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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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옮김)

 

1.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헤겔의 초기 저서에서는 인륜적 총체성을 상호주관적 생활관계 속에서 구현된 의사소통적 이성으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대안은 열려져 있었다. (63)

 

2. 철학종사자들이 외면하는 현실성의 평가절하는 바로 비판의 약화와 일치한다. … 헤겔은 현대에 속해있는 최초의 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를 문제시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의 이론을 통해 현대, 시대의식, 합리성 사이의 개념적 상관관계가 처음으로 분명해진다. (66)

 

3. 헤겔우파와 결합되어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현대의 시대의식을 진부하게 만들고, 이성을 오성으로 그리고 합리성을 목적합리성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적 현대의 끊임없는 역동성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들에게는 과학지향적으로 자율화된 학문을 제외하고는 문화적 현대가 어떤 구속력도 가지지 않는다. 니체에 의존하는 청년 보수주의자들은 현대의 시대의식을 더욱 급진적으로 철저화하고, 이성이 절대화된 목적합리성이며 탈인격화된 권력행사의 형식이라고 폭로함으로써 변증법적 시대비판을 훨씬 능가한다. 과정에서 그들은 인정되지 않는 규범들을 심미주의적으로 독립된 아방가르드 예술로부터 얻게 되는데, 규범들 앞에서는 문화적 현대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대도 역시 존립할 없다. (67)

 

4. 역사의 가운데에서 역사에 맞추어 방향설정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배가 난파하였을 파도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K. Löwith, Einleitung, K. Löwith (Hrsg.), Die Hegelische Linke) (78)

 

5. 현대성의 담론에 니체가 끼어들면서 논증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이성이 통합하는 종교의 힘에 대한 등가물로서 등장하여, 자신의 추진력으로 현대의 분열을 극복할 있도록, 처음에는 화해하는 자기인식으로 파악되었고 (헤겔은 이성의 개념을 절대정신의 화해시키는 자기인식으로 파악함), 다음에는 해방하는 자기화로, 마침내는 보상적 기억으로서 파악되었다 (청년헤겔파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역사의 대한 역사주의적 찬탄 속에는 적나라한 성공에 대한 현실정치적 찬탄으로 너무 쉽게 전환될 있는 경향성이 있다고 간파함). 이성개념을 자체 변증법적인 계몽의 기획에 맞추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니체가 가졌던 선택 가능성은 주체중심적 이성을 다시 내재적으로 비판하거나 아니면 기획을 전체적으로 포기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두번째 대안을 선택한다. 그는 이성개념의 새로운 수정을 포기하고, 계몽의 변증법과 결별한다. 특히 현대의식의 역사적 변형, 자의적 내용의 범람과 본질적인 모든 것의 공동화는 그로 하여금 현대가 자신의 척도를 스스로 창조할 있다는 점을 회의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 현대인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 전집, 1, 273) … 이런 방법 (고대 그리스적 세계로 돌아가는 ) 통해 골동품적으로 사유하는 현대의 지각생들이 포스트모던시대의 선두주자 변신한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다시 채택하게 기획이다. (114)

 

6. 현대는 특권적 지위를 상실한다. 현대는 태고적 삶의 해체와 신화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합리화의 역사에 있어 마지막 단계를 형성할 뿐이다 (그것은 점에서 니체, 바타이유, 하이데거의 입장에 근접하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도 타당하다.) (115)

 

7. „ 이상 (바그너의 음악처럼) 낭만주의적 근원을 가지지 않고, 대신 디오니소스적 근원을 가진 음악은 어떤 것일까?“ (비극의 탄생 2판에 대한 서문인 자기비판의 시도 참조할 . 니체, 전집, 1, 20) (116)

 

8. 가장 커다란 위험 속에는 구원자도 역시 함께 자라난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자도 함께 자란다.) (121)

 

9. 그것은 절망적인 퇴폐자 (데카당트) 바그너가 갑자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기때문이다. (122)

 

10. 아폴로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은 개별화, 개인 한계의 엄수를 신격화하였다. 그러나 아폴로적 아름다움과 제한은 디오니소스적 축제의 무아경적 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것의 배경만을 은폐할 뿐이다. „자신의 ()계와 제한 속에 있는 개인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자기망각으로 침잠하여 아폴로적 규칙들은 잊어버린다.“ (니체, 전집, 6, 431 이하) (122)

 

11. 예술은 무아경의 희생을 치르고서만, 고통스러운 탈분화, 개인의 탈경계화 그리고 내면과 외면에 있는 무정형적 자연과의 융해라는 희생을 치르고서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에로 진입할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상실한 현대인은 오직 신화론에서만 일종의 구원을 기대할 있는데, 구원은 모든 매개를 지양한다. 디오니소스적 원칙에 관한 쇼펜하우어적 견해는 새로운 신화론의 기획에 있어 전환점을 이루는데, 이는 낭만주의적 메시아주의에서는 낯설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허무주의적으로 공동화된 현대성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다. 현대성의 비판은 니체와 함께 처음으로 현대성이 가지고 있는 해방주의적 내용의 보존을 포기한다. (124)

 

12. 가능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 감수성과 함께 의미창조적 능력은 권력에의 의지의 예술적 핵심을 이룬다. (124)

 

13. 분석에 따르면 겉보기에 보편적인 타당성 주장들 뒤에는 주관적 가치평가들의 권력주장이 은폐되어 있다. (125)

 

14. 니체는 취미감각을 입맛의 예와 아니오 참과 거짓, 선과 악의 피안에 있는 인식의 기관으로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다. (126)

 

15. 역사학은 권력에의 의지인 철학에 봉사하는 까닭에 진리신앙의 환상에서 벗어날 있어야 한다. … 그는 디오니소스를 철학자로 천명하고, 자기자신을 철학하는 신의 마지막 사도와 대가라고 천명한다 (니체, 전집, 5, 238) (127)

 

16. 길을 통해 니체의 현대성 비판은 계속되었다. 권력의지의 도착, 반동적 세력의 봉기, 주체중심적 이성의 발생을 인각학적, 심리학적, 역사적 방법을 통해 폭로하고자 하는 회의적 과학자는 바타이유, 라캉, 푸코에게서 자신의 후계자를 발견한다. 주체철학의 발생을 소크라데스 이전의 시초에까지 추적하고, 특수한 지식을 요청하는 형이상학 비판은 하이데거와 데리다에게서 후계자를 발견한다. (127)

 

17.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은 사건을 예술적으로 재생된 신화론의 무대로부터 철학의 무대로 옮겨놓으려는 시도로 이해될 있다. 하이데거는 우선, 니체에게서 예술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철학을 세워야 하고, 그리고는 철학적 사유를, 디오니소스적 힘을 경직시키고 부활시킬 있는 무대가 있도록 변형시켜야 한다는 과제와 직면하게 된다. … 그러나 예술이 가지는 구원의 힘에 관한 니체의 사상들은 표면적 가상에 의하여 예술적이지만, 가장 심오한 의지에 의거하면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 니체, 1, 154). (128)

 

18. 자신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들은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해방적 힘을 이상 신뢰해서는 안되었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벤야민의 역설에 인도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리적으로 되어 버린 개념의 작업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 계몽은 신화에 반대하고, 이렇게 신화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난다. 계몽된 사유가 확신하였던 대비에 대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신화와 계몽이 은밀한 공범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신화는 계몽이고, 계몽은 신화론으로 변한다 (Dialektik der Aufklärung, 10).“ (136, 137)

 

19. 신화적 세계는 고향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미로이다. (138)

 

20. 근원으로부터의 탈출이 해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성공적 계몽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 힘은, 추구하는 해방을 중단시키고 일종의 굴레로서 경험되는 근원과의 결속을 연장시키는 지연의 계기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양편 사이에 걸려 있는 전체의 과정을 계몽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신화적 힘에 대한 승리의 과정은 항상 새로운 단계마다 신화의 회귀를 운명적으로 야기하도록 되어 있다. 계몽은 신화론으로 되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명제도 역시 의식의 오디세우스적 단계에서 증명하고자 한다. (139)

 

21. 계몽의 과정은 시초부터 자기보존의 충동에 힘입고 있는데, 충동은 이성을 불구로 만든다. 왜냐하면 자기보존의 충동은 이성을 오직 목적합리적 자연지배와 본능지배의 형태로서, 도구적 이성으로서만 요청하기 때문이다. (141)

 

22. 끝으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의 분석을 통하여 오락과 합병된 예술은 본래 가지고 있던 혁신적 힘을 상실하며, 모든 비판적 유토피아적 내용들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142)

 

23. „ 아니오 입장을 표명하고 타당한 발언과 타당하지 않은 발언을 구별할 아는 비판적 능력은, 권력주장과 타당성주장이 불투명한 결합을 함으로써, 침식당한다. (143)

 

24. 그러나 부정의 , „ 아니오 구별할 있는 능력은 분화를 통해 마비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문제, 정의문제, 취미의 문제를 그들의 고유한 논리에 따라 작업하고 전개할 있기 때문이다. (143)

 

25. 비판이론은 서구에서 일어나지 않은 혁명, 소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스탈린적 발전,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승리에 대한 정치적 실망들을 작업하기 위하여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집단에서 처음으로 발전되었다. 비판이론은 마르크스적 의도와 단절하지 않고서 마르크스적 예언의 실패를 설명해야만 하였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이성의 마지막 빛이 현실로부터 사라져 버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문명의 폐허들 만이 황량하게 남겨졌다는 인상이 2 세계대전의 가장 암울하였던 시기에 확고해졌는가가 이해된다. 청년 아도르노가 벤야민으로부터 받아들였던 자연사의 이념이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147)

 

26. … 그렇지만 여기에 모아놓은 단편들은 우리가 이런 신뢰를 포기해야만 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계몽의 변증법, 5) (149)

 

27.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산적 오성에게 이성의 자리를 찬탈함으로 초래된 비용을 물리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특히 다음의 책을 참조할 . M. Horkheimer, 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 (150)

 

28. 마찬가지로, 인식과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의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발전시킨 사상을 선취한다. 객관성의 이상과 실증주의의 진리 주장의 배후에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그리고 보편주의적 도덕의 정당성 주장의 배후에는 자기보존의 명법과 지배의 명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153)

 

29. 몰락의 역사의 연속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정부주의적 의도는 이미 니체에게서 작용하고 있다. 훗날 벤야민과 페터 바이스의 반성에 영향을 주었던 예술적 저항의 반혁적 힘은 이미 니체에게서 규범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도덕적 선과 실천적 유용성을 중성화하고, 비밀과 추문의 변증법과 세속화의 공포에 대한 쾌락에서 표현되는 동일한 힘이다. 니체는 소크라데스와 그리스도를 진리와 금욕적 이상에 대한 믿음의 변호인으로서, 위대한 적수로서 세워놓는다. 그들은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니체는 오직, „거짓, 기만에의 의지가 신성화되는예술만이, 아름다움의 폭력만이 과학과 도덕의 허구적 세계의 포로가 되지 않을 있다고 믿는다. 니체는 참과 거짓,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인식 유일한 도구로서 취미를, 입맛의 예와 아니오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예술 재판관의 취미판단을 가치판단과가치평가 모델로 고양시킨다. 비판의 정당한 의미는 위계질서를 산출하고, 사물의 경중을 비교하고, 힘을 재는 가치판단에 있다. 따라서 모든 해석은 가치평가이다. „ 높이 평가함을 의미하고, „아니오 낮게 평가함을 의미한다. „높음낮음 , 아니오의 입장 표명의 차원을 특징지우는 것이다. (154)

 

30. 그는 타당성과 비타당성을 긍정적 가치판단과 부정적 가치판단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우선 주장적 명제의 진리와 규범적 명제의 정당성을 평가절하한다. … 다시 말해 니체는 타당성 주장을 선호체계로 재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를) 좋아한다고 가정하자. 비진리와 (불의)여서는 되는가? 진리와 정의의가치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취미판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초적 가치평가들의 배후에는 여전히, 셀링이 그랬던 것처럼,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통일성을 예술적 판단력 안에 고정시키고자 하는 건축술이 숨겨져 있다. 니체는 가치판단의 인지적 지위를 박탈하고, , 아니오의 입장 표명 속에는 어떤 타당성 주장도 없으며 오직 권력 주장 만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이성의 완전한 동화를 실행할 있다. (154, 155)

 

31. 그러나 사유가 이상 진리와 타당성 주장의 요소를 가지고 작용할 없다면, 반박과 비판은 의미를 상실한다. (156)

 

32. 이런 방법으로, 니체는 과학과 도덕을, „계몽의 변증법 구성물을 도구적 이성의 구현형태로서 비난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왜곡된 권력의지의 이데올로기적 표현형식들로서 폭로하는 문화비판의 척도를 획득한다. (160)

 

33. 리오타르의 저서포스트모던적 조건 결합된 유행적 표제어포스트모더니즘 마찬가지로 공공의 의식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러므로 신구조주의적 이성비판에 의한 도전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단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나의 시도의 관점을 형성한다. 담론을 통해 현대성은 18세기말부터 철학적 주제로 발돋움하였다. (13)

 

34. 사유의 전통은 그것의 본질적 의도가 새로운 경험의 맥락에서 증명될 때에만 살아남을 있게 됩니다. 그것은 낡디낡은 이론적 내용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일반적 의미의 전통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고유한 발생 맥락을 반성하는 이론에 대해 이렇게 태도를 표명합니다. 호르크하이머는 비판이론이 동시에 설명해야만 하는 역사적, 사회적 과정의 구성요소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비판이론전통이론 구별하였습니다. 아도르노는진리의 시대핵심 관해 말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과 가차없는 수정주의는 더욱 적절한 태도입니다. 추상적 전이 또는 단순한 보존보다 적절한 태도입니다. 내가 기꺼이 그리고 거듭해서 쯤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그곳에서는 아무도 미리 알지 못하며 나에게 주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6)

 

35. 유럽에서 무너진 종교적 세계상들로부터 세속적 문화가 생겨나는 결과를 가져왔던 탈마법화 과정을 그는합리적이라고 서술한다. 현대적 경험과학, 자율적이 예술, 원리에 의해 정당화된 도덕이론, 법이론들과 함께 문화적 가치영역이 형성되는데, 영역들은 각자 이론적, 예술적 또는 도덕적/실천적 문제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법칙성에 따라 학습과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19)

 

36. 아놀드 겔렌은 이를 인상깊은 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계몽주의의 전제조건은 죽었다, 오직 결과만이 계속 진행될 뿐이다. (21)

 

37. 막스 베버의 서양 합리주의에 담겨 있는 근본개념의 대륙이 침몰하고 있는 동안에 이성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성은 이제 억압되고 동시에 스스로 억압되는 주체성으로서, 도구적 점령의 의지로서 폭로된다. (22)

 

38. 헤겔에게 영감을 주었던 새로운 낱말들 중의 하나인 시대정신은 현재를 일종의 과도기로서 특징지우는데, 과도기는 과정에 속도가 점점 붙을 것이라는 가속화의 의식과 미래가 전혀 다른 종류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소모되어 버린다. 헤겔은정신현상학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시대가 탄생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있다. 정신은 이제까지 있어왔던 자신의 실존과 표상의 세계와 단절하였으며, 그것을 과거로 묻어두려 하고 있다. 정신은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존립하고 있는 것을 침식하고 있는 경박함과 권태, 그리고 무지의 것에 대한 불확실한 예감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의 징조이다. 이러한 점진적 붕괴는 번개와 같이 단숨에 새로운 세계의 구조를 세워놓는 출현으로 중단될 것이다.“ … 그러므로 현대의 역사적 의식에는 근대와가장 새로운 시대 경계지우려는 경향이 들어 있다. (25)

 

39. 현대는 자신의 규범성을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창조해야만 한다. (26)

 

40. … 이러한 특성에 벤야민은 훗날 변증법적 형상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현대적 예술작품은 본래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다. … 한편으로 그는 진화주의와 역사철학의경직된 신앙으로 채워진 공허한 동질적 시간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29, 30)

 

41. 근대에 들어와서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졌다는 것이 나의 명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대가 때까지 겪었던 경험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다음에야 비로소 근대가 하나의 새로운 시대로 파악될 있었다는 것이다 (R. Koselleck, Erfahrungsraum und Erwartungshorizont, 359). (31)

 

42.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지 않고서는 결코 문화의 기록일 없다. 그것 자체가 결코 야만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은 것과 같이,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파괴되는 전승의 과정도 역시 야만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일곱번째 명제) (34)

 

43. 우선 헤겔은 새로운 시대의 원리로서 주체성(Subjektivität) 발견한다. 원리로부터 그는 동시에 현대세계의 우월성과 위기성을 설명한다. 현대세계는 스스로를 진보의 세계로 이해하고 동시에 소외의 세계로 이해한다. … „새로운 세계 자체의 원리는 정신적 총체성 속에 존립하고 있는 모든 본질적 측면들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여 발전한다는, 주체성의 자유이다.“ 헤겔은 새로운 시대 (또는 현대시대) 인상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면서, „주체성자유반성 가지고 설명한다. (36, 37)

 

44. 18세기말까지 과학, 도덕, 예술은 활동영역으로서 제도적으로도 분화되었다. 영역들 내에서 진리의 문제, 정의의 문제, 취미의 문제들은 자율적으로, 각기 특수한 타당성의 지배를 받으며 작업되었다. (40)

 

45. 통일철학의 모티브들은 청년 헤겔의 위기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열된 시대의 실증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화해의 힘으로서 이성을 내세워야 한다는 확신 뒤에는 바로 이와 같은 위기경험들이 숨겨져 있다. … 그는 주체성 철학의 한계 안에서 주체성의 극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42, 43)

 

46. … 진단 만이 그에게 절대자를 전제할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그로 하여금 (반성철학과는 달리) 이성을 통일의 힘으로 설정하도록 한다. … 헤겔은 칸트와 피히테에서 정점을 이루는 계몽주의 시대가 이성 속에 단지 하나의 우상을 세워놓았다고 확신한다. 시대는 그릇되게도 오성 또는 반성을 이성의 자리에 세워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유한자를 절대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44, 45)

 

47.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화해의 힘으로서 예술이 등장하는 것이다. … 1801년의차이 관한 저서에서 헤겔은 곧바로 예술적 유토피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 예술은 켤코 헤겔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횔덜린, 셸링과 함께 맹세하였던예술의 종교 이어지는 길을 닦지 못했다. 철학은 예술에 예속될 없다. 오히려 철학은 자기자신을 이성이 절대적 통일권력으로서 등장하는 장소로 이해해야만 한다. (54, 55)

 

48.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푸코도 역시 구조주의적 혁명에 깊이 감동되었다. 혁명은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푸코를 코제브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현상학적, 인간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가로 만들었으며, 우선은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푸코는 레비 스트로스가 시작한 주체에 대한 부정적 담론을 동시에 현대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성비판이라는 니체의 모티브들은 하이데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타이유를 통해 푸코에게 도달하였다. 끝으로 그는 이러한 자극들을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비슐라르의 제자로서, 학문사가로서 작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학문사가는 통상 과학사가라고 불리는 학계에서와는 달리 자연과학보다는 오히려 인문과학에 관심을 갖는다. 레비 스트로스, 바타이유, 바슐라르의 이름으로 성격지워지는 세가지 전통의 계보들은 푸코의 첫번째 저서에서 결합된다. (광기와 사회, 1961) (285)

 

49. 푸코는 18세기말 이래로 광기의 현상이 어떻게 정신병으로서 구성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 독백의 형태로 되어 버린 이성은 이성적 주체성에 의해 정화된 하나의 대상으로서 자기자신을 아무런 위험없이 통제할 있기 위하여, 광기를 자신의 신체로부터 멀리한다. 정신병을 하나의 의학적 현상으로 만드는 임상화 과정을 푸코는 (바타이유가 흔적으로부터 서양 합리성의 역사를 읽어냈던) 배제, 추방, 박탈의 과정에 대한 예로서 분석한다. (286)

 

50. 푸코는 광기를 일련의 한계경험으로 ( 한계경험들 속에서 서양적 로고스는 자신이 극도로 모순적인 방식으로 이질적인 것과 마주하고 있음을 안다) 분류한다. 경계선을 넘는 경험들에는 동양적 세계의 접촉과 동양적 세계로의 몰입 (쇼펜하우어), 비극적인 것과 태생적인 것의 재발견 (니체), 꿈의 영역으로의 침투 (프로이트), 태고적 금지의 영역으로의 침투 (바타이유), 그리고 인류학적 보고서들에 의해 조장된 이국 취미가 속한다. (286)

 

51. 이질적인 요소들이 이상 구원의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288)

 

52. 광기는 이성의 약점들을 역설적으로 폭로하는 거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291)

 

53. 르네상스 동안에도 이성이 자신의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모든 전도가능성이 제거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과정이 이성사에 있어 분수령적 사건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17세기 중반경에 있었던 대대적 감금의 물결이다. 예를 들면 1656 파리에서는 단지 동안에 백명 하나는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다른 하나는 18세기 말에 있었던 것으로서, 이와 같은 감금시설과 피난소는 의학적으로 정신병자라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의사의 보호를 받는 폐쇄된 시설로 변형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오늘날 아직 존립하고 있는 (그리고 정신병 반대운동이 폐지를 요구하는) 정신병 치료시설의 탄생이다. 처음에는 미친 사람, 범죄자, 부랑인, 난봉꾼, 가난한 사람, 그리고 모든 종류의 괴상한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강제적으로 감금하고, 나중에는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을 건립한 사건들은 가지 종류의 실천들을 알려준다. 사건들은 모두 점차적으로 확고해지는 독백으로부터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 기여한다. (291)

 

54. 정신의학적 시설, 병원의 탄생은 푸코가 훗날 현대적 지배기술로써 서술하게 규율화의 형식에 대한 전형적 예다. 푸코가 처음에는 병원으로 기능이 전환된 격리소의 세계에서 발견한 폐쇄적 시설의 원형은 공장, 감옥, 병영, 학교, 그리고 군사학교의 형태들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 … 이와 같은 총체적 제도들 속에서 푸코는 규제하는 이성의 승전비들을 본다. … 이와 같은 시설들에 있어, 객관화하고 검사하는 시선 그리고 분석적으로 분해하고 통제하며 모든 것을 관통하는 시선이 구조를 형성하는 권력으로 획득한다. 그것은 주변세계와 단지 직관적으로 맺고 있던 관계의 모든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상호주관적 상호이해의 모든 매개수단을 끊어 버린 이성적 주체의 시선이다. (292, 293)

 

55. 이러한 사실은 인문과학자의 침투적 시선이,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있는, 원형감옥의 중심공간을 차지할 있다는 상황에 힘입고 있다. (294)

 

56. 대화적 관계의 말살은 독백의 형태로 자신을 내면으로 향한 주체들을 서로에게 대상으로, 그것도 오직 객체로서만 만든다. (294)

 

57. 끝으로 푸코는 정신병원과 임상심리학을 산출하였던 개혁운동들의 예를 연구하여 인본주의와 테러의 내면적 친화관계를 발전시킨다. 이는 그의 현대성 비판에 예리함과 냉혹함을 더해 주었다. 계몽주의의 인본주의적 이념들로부터 정신병원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에서 푸코는 처음으로해방과 노예화의 이중운동 보여준다. 그는 나중에 형벌제도, 교육제도, 건강시설, 사회복지 등등의 광범위한 전선에서도 이러한 이중운동을 다시 발견한다. 박애주의적 관점에서 미친 사람을 방치된 감금시설로부터 해방시키는 , 의료적 목표를 추구하는 위생적 병원의 건립, 정신병자의 정신의학적 치료, 정신병자들이 심리학적 이해와 치료적 관심을 받을 있는 권리 모든 것이 환자들을 지속적인 감시, 조작, 개별화, 규제화의 대상으로 만들고, 특히 의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드는 시설규칙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294)

 

58. 진리는 교활한 배제의 매커니즘이다. (296)

 

59. 주체철학의 근본개념들은 객관영역에 대한 접근방식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를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무엇보다도 (3) 역사를 암암리에 거시 의식으로서 개념화하는 전체적 역사서술과 결별하고자 한다. 단수 형태의 역사는 다시 해체되어야 한다. 비록 설화적 이야기들의 다양성으로는 아니지만, 불규칙적으로 등장하였다가 다시 사라지는 섬과 같은 담론들의 다원주의로 그것은 해체되어야 한다. 비판적 역사가는 첫째로 그릇된 연속성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단절과 전환국면, 방향의 전환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목적론적 인과성들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인과성들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종합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보와 진화와 같은 분화의 원리들을 포기한다. 그는 역사를 시대에 따라 분류하지 않는다. … 방식은 비동시적 체계사들의 다원성을 고려하고, 역사들이 가지고 있는 분석적 통일성들을 의식과 무관한 기준에 의거하여 만들어낸다. 접근방식은 하여튼 추정된 의식의 종합적 활동들의 개념적 수단을 포기하고, 전체성의 형성을 단념한다. 또한 화해의 이념도 이와 함께 버려진다. 헤겔에 의존하는 현대성의 비판이 거리낌없이 사용되었던 역사철학의 유산도 포기하는 것이다. „시대의 다양성을 폐쇄적인 전체성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모든 역사는간단히 거부된다. „모든 역사의 변화에서 화해를 발견하는 역사, 그리고 역사의 배후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세계 종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 거부된다. (299, 300)

 

60. 담론실천을 뿌리로부터 파헤치는 고고학을 통해서만, 내면을 향해 전체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깥에서 보면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는 한갓 특수한 것으로 인식될 있다. (300)

 

61. 역사는 스토아적으로 냉정한 고고학자의 시선을 받으면 하나의 빙산으로 굳어진다. 빙산은 자의적인 담론구성체들이 형성한 결정체로 뒤덮혀있다. … 계보학자의 냉소적 시선을 받으면 빙산은 움직이게 된다.  (302)

 

62. 한때 베르그송, 딜타이, 짐멜에게서 철학의 초월적 근본개념으로 (그것은 여전히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의 배경을 이루었다) 추앙되었듯이, 푸코는 이제권력 이성비판적 역사기술의 초월적, 역사적 근본개념으로 끌어올린다. (302)

 

63.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니체의 이성비판 기획을 형이상학 비판의 방법을 통해 실행하고자 하였다면, 푸코는 역사기술의 파괴를 통해 기획을 계속하고자 한다.

(303)

 

64. 하이데거는 그가 여전히 일말의 신뢰를 보내는 근원철학의 사고형태를 철저화한다. 그는 진리타당성의 인식론적 권위를 세계해명적 지평의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옮겨놓는다. (304)

 

65. 계보학은 다시 말해정복의 모험 통해 서로 얽히게 되는 권력실천으로부터 담론구성체가 발생하였다는 유래를 설명한다. … 푸코의 계보학에서권력 일차적으로 순수 구조주의적 활동의 동의어이다. 권력은 데리다에게 있어서차연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304)

 

66. 그는 지식에의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로 통합시켜 차이를 없애 버린다. 권력에의 의지는 단지 진리만을 구하여는 그러한 진리 전문의 담론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주체성의 특수한 자기지배의지가 인문과학들 일반에 내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담론에 내재한다. 이러한 변형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다음에야 비로소 지식에의 의지는, „성의 역사“ (1976) 1권의 부제 속에서 다시 등장하지만, 물론 이제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로 강등되었다진리의 장치 이제 많은권력의 장치들중의 하나로서 나타난다. 권력개념이 진리에의 의지와 지식에의 의지라는 형이상학 비판적인 개념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이 은폐된 사실은권력이라는 범주가 체계적으로 이중의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321)

 

67. 푸코는 고문에서 감금에로의 형집행의 전환이 현대의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지배가 현대적 지배기술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있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취급한다. (343)

 

68. 직관적으로 충족된 의미지향성은 바로 시간적 차이와 타자성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다. (210)

 

69. 20세기의 조건에서는 신비주의와 계몽은, 아도르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벤야민에게서 마지막으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은 역사적 유물론의 개념적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일무이한 사유운동이 부정적 토대주의의 수단으로 반복될 있는가 하는 것은 내게는 회의적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사유운동은 니체와 그의 후예들이 극복하고자 하였던 현대성 속으로 우리를 더욱 깊이 몰아넣음에 틀림없다. (223, 224)

 

70. 의식철학의 중심개념이동일성이었다면, 니체에 의해 시작된 탈현대적 이성비판의 중심개념은차이타자이다. 이성중심주의자들이 우연적인 , 역사적인 , 감각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배제하였다면, 니체와 탈현대적 이성비판가들은 바로 이성에 의해 배척된 , 타자에 대한 인정 없이는 세계를 해명할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이성의 타자 (Das Andere der Vernunft)“ 탈현대적 이성비판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성을 비판할 있는 준거를 어디에서 찾는가? 니체는 계몽이 타파하였던 신화를 새롭게 부활시킴으로써 인륜적 총체성을 재생시킬 있는 통일의 힘을 예술에 다시 부여한다. 그러나 니체가철학의 목표와 미래 설정하는 예술은 현대의 분화과정을 통해 자율권을 획득한 표현영역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다. 니체의 예술은 바로 분화된 다른 영역과 구별되는 총체성으로서의 예술이다.  디오니소스는 서양의 이성에 의해 배척되어 서양문화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지만 언젠가는 되돌아와 원천적 힘을 재생시킬 있는 힘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항상 자신의 부재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고통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인식시킬 있다. 현대성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 배척되고 있는 , 결여되고 있는 것이 절박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디오니소스의 도래는 그만큼 더욱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456)

 

71. 새로운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원초적 통일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현대성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통일성을 회복할 있는 메시아적 힘을 상징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니체는 사실 현대성의 전제조건인 사회의 분열과 개체의 해방을 부정하는 것이다. … 니체와 더불어 현대성 비판은 처음으로 현대성이 가지고 있는 해방적 내용의 보존을 포기하고, 주체중심적 이성은 이제 이성의 타자와 대립하게 된다. (456)

 

72.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계몽의 변증법이다. 현대의 특성은 분화와 동시에 분화에 의한 발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분화의 병리현상 만을 폭로하고 규범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회의주의적 이성비판도 정당하지 못하며, 분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의 타자를 신비주의적으로 실체화하는 형이상학 비판도 역시 옳지 못하다고 하버마스는 비판한다. 아무런 필연적 연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적 사건들의 다양한 표출이 만약 현재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열을 이성의 계기로 파악할 있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이성비판과 시대비판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전면에 등장하는 세계 내의 우연성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비밀스럽게 밝혀지는 세계해명이라는 우연성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하버마스는 말한다. (458)

 

73. 생활세계에 대한 초월적 인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주체중심적 이성을 비판하려면 대상인식을 지향하는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을 언어능력과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체들의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의사소통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해야 한다. 상호주관성의 패러다임은 한편으로는 세계의 분화를 이성발전의 계기로 파악하는 헤겔의 포괄적 이성을 부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타자를 절대화하는 니체의 이성비판도 거부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버마스는절망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헤겔과 니체 사이의중도를 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근본적으로 헤겔의 관점을 따른다. 왜냐하면 하버마스는 여전이 이성이 가지고 있는 통일과 화해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이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은 생활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강요되지 않는 합리적 합의를 의미한다. 의사소통적 행위의 관점에서 보면의식철학의 전제조건과는 무관하게 헤겔의 인륜적 총체성의 개념을 재구성할 있다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과제는 이성에 초월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서 분열된 인륜적 총체성을 회복할 있는 규범적 척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집중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성의 계기들이 철저하게 분화된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이성의 통일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하버마스 철학의 목표이다. (460)

 

74. 한편으로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필연적 결과인 사회적 분화를 인정한다. … 그러나 하버마스는 분화와 다원주의가 의사소통적 행위의 가능성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현대적 생활세계들은 분화되어 있으며, 전통에 대한 반성적 능력, 사회회된 주체들의 개별화, 법과 도덕의 보편주의적 토대가 부정되지 않을 정도로 분화되어 있어야 한다 것이다.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업적인 분화에 내재하고 있는진화론적 가치 인정한다. 분화와 다원주의가 아무리 부정적인 현상으로 비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성발전의 계기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중심적 이성은 분화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분화와 찬탈의 산물이다. 현대의 사회과정은 이성의 계기에 불과한 도구적 이성을 전체의 자리로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도구적 이성 또는 주체중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이성 자체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소뿔을 자르기 위해 소를 죽이는 것과 다를 없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하버마스는 오히려 현대화 과정의심오한 역설 정확히 판단할 것을 제안한다. 의사소통적 이성의 잠재력은 우선 현대적 생활세계의 형태들을 통해 방출되지만, 분화된 하부체계들이 (예를 들면 경제와 행정의 하부체계들) 훼손가능한 일상적 실천에 역으로 영향을 주는 과정에서 도구적 이성이 절대적 힘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의사소통적 이성의 잠재력은 자본주의적 현대화 과정을 통해 전개되고 동시에 왜곡된다“. 결국 생활세계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의사소통적 잠재성이 왜곡된 곳이지만 또한 합리적 합의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곳으로 드러난다. (460, 461)

 

75. 우리는 오늘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일도양단할 없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 물론 하버마스는 전환기의 정신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새로운 불투명성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전환기의 정신적 불투명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 현대성의 규범적 토대를 이루었었던 유토피아주의의 종말에 기인한다고 대답한다. …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달리 오늘날 유토피아적 동인과 에너지가 완전히 쇠퇴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유토피아, 노동사회적 유토피아라고 강조한다. 시대적 전환국면에 있는 오늘날 오히려 미래지향적 유토피악가 있을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훼손되지 않은 상호주관성의 형식적 양태 연관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444, 445)

 

76. … 현대예술이 체계적 의존성에 대해 무능력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에 하버마스도 동의한다. 다시 말해 현대예술은 다른 생활세계와 마찬가지로 절대화된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우리가 개괄하여 통찰할 있기에는 너무나 분화되어 있으며, 또한 사회적 현실을 작업해 내는 학문도 지나치게 분화되어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전체성에서 다원성으로라는 명제는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현상들은 사실불가해한 사회관계의 안개 속에서 행위의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지워버림으로써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며 무력감 속에 빠지게 하는 역사적 불가항력 분명하게 표출한다. 이와 같은체계생활세계 모순적 대립은 포스트모더니즘 뿐만 아니라 하버마스에게도 역시 비판적 사유의 출발점을 이룬다. (44527. 현대는 신대륙발견, 종교개혁, 계몽주의, 프랑스 대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현대의 특성은 전통과의 단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 도덕, 예술을 서양에 고유한 합리화의 궤도로 발전시켰다는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종교의 세속화, 도덕과 예술의 자율화, 민주주의의 원리, 언론의 자유, 비판적 공론영역의 형성 등은 돌이킬 없는 역사적 결과이며 동시에 양보할 없는 가치가 되어 버렸다. … 현대는 한편으로 자연법적 질서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의해 유지되었던 전체성의 파열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세속화로 말미암은 사회의 분화와 합리화를 통해 인간의 해방능력이 축적된다는 진화적 발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현대의 철학적 담론은 이렇게 분화를 부정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진화론적 관점에서 긍정적 발전의 계기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당위성으로부터 발생하였다. (448)

 

77. 현대는 바로 미래가 이미 시작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고 강조한다. … 현대는 방향설정을 위한 척도를 다른 시대로부터 차용할 없는 까닭에 자신의 규범성을 자기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449)

 

78. 그렇다면 칸트와 더불어 발생한 문제는 무엇인가?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현대세계를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으로 구성된 사상적 건축물로 표현한다. 칸트는 전체 이성이 과학의 인지적 능력, 도덕의 규범적 영역, 예술의 표현적 영역으로 분화되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와 같은 이성의 분화를 분열과 소외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열된 영역을 다시 통일시키고 화해시켜야 욕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규범적 척도가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역사적 시대로서 현대를 파악할 때에만 화해가 철학적으로 문제된다는 것을 인식한 철학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헤겔이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칸트의 철학은 현대의 자기해석에 분명하지만, 칸트 자신은 현대의 역사적 성격은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하버마스는 단언한다. 칸트철학에서 표현되고 있는 현대성은 바로 분열에 대한 시대적 자기인식이라고 한다면, 헤겔에 의해서 시작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은 분열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화해의 욕구를 문제화하는 현대의 자기비판이다. 그러므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분열과 통일, 소외와 화해의 변증법이라고 있다. (450)

 

79. 현대를 특징짓는 개인주의, 비판의 권리, 행위의 자율성 등이 모두 주체성의 객관적 표현이며 결과이다. 모든 개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원리는 사실 주체성에 근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대사회의 특성인 분화는 주체성의 결과라고 있다. 그렇다면 주체성은 과연 자신으로 말미암아 분화된 사회의 규범적 척도를 스스로 창조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버마스는 바로 점이 주체중심적 의식철학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주체성은 분화된 과학, 도덕, 예술의 영역을 근거지워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분리된 사회구성체를 안정시킬 있는 규범을 창조해야 한다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분화된 현대세계로부터 끄집어낸 주체성과 자기의식으로부터 현대사회에 방향을 설정할 있는 척도를 얻어내는 모순이라고 단정한다. (451)

 

80. 헤겔은 주지하다시피 분열된 여러 영역들을 화해시킬 있는 힘으로 이성을 제시한다. 결국 헤겔은 분열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분열의 실정성을 객관화한 주체중심적 이성으로 되돌아갈 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헤겔은 사회의 분화과정을 이성의 객관화로 표현하고, 동시에 객관화된 실정성들의 분열을 화해시킬 있는 힘으로 이성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주체철학의 한계 내에서 주체성의 극복 사유하는 것이다. (451)

 

81. 사실 니체는 화해의 자기인식, 진리에의 의지, 해방적 자기실현 등으로 표현되는 이성이 가지고 있는 이면, 권력에의 의지를 폭로한다. … 이런 과정에서 결국 존재를 무로, 이성을 비이성으로 폭로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면 니체는 분열과 소외와 같은 부정적 현상들을 이성발전의 계기로 파악하는 계몽의 변증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454)

 

82. 체계기능주의는 주체들 자체를 체계로서 분해시킨다. 아도르노가 여전히 부정적, 변증법적으로 고립시켜, 스스로 만든 운명이라고 확언하였던 개인의 종말 체계기능주의는 말없이 봉인하고 있는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 (Niklas Luhmann) 상호주관성의 구조들이 붕괴되었고, 개인들이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인격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환경세계라고 간단히 전제한다. 마르크스가 혁명적 실천이 실패할 경우에 전제하였던 야만적 상태를 특징짓는 것은 생활세계가 사용가치와 구체적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가치평가과정의 명법들 밑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이다. 체계기능주의는 아무런 감동 없이 이러한 상태가 이미 등장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것도 자본주의적 경제의 침투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기능체계의 앞마당에서도 이미 그렇다는 것이다. 주변화된 생활세계는, 자체 매체들에 의해 통제되는 하부체계로 변하여 마치 허물처럼 의사소통적 일상실천을 벗어 버릴 때에만, 살아남을 있다는 것이다. 루만 식의 체계기능주의는 한편으로 주체철학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체계기능주의는 자기관계적 주체를 자기관계적 체계로 대체한다. 다른 한편으로 체계기능주의는 니체의 이성비판을 급진화한다. 생활세계의 총체성을 인용하면서 모든 종류의 이성요청에 폐지하는 것이다. 루만이 상반된 두가지 전통들의 반성내용을 퍼내어, 칸트와 니체의 사상적 모티브들을 두뇌학적 언어유희를 통해 결합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사회의 체계이론을 정착시키고 있는 수준을 특징짓는다. 푸코가 초월적, 역사적 권력개념의 도움을 받아 담론구성체에 부여하였던 동일한 특성들을 루만은 자기관계적으로 작용하고 의미를 작업해 내는 체계들로 옮겨놓는다. 이성개념을 버리면서 이성비판의 의도마저 포기하기 때문에, 그는 푸코가 고발의 의미에서 의도하였던 모든 명제들을 단순히 서술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루만은 사회적 현대성에 대한 신보수주의적 긍정을 극도까지 밀고 나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변론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주장할 있었던 모든 것이 아무런 고발도 없이, 그리고 좀더 세밀하게 이미 미리 사유되어 있었던 반성의 경지까지 이끌고 간다. 게다가 체계기능주의는 자신의 위상에 관해 어떤 설명도 없다는 비난을 받지도 않는다. 체계기능주의는 주저하지 않고 스스로를 학문체계로 소속시키며, „분과보편적주장을 가진 이론으로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체계기능주의에 대해 단순화와 평준화의 경향이 있다고 힐문할 수도 없다. 개념화의 , 이론적 환상, 작업능력의 관점에서 오늘날 비교할 없을 정도로 정치한 루만의 이론은 기껏해야 이론의 추상화의 이익 대한 대가가 너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409, 410)

 

83. 부분체계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위계질서의 최상부를 차지할 없으며, 계층화된 사회에서 한때 황제가 자신의 제국을 대변하였던 것처럼 전체를 대변할 수도 없다. 현대사회들은 이상 중심적 자기반성의 장치와 조정의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체계이론적 시각에서 보면, 오직 부분체계들만이 (그것도 자기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관련하여) 자기의식과 같은 것을 발전시킬 뿐이다. 여기서 전체는 오직 부분체계의 관점에서 그때그때 체계의 사회적 환경세계로서 반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고, 무엇이 타당한가에 관해 전체사회적으로 기능하는 합의를 얻어내기는 어렵고 본래 불가능하다. 합의로서 이용되는 것은 인정된 잠정협약의 형태로 기능한다. 밖에도 본래 생산적이며 특수기능을 가진 종합된 현실들이 복잡성의 수준 위에서 존립한다. 그런데 개별적인 기능체계들이 각각 이러한 종합된 현실을 누릴 수는 있으나, 이것은 이상 집합체, 세계우주의 의미에서 세계의 총체성으로 합계될 없다.“ (414, 415)

 

84. 인식주체와 (인식될 있는 대상들의 총체성으로서의) 세계 사이의 내부/외부/관계는 체계/환경세계/관계로 대체된다. … 이제 문제는 체계존립의 보존과 확장이라는 문제에 예속된다. … 루만은 의미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자기관계적 체계는 오직 체계가 스스로 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세계 접촉을 가질 뿐이다. 즉자적 환경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N. Luhmann, 1984, 146) (426)

 

85. 비이성적인 것으로 해체된 이성이 체계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고백한다. 이성은 체계보존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들의 합동연주이다. 기능주의적 이성은 기능이 바로 복잡성을 축소하는 것으로 축소된 이성의 역설적 자기부정을 통해 표현된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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