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읽기 - 우리시대의 지성 5-004 (구) 문지 스펙트럼 4
이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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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읽기 (이성원엮음)

 

1.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 중심주의의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의 관념론이다. 중심주의는 관념론의 자궁이다. 관념론은 중심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표상이고, 가장 지배적인 힘이다 (Derrida, Positions, S. 69, 70).“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5, 36

 

2.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뜻은 함께 안다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 양심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1.

 

3. 형이상학의 경제는 차연과 흔적의 망각 안에서 성립한다. 망각 속에서 형이상학은 언제나 자기 동일적이고 자기 현전적인 순수한 기원을 욕구하고, 욕구 속에서 차이를 배제한다. 차이는 외면적인 , 물질적인 , 우연적이고 특수한 것과 동류이다.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현전성, 자기 동일성은 내면적인 , 정신적인 , 필연적인 , 보편적인 것과 동류이다. 이런 이항 대립적 개념체계로서 조직되는 형이상학의 시대에 언어는 음성 언어 위주로 이해되고 책의 관념 속에서 형이상학적 진리개념을 보존한다.

김상환, 데리다 소묘, 19.

 

4. 이런 음성 중심주의 안에서 문자는 음성적 기표를 대신하는 이차적 표기이다. 문자는 음성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성이 대신하는 개념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문자의 존재이유는 음성을 담고 개념적 의미를 담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 목격할 있는 언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런 음성 중심주의적 언어관과 배후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효력을 상실한다. 범람하는 기호들은 대다수가 음성에 대응하지 않으며,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된 의미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많은 기호 작용은 목소리 없이, 어떤 개념적 실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기호들은 다만 기표의 기표로서, 기표와 기표의 관계 안에서 기능한다. 데리다는 음성과 초월적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와 문자적 표기를 에크리튀르라 불렀다. 형이상학적 언어 이해의 범위를 이탈하는 에크리튀르가 여전히 기호학적 의미 작용 속에 놓이는 것은 오로지 이유로만 설명할 있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차연이 개입하여 부재하는 타자들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을 텍스트라 불렀다. … 다만 타자와의 차연적 지시관계 만이 있을 뿐이고,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타자에 의해 침범당한 상태에 있다. 텍스트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기의는 없다.

김상환, 데리다 소묘, 21.

 

5. 중심주의는 현존으로서 존재자의 존재의 규정과 연계되어 있다 (Derrida, De la grammtologie, p. 23).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0.

 

6. 그런 나르시스적 태도는 마침내 자아의 신격화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신격화에 이른 나르시시즘은 허무주의적 역설에 마침내 빠지게 된다. 테일러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신의 태도가 계명된 모더니즘의 목적이라고 천명하였다 (M. Taylor, Errance, p. 56, 59).

김형효, 말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 31.

 

7. 또한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은 근대적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함으로써 관심의 대상과 문제 영역의 지평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근대적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 또는 객관적 지식은 논리와 합리성, 규칙성 등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비논리적, 비이성적, 비규칙적 현실은 이론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억압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데리다는 획일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진리와 편견의 구분을 제거하고 진리의 복수성을 주장한다 (Derrida, Spurs: Nietysches Styles, p. 103). 또한 푸코에 따르면 진리의 재생산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권력의 행사는 진리의 창출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Foucault, Power, Knowledge). 이러한 면에서 진리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고, 권력에 의해 편향되지 않는 진리의 추구 활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나아가 진리는 테러리즘의 형태로서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타자(the other) 주장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89, 90.

 

8. „탈근대성이라는 개념과 현상의 다중성, 복잡성, 모호성은 현대의 사회현실이 그러한 특징들로 규정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탈근대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지배적인 인지와 방법의 틀에 의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된다. … 그들의 방법은 선험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위해 정립된 체계적 절차나 가정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며, 현실에 있어서의 주변성, 특이성, 특수성, 패러독스, 다원성, 애매성, 불확실성 등의 측면을 부각시킬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진다. … 탈근대주의이론가들은 개인적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중시하고 획일적 지식의 획득 가능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 해체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91, 92, 93.

 

9. 데리다에 있어 논리적 개념과 배후의 의도와의 간극을 밝히는 작업은 하나의 윤리적 정치적 의무 인식된다. 그에 따르면 논리 중심적 개념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계몽과 투명성이 보장 가능하다는 환상을 낳게 한다. 이러한 환상은 논리 중심적 이성에 의해 표명될 없는 타자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해체의 목적은 철학적, 사회역사적 텍스트가 논리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속에서 타자성의 관점을 찾아내어 관점으로부터 논리중심적 개념성과 획일성의 치초를 와해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관련하여 해체는 nothingness에로의 귀착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고 역설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3.

 

10.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인 데리다가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다 긍정적 작업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기여를 한다. , 레비나스는 윤리를 타자성에 대한 존중 또는 책임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함으로써 해체를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레비나스 자신은 윤리의 문제를 타자의 현전을 전제로 나의 자발적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른바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은 동일성 또는 동일자로 환원될 없는 것으로 데리다의 윤리에 대한 개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비나스와 데리다 모두에게 타자의 존재는 윤리의 가능 조건이며, 나아가 동일성 내지 정체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구의 철학 전통은 본질상 존재론적이고,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은 모든 형태의 타자성을 동일성 또는 동일자로 환원시키고 억압한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0, 101.

 

11. 데리다는 텍스트의 획일적, 논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해석의 자유와 확정불가능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확정불가능성은 완결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정과 윤리적 정치적 책임의 필수조건이 된다. , 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산할 있는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확정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결정만이 도덕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정 불가능한 영역은 해석의 자유와 차연, 비동일성의 존재에 의해서만 확보될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상이한 규정성 , 결코 비규정성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부정성이나 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시에 차연은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4.

 

12. 그리고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대한 강조는 논리중심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에 의해 억압되고 주변화된 희생과 배제의 역사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한다. 데리다는 텍스트의 획일적, 논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해석의 자유와 확정불가능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확정불가능성은 완결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정과 윤리적 정치적 책임의 필수조건이 된다. , 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산할 있는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확정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결정만이 도덕적, 정치적 책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정 불가능한 영역은 해석의 자유와 차연, 비동일성의 존재에 의해서만 확보될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상이한 규정성 , 결코 비규정성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부정성이나 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시에 차연은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09.

 

13. 예를 들어 푸코와 같은 경우, 그는 니체의 심미적 자기창조를 하나의 이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여야 한다 주장한다. … 해체의 동기가 체계의 한계를 폭로하고 타자성의 영역을 부각시킴에 있다면, 배후에는 윤리적 열망과 문제의식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있다.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해체주의의 윤리적 함의),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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