전문성과 비전문성, 법과 정치의 ‘완전한’ 분리는 하나의 전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형성의 내부기제를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고, 그와 같이 통제되지 않은 영역에서 법조인들은 법인식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필요한 경우 때때로 실무 법조인이 아닌 법학자에 대하여도 감행된다. 법조인들이 법학자의 주장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강단법학’과 ‘아카데미즘’을 들먹거리는 것은 실무적인 법논리와 비판적 거리에 있는 법인식을 전문성을 가장한 사이비 법인식으로 몰아붙이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런 방편은 법조인들에게 돌아갈 법인식의 현실적인 수혜몫을 크게 만들기 위한 것일 듯 하다. (2, 3면)




3. 점점 더 세계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실무 개념은 1) 법조실무에 대한 비판지식(예: 판례평석과 새로운 법해석의 제안)의 생산이나 비평적 활동(예: 입법작업활동, 법개혁포럼의 수행), 2) 제도화되지 않은 권리의 발굴이나 신장에 이바지하는 지식의 개발(예: 법사회학, 법문학 등의 기초법학), 3) 초국가적인 법발전을 가져오는 다양한 법적 컨설팅(예: 다양한 유럽연합법과 관련된 저술과 자문) 등을 포함하여야 한다. (3면)




4. 법률가들은 법인식의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구분하거나 법과 정치를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 흔히 자신들이 전개한 법인식의 (순수)과학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서양의 근대과학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이래로 과학이 도덕뿐만 아니라 정치와도 날카롭게 구분되는 전문적 인식의 대표적인 생산기지로 인정받고 있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4면)




5. 그들의 의식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과학주의’(Szientistik) 또는 ‘실증주의’와 유사한 것이 만연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법은 인식활동에 앞서서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적 실체이며, 법인식은 바로 그러한 실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다. (4면)




6. 법인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과학주의적’ 또는 ‘실증주의적 법인식’이라 부를 수 있다. 한국의 법학자 대부분은 그들 스스로가 이런 과학주의적 법인식론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법인식론을 자신들의 전문성을 대변하는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학자와 법조인 모두에게 하나의 직업상식으로 인정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법률적 삼단논법은 바로 과학주의적 인식론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법관의 법률적용이란 법률에 담겨진 객관적 실체인 규범을 인식하고(법률해석), 소송절차에서 과거에 존재한 사건을 확정한 다음(사실인정), 인식된 법규범을 그 사건에 적용하는(사안의 법률로의 포섭) 논리적 추론과정이다. (4, 5면)




7. 이러한 법률적 삼단논법은 오늘날까지도 법조인을 양성하는 법과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실행하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의 방법론적 대전제를 이루고 있다. 법률적 삼단논법의 도그마 아래에서는 법률적용이 객관적, 과학적 인식이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법조인교육도 그러한 과학적 인식을 개발하는 전문과학 - 이를 법도그마틱(Rechtsdogmatik) 또는 법률해석학이라 부름 - 이 주도하게 된다. 이 전문과학은 주로 법률텍스트의 자연주의적 의미를 가능한 한 세밀한 형식적-언어논리적 명제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면)




8. 이런 직업적 사회화과정에는 현실사회에 대한 경험과학적-사회과학적 이론과 사회현실에 대한 다양한 정보의 습득 그리고 비판적 성찰의 과정이 대부분 배제된다. (5면)




9. 그런 정치적 사회화과정 속에서 성장한 법조인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정치적 무의식이다. ... 실무 법조인들은 자신들의 법인식이 오직 객관적-과학적 인식일 뿐이며 정치적 편가름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의 정치적 해결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에는 언제나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구호가 등장하곤 한다. 이 구호는 비정치적인 성격의 법적 정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법적 강제가 관철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힘있는 집단의 이익일 뿐이다. 만일 이 점이 사실이라면 과학주의적 법인식론에 빠진 법조인들은 힘있는 집단의 이익관철에 봉사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에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7면)




10.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법인식에 의한 법적 지식의 생산 그 자체가 정의의 기준을 새롭게 구성하고 사회형성과 변화에 대해 구성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 그러니까 법적 지식의 변증적 성격이 외면되고 만다. (8면)




11. 그들에게 자신의 규범적 판단(법적 지식)의 의미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 즉 실천적 인식관심이 없다. 인식활동에서 그들의 관심은 자신이 인식한 법(적 지식)이 일정한 사회문제의 해결이라는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 즉 기술적 인식관심으로 일차원화되어 버렸다. 기술적 인식관심에 의해 평면화되는 규범적, 실천적 판단과 주장(법적 지식의 재생산)은 독단적일 수 밖에 없다. 결과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법인식만이 권위를 누릴 뿐 그 인식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나 의미이해의 가능성은 알 바 아니기 때문이다. (8, 9면)




12. 해석학의 이해의 구조적 해곡 (1) 언어의 왜곡 ... 한국사회에서 언어가 실어나르는 해석학적 지식들은 비판적 성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회윤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권력을 재생산하는 의사소통적 교류가 아직도 전통적인 사회윤리로 채색되어 있음을 뜻한다. (10면)




12. 해석학적 이해의 구조적 해곡 (2) 체계의 왜곡 ... 두 번째 왜곡현상으로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언어가 법인식을 매개해주는 기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유자본주의단계에서 후기자본주의단계로 넘어올수록 욕구충족의 물적 조건인 재화의 창출과 분배는 - 경제체계, 보건체계, 교육체계, 교통체계, 환경관리체계 등과 같은 - 사회적 하부체계의 기능에 매달려 있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그러한 사회적 하부체계의 기능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라는 경제성과 효율성의 이념은 하나의 절대명령이 되고 만다. 이를 ‘체계의 절대명령’이라 한다. 이 명령은 한국에서도 의회, 행정관료, 법관, 법학자와 같은 법규범의 중심적인 재생산기구를 정복해가고 있다. (11면)




13. 법규범을 생산하는 공식적인 법인식이 시장매커니즘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법인식이 언어의 의미지평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시장매커니즘의 의사소통매체는 언어가 아니라 실제로는 권력과 자본이라는 비언어적-비규범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후기산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법인식의 현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법인식의 해석학적 지평 자체가 체계의 절대명령 앞에서 점차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학적 지평의 축소와 반비례하여 법인식이 권력과 자본이라는 지배매체에 복속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권력과 자본이 이데올로기적인 한 법인식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13면)




14. 이러한 이데올로기비판은 무엇보다도 공식적인 법의 재생산기구들이 자신들의 법인식활동에 대하여 반성적인 성찰을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또한 그런 성찰은 법인식주체들이 현재 터잡아 있는 권력에 대해 비판적 인식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13면)




15. 언어비판이 겨냥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욕구충족의 기회를 편파적으로 분배하는 편가름기능을 하거나 사회화된 욕구체계 자체에 대한 재해석, 즉 문화비판의 가능성을 막는 언어사용의 폐쇄적 경직성을 극복하는 데에 있다. (14면)




16. 제도비판은 법에 관한 의사소통적 교류를 왜곡시키는 모든 구조의 해체를 겨냥한다. (14면)




17. 모든 구조적 왜곡이 해체된 가운데 이루어지는 규범에 관한 의사소통적 교류는 ‘모든 개인들이 문제가 된 규범의 타당성에 대하여 주제설정, 의견개진, 정보화 및 근거제시를 공적인 대화마당에서 자유롭고 기회균등하게 할 수 있는 의사소통조건 속에서 상호이해(합의)를 도모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14면)




18. 이를 하버마스는 ‘합리적 대화’(rationaler Diskurs)라 부른다. 제도비판이란 바로 법에 관한 현실의 의사소통적 교류와 이상적인 합리적 대화 사이의 간극을 들추어 내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실천이다. 이 실천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시민사회에서 전개되는 비판과 토론에 의한 ‘계몽’의 형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15면)




19.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론을 개발한 70년대 초기에는 ‘이상적 대화상황’이란 개념을 즐겨 썼으나(예: Habermas, Vorstudien und Ergaengzungen zur Theorie der kommunikativen Handelns, 1984, 127쪽 아래) 형이상학 또는 허구라는 비판을 받은 후 이제는 주로 ‘합리적 대화’란 개념을 주로 사용한다(예: Habermas, Faktizitaet und Geltung, 1992, 138쪽 아래). (15면)




20. 한국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사회문화가 여전히 법에 관한 의사소통적 교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사회문화의 특징으로 형이상학적 사회윤리, 집단주의적 에토스, 직관과 정서적 판단이 중심인 인지메커니즘의 지배 등을 들 수 있다. ... 이런 의미의 전근대적 문화 속에서 진리와 윤리 그리고 법은 분화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가운데 법에 관한 의사소통적 교류는 주로 전통적인 사회윤리로 채색된다. 바로 여기에서 법인식의 자기성찰로서 언어비판과 제도비판이 한국사회에서 활성화되기 힘든 이유가 발견된다. (17면)




21. 후견주의적 성향이 커질수록 법에 관한 의사소통적 교류는 합리적 대화의 모습보다는 주인과 노예 사이에 일어나는 부양과 복종의 교환관계와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은 후기산업사회에서 개인들에게 제도비판의 역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뜻한다. (17, 18면)




22. 이러한 제도비판의 역량감소는 한국사회가 서양사회보다 더욱 심할 듯하다. 후기산업사회의 ‘국가적 후견주의’가 사회문화차원을 지배하는 전통사회의 ‘윤리적 후견주의’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증폭되기 때문이다. (19면)




23. 한국사회도 이미 계약론적 에토스의 법인식으로는 근대성기획을 더 이상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는 후기산업사회의 위기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회체계의 기능적 효율성이 법의 중심적인 카테고리로 자리잡아 간다는 점, 개인의 자율적 도덕의 이성 만으로는 홍수처럼 넘치는 수많은 법규범에 대해 충분히 정보화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개인은 법규범의 생존배려기능에 노예처럼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점 등과 같은 위기현상이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다. (21면)




24. 그 새로운 에토스는 비판적 인식관심에 기초한 언어비판과 제도비판이 겨냥하는 합리적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21면)




25. 현실의 법인식은 언제나 정치적 프로그램을 배후에 숨기고 있다. 여기서 법인식의 논리 속에 은폐되어 있는 정치적 프로그램의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하는 일이 법이론가에게 요구된다. (23면)




26. 현재 실무에서 과학주의 또는 실증주의적 법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는 두 곳이다. 법률해석과 관련된 ‘법리’나 ‘문리’ 또는 ‘법규정의 가능한 의미’라는 논증언어와 사실인정과 관련된 ‘실체적 진실’이란 논증언어이다. (26면)




27. 법률해석이 객체인식이라는 생각이 쫓는 실천적 목표는 ‘은폐’와 ‘책임회피’이다. 법률가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법률이해에 대한 실질적 근거를 드러내고 근거지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고 자신들의 법적 결정이 갖는 사회적-정치적 기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27면)




28. 이러한 주체-객체-인식모델은 사실인정에서(특히 형사소송에서) ‘실체적 진실’을 말할 때에도 전제되어 있다. ... 그러나 이런 사실인정의 이해도 하나의 전략이다. 실무 법조인이 인식한 사실이 실체적 진실임을 강조하면 할수록, 절차규정을 위배하거나 소송에서 등장한 정보(증거)를 잘못 사용한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인정의 사회적-정치적 기능이 더욱더 잘 은폐될 수 있기 때문이다. (27면)




29. 법조인들의 법인식이 순수과학적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실천 - 법적 지식의 변증적 성격 - 임을 자각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현재로서는 말행위이론(Theorie der Sprechakt, theory of speech act)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법관의 판결은 “일정한 명제내용이 (올바름을) 나는 주장한다” 식의 규범적 말행위로 보게 된다. 이처럼 법률적용을 객체인식이 아니라 규범적 말행위로 보게 되면 법률을 적용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인식이 어떤 존재론적 실체에 부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28면)




30. 특히 말행위에서 ‘주장한다’라는 실행적 부분(illokutionaerer teil)은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받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사회적 관계, 즉 그 말의 내용(명제적 부분, lokutionaerer Teil)을 올바른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사회적 긴장관계를 창설한다. (28면)




31. 규범적인 내용을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받는 사람에게 자기 말이 올바름을 승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말의 내용을 근거지어야 하고 그 말이 현실이 될 경우 가져올 사회적 현실(관계)의 변화에 대한 책임도 떠맡아야 한다. 이처럼 법률적용은 객체인식이 아니라 말행위로 파악할 경우에 법조인들은 자신의 법인식에 대한 근거지움의 의무와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8, 29면)




32. 그렇다고 규범적 말행위의 진리가능성을 포기해 버릴 수도 없다. 그런 진리무정부주의는 ‘규범’적 말행위와 근원적 모순을 갖기 때문이다. 제3의 길은 말놀이(Sprachspiel)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말의 사용은 일종의 놀이와 같다고 하다. 놀이에 일정한 규칙이 있듯이 말놀이에도 규칙이 있다. 그리고 말놀이에서 한 단어가 적용되는 대상들 사이에는 ‘존재론적 공통성’은 없고(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연주의적 의미론이나 실재론에 다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들 얼굴에 나타나는 유사성(Familienaehnlichkeit, family resemblance)과 같은 것만 있다고 한다(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유명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법인식활동으로서 규범적 말행위도 (법률)말행위에 ‘참여’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법조인의 실천문제는 이론과 분리된 개인의 실존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구성적 요소가 됨을 알 수 있다. 참여는 곧 사회적 행동이며 실천이기 때문이다. (29, 30면)




33. 법인식은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재화분배방식의 이데올로기성을 극복하려는 인식관심에 이끌린 채 법률단어의 사용규칙(법률말놀이)을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하고 따르는 참여(실천)이다. (31면)




34. 법률말놀이의 구성적 참여란 ‘사안들 사이의 유사성’을 창출하고 변화시키는 활동을 뜻한다. (31면)




35. 우리 실무에서 법인식의 자기성찰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논증의무가 충실하게 이행되지 않거나, 더 나아가 많은 경우 아예 이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논증의무의 불이행, 철저하게 감춰진 법인식의 선이해 - 이것은 한국 법실무에서 법인식의 (비판적) 해석학적 지평을 축소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32, 33면)




36. 사실인정은 객체인식이 아니라 마당적 이해의 내용을 명제로 하여 그 명제의 올바름을 주장하는 말행위이다. (34면)




37. 마당놀이에서 심미적 체험의 일회성과 무규칙성을 표현하는 제도가 바로 자유심증주의이다. 자유심증주의는 규칙이 없고, 일회적인 정보의 활용이 법관 개인의 자유판단사항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제도인 것이다. (35면)




38. 지속적인 비판만이 법인식의 현실을 변화시킨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롭고 기회균등한 비판과 토론의 가능성, 즉 공적인 대화마당이 모든 법과 사회제도에 구조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38면)




39. 법률적 삼단논법의 인식활동적 성격 ... 법률의 적용과 법형성은 엄격히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다. (43면)




40. 포섭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인식론적 전제 ... 첫째, 법률텍스트로부터 구체적인 법명제를 연역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작업(상위명제를 정하는 작업)은 법률언어와 그 법률언어를 해석하는 논증언어의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명확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를 ‘언어의 (의미)명확성-독트린’이라고 부른다. ... 둘째, 위에서 법률에 포섭될 수 있는 사건은 법률해석과는 - 더 정확하게는 법률해석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어떤 정치적, 윤리적, 정책적 결정과는 -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52, 53면)




41. 법률언어가 그것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대상을 그 자체로 혹은 그 글자의 논리적인 언어적 뜻풀이(법률해석)를 통하여 ‘완전하고’ ‘분명하게’ 지시해 줄 수 있다는 독트린은 언어의 ‘통시적 모호성’과 ‘공시적 모호성’ 때문에 유지될 수 없다. (53면)




42. 언어가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지평 속에서 우리 삶의 다양한 전개가능성 때문에 모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언어의 ‘통시적 모호성’이라 부른다. ...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법률개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구멍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포섭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 통시적 모호성 또는 구멍난 개념을 완전히 도외시함으로써만 비로소 살아 남을 수 있을 뿐이다. (54, 55면)




43. 법률이 입법자보다 영리하다. (52면)




44. 공시적 모호성이 증대하는 현대 사회 ... 서술적 언어, 규범적 언어, 가치충전필요개념, 일반조항이라는 서열 순으로 모호성이 증대한다고 본다. 만일 이러한 서열화가 가능한 것이라면, 입법자가 가능한 한 일반조항 쪽의 언어보다는 서술적 언어 쪽의 언어로써 법률을 제정할수록 법률적 삼단논법은 더욱 철저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후기산업사회의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일반조항의 홍수’라는 현상이 말해주듯 오늘의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규율하기 위해서는 일반조항의 사용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57면)




45. 누가 과연 정상적 일반인인가? 이 물음 앞에서는 법관의 어떠한 형태의 논증도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정상성’ ‘일반성’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한 사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사회가 일정한 통제를 가하기 위하여 ‘그를 통제받아 마땅한 존재로 낙인찍을 때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60면)




46. 만일 그러한 규범이 일정한 집단에게 더 많은 이익을, 그리고 다른 집단에게는 적은 이익이나 불이익을 분배하는 기능(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면 정상성이란 언어는 그 언어사용방식에 담겨지는 이데올로기적 척도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는 셈이 된다. (60면)




47. 사실심-법률심-이분론 ... 실체적 진실 (63면)




48. 해석카논이란 법관의 법률해석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법률해석을 논증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틀에 불과하다. (80면)




49. 여기서 법리라는 개념은 판결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대법원이 자신의 법률해석이 법형성이 아니라 법인식임을 강조하는 수단임을 알 수 있다. (110면)




50.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도 법관은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에 의해 실체적 진실을 ‘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적 오만이 소위 자유심증주의의 제도적 내용이라는 것이다. (126, 127면)




51. 법률적 삼단논법은 법률적용의 실제와는 거리가 먼 허구적인 모델이다. 허구적인 모델의 지배는 실제 법률적용을 좌우한 실질적인 결정의 근거들을 은폐시키고, 법관의 논증의무를 축소시킨다. 논증의 축약은 판결의 타당성에 대한 합리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합리적 대화의 차단은 더 나은 법발견의 가능성을 막는다. (131면)




52. 법실증주의적 인식론에 따르면 법률해석은 법관이 ‘혼자서’ 법률의 규범적 내용을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 그리고 사실확정은 법률에 적용할 사안을 법관 개인이 ‘혼자서’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133면)




53. 법률적 삼단논법은 사실확정이란 법률해석과 법률해석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이해관계와는 독립하여 언어에 앞서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 인식은 확실할 수 있다는 것(포섭이데올로기)을 전제로 한다. (134면)




54. 이러한 주체-객체의 인식모델에 서있는 법관은 사실확정에 있어서 외롭다. 혼자서 진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로운 인식주체는 흔히 경직되고 오만해지기가 쉽다. 홀로 인식한 진실에 대한 회의를 차단하지 않고는 자신의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135면)




55. 개념의 인식이란 존재론적 실체의 인식이나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운 약속의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투쟁이다. 개념을 형성하고 개념을 현실세계에 옮긴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날카로운 이해관계의 갈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률언어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법률해석은 비유적으로 ‘의미론적 투쟁’(semantischer Kampf)이라 부를 수 있다. (140면)




56. 법관을 예측이 확실할 수 있는 결정기준에 얽어매는 가장 알맞은 방편으로 19세기의 대륙법계에서는 법전의 제정을 선택하였다. 그 다음 법전에 법관을 얽어매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법관은 법률글자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하는 절대명제가 생겨났다. 이 개념법학의 절대명제가 지속될 수 없음은 역사적으로 얼마 안 가서 드러났고 그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 입법자의 이익평가에 충실하라’고 하는 역사적 이익법학의 절대명제가 개념법학적 절대명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익법학의 발전된 모습인 평가법학이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하였다. 이 모든 방법론의 변화흐름은 사회역사적 발전을 배경으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지만 어쨌든 그 변화의 핵심은 ‘법관의 판결에서 평가적 요소의 역할이 점점 커짐에 따라 법치국가의 이상인 법관의 판결에 대한 확실한 예측가능성이 점점 더 줄어만 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판결의 예측가능성을 최소한이라도 보장하기 위하여 최후의 방편으로 생겨난 것이 바로 법률해석의 한계는 확실한 기준, 즉 언어(논리)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도그마였다. (149, 150면)




57. 그에 따라 판결행위는 좀 비유적으로 말하면 ‘수학적 확실성’을 갖춘 셈이 된다. 이러한 수학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예컨대 형법전의 마그나 카르타 기능은 이상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151면)




58. 그러나 개념실재론을 떠난다고 해서 언어기호의 사용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다는 유명론에 빠질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보편성’을 요구하는 법의 카테고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실재론과 개념유명론 어느 한 쪽에도 쏠리지 않는 언어이론을 법률해석의 인식론적 기초로 삼아야 한다. 그런 언어이론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언어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170면)




59. 법률해석은 법률언어와 현실의 영원한 불일치를 극복하는 실천적 작업이다. (179면)




60. 법률말놀이는 하나의 정치적 싸움이다. (181면)




61. 여기서 법관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법률말놀이에 참여하도록 놀이규칙을 근거지울 필요가 있게 된다. 그 근거지움은 놀이규칙의 비편파성을 납득케 하는 것이어야지 자신의 법률단어사용이 해당 법률단어의 언어적 효력범위(혹은 법리) 안에 머물렀다는 허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런 허구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법률해석의 ‘놀이’성격을 부인하는 일종의 독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2면)




62. 예컨대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에 의한 판례변경제도는 새로운 말놀이(의 규칙)를 찾는 것을 제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6면)




63. 법관의 법률해석은 “법률말놀이에의 구성적 참여”이다. (187면)




64. 과학과 기술의 거듭되는 비약적 발전이 가져온 사회현실의 ‘복잡성’은 일상언어와 일상규범의 규율지평을 뛰어넘어 버렸다. (190면)




65. 전문법에서의 법적 정의는 전통적인 의미를 유지하지 않는다. 즉 법적 정의는 정의의 개념요소로 불리는 평등, 합목적성, 법적 타당성의 동시적 충족이라는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도덕적 타당성, 체계의 효율성(경제성), 정치(정책)적 합리성의 실체적 조화상태로 해석될 수 있다. (196면)




66. 요셉 에써(Josef Esser)가 대표적으로 발전시킨 해석학적 법학방법론은 다음 두 가지의 공통된 인식을 갖고 실증주의적 해석이론의 극복에 기여했다. 첫째는 법률텍스트는 언제나 적용자에게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남겨놓는 다양한 형태의 불명확성(모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문법적 해석, 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과 같은 해석카논(해석규칙)들은 그들 사이에 사용순서와 방법을 정하는 메타규칙이 정해지지 않는 한 -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 이미 이루어진 법률해석의 결과를 단지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점이다. (202면)




67. 법은 당위와 존재의 상응(상호수렴성)이다. (아르투어 카우프만) (202면)




68. 이와 같은 법학방법론적, 법철학적 인식의 발전에 힘입어 - 특히 빈프리트 하쎄머에 으해 - 성장한 해석학적 법이론은 법률적용 또는 법률해석이란 ‘사안을 통한 규범구체화’와 ‘규범을 통한 사안구성’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더욱 발전된 법률해석의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203면)




69. 그러나 규범에서 과학주의적 인식론이나 실증주의적 인식론이야말로 실제로는 은폐와 침묵과 같은 법관의 나쁜 기교를 조장하는 원천이 된다. (207면)




70. 법률과 사안의 해석학적 순환 ... (206면)




71. 하이데거는 일찍이 해석자에게 “해석학적 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올바르게 들어갈 것”을 권고한 바 있다. (207면)




72. 법관실무가 선이해를 드러내고 소송절차에서 법관실무에 완전한 성찰과 논증의무를 부과할 수 있도록 그 선이해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통제가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선이해가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법관의 이해의 올바름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절차적으로 창출되는 것이며 또는 심사받을 수 있는 것이다. (208면)




73. 하쎄머의 이해 가운데 두 번째 중요한 점은 법해석학의 관점에서 이해된 법률해석의 올바름이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절차적으로 창출된다고 한 점이다. (208면)




74. 말함은 말해지는 구체적 상황(콘텍스트, Kontext)에 머물러 있는 채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콘텍스트는 말함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구체적 상황(콘텍스트)은 매우 다양하고 수많은 요소로 구성된다. (2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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