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 시공 로고스 총서 8 시공 로고스 총서 8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데리다, 크리스토퍼 노리스 (이종인 옮김)

 

1.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데리다는 결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씌어진 텍스트 바깥에는 실재(과거 또는 현재)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헤겔에게서 뚜렷한 전범을 찾을 수 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 헤결은 모든 형태의 역사와 지식을, 자기현존적인 진리라는 최종점을 가진 목적론의 전개에 동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헤겔의 논리는 글보다 말이 우위에 있고, 음성문자가 상형문자나 표의문자 등 기타 다른 문자체계보다 우위에 있다 (여백, 88)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음성언어 (또는 말의 자연적인 우위성을 인정하는 문자)의 경우에만 이런 의미와 의도 사이의 이상적인 일치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말하여지는 말과 그 말이 일으키는 의미 사이에는 아주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106)

 

2. 데리다의 텍스트는 경계에서의 글쓰기라는 관념 위에서 행해진다. 이 때 경계에서의 글쓰기는, 철학과 그보다는 품위가 낮은 담론의 형태 사이에 전통적으로 설정된 영역과 완충지역을 빠져나가는 그런 쓰기이다. 철학이 다른 담론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뚜렷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철학이 자기 자신을 진리와 지식의 내적 진동과 긴밀히 연결된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데리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러한 저항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흩뿌리는 힘, 팀파눔 같은 단어의 결정불가능성 (철학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구별짓기를 정지시키는)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해 주는 쓰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다.“ (116, 120)

 

3. 왜냐하면 문자를 통해야만 지식이 전파될 수 있고, 객관성과 진리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6)

 

4. „그 체계 내에는 기표가 기의로 대체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그 어떤 기표도 간단히 별 문제없이 대체되지는 못한다“ (266) … 만약 문자가 언제나 어디서나 차별적 기호의 체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의미가 소리와 뜻의 이상적인 조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다양한 구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문자의 고전적 정의는 모든 형태의 언어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미가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기호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50)

 

5. 로고스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월적 기의, 즉 기표의 차별적 놀이 저 너머에 존재하면서 그 놀이를 일거에 중단시키는 기의(의미)를 꿈꾸는 것이다. … 문자가 단 한가지 뜻을 가진 진리의 질서에 대해 그것을 격하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거부하는 강조점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해체론의 시작인 것이다. (129)

 

6. 차이의 논리는 비자기동일적인 논리이며 고전적인 이성을 제어하는 모든 규범적 제약 사항을 벗어나는 논리이다. (137)

 

7. … 의미가 다양한 차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기표와 기의의 동일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 (137)

 

8. 언어가 서로 다른 (비자기동일적인) 용어의 체계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어는 음성중심적인 개념의 범위를 벗어나서, 데리다가 입증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138)

 

9. 도대체 그 어떤 이상한 논리 (논리의 왜곡)에 입각하여, 소쉬르는 일반언어학의 개관에서 문자를 제외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중요한 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문자의 도움을 동원하는가? … 우리는 그것을 그라마톨로지(원래는 기호학)라고 명명할 것이다. …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그 위치는 이미 결정되었다. (140)

 

10. 칸트는,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회의주의 (우리는 실제에 대해서 확실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우리는 정말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는 입장)의 주장에 대해서, 실재하는 세계가 존재하며 또 그 세계가 우리의 지각과 일치한다고 논증함으로써 대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추론은 기껏해야 순환론적인 것에 불과하며 더욱 강력한 회의적인 답변에 노출되고 말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철학자들이 해야할 일은 그들 자신의 탐구 혹은 모든 인지적 탐구에 내재된 전제조건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고할 떄 결여된다면 무의미해지고 비논리적이고 비목적적이 되어 버리는 지적인 행동원칙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회피불가능한 선험적 개념구조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사실로서 의심할 나위가 없게 되는 이성적 기반에 입각하여, 인간지식의 전체적 구조를 재구축할 수 있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러한 논의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여 문자 (혹은 원문자)를 모든 가능한 지식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문자가 관념을 통용시키고, 확대되는 문서를 보존하고, 그리하여 논의를 가능케 한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데리다의 주장은 아주 과격한 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문자의 사전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문화, 역사, 지식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자는 단순히 과학에 봉사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관념적인 대상들, 즉 과학적 객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라마톨로지, 27) (142, 143)

 

11. 철학이 자기현존적인 기원이나 진리에 대한 욕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것은, 문자를 단지 그 자신의 더 높은 목적에 종사하는 도구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로고스 중심적인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문자의 역사에도 적용된다. …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는 것은 문자를 말에 복속시키는 뿌리깊은 현존의 형이상학 (Metaphysics of presence)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로 암묵적인 목적론(teleology) (역사적 진보를 조직하는 개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목적론도 현존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지배적인 전제 사항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143, 144)

 

12. „나는 일반화된 문자가 단지 창안해야 할 체계, 가설적 특징, 또는 미래의 가능성 등에 대한 사상,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성언어가 이미 문자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55) 루소론은 데리다의응용 그라마톨로지가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멋진 사례이다. (144)

 

13.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자는 이미 루소가 갖고 있던 사회와 언어에 대한 사상 속에 언제고 어디서건 존재했다. … 플라톤과 소쉬르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소에게도대리보충의 논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147)

 

14. (루소)는 말하자면, 두가지 명제 사이에 사로잡힌 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문자로 과거의 경험을 서술해야 한다는 욕망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이 정확한 회상을 완전히 넘어서서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 고백론은 루소의 진정성을 증거한다.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역할의 놀이적 타협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쓰기)는 때늦은 자기정당화의 행위가 된다. … 그러나 미래의 혜택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일부러 연기하는 이러한 행위에는 위험도 따른다.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 또는 행위하는 것은 진적으로 진정한 것이 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149)

 

15. 루소는 자기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격을 좋게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위선의 순간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을 적발하고, 또 그런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처럼 강박적으로 자신의 동기를 드러내는 것도 루소를 독자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자기선전적인 계략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준다. … (폴 로망의 고백론 해체적 읽기에 따르면) 자신의 성격상의 약점이나 결점을 시인하려는 루소의 모든 노력은 어느덧 왜곡되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서사의 논리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152, 153)

 

16. 그래서 루소는 문자가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와 부작용을 지니고  있음에도 반드시 문자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그는 이 문제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가질 수 없다.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를 인식하는 것은미끼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자의 존재 없이는 윤리는 없으며, 따라서 부재, 위선, 우회, 문자 없이는 윤리도 없다.“ (140) (154)

 

17. 그러나 데리다는 루소를 읽으면서, 이 사상가의 위대한 미덕을 이렇게 말했다. 루소의 저작은 일종의 비자발적인 자기비판에 복종하는 그 순간에조차도 로고스 중심적인가치에 철저하게 매달린다고. (155)

 

18. 이러한 변화의 순간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문자의 기술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면서 도래한다. 문자를 가진 사람들은 법률에 접근하는 권리와 법조항을 강제, 활용하는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반면 문자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법조항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범죄자, 사회부적응자, 법을 준수하는 시민공동체에서 축출된 희생양적 인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158)

 

19. 기표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자기만족적인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내던질 각오를 해야만) 정신분석은 언어의 구조적 무의식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3)

 

20.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 (그라마톨리지, 158) (183)

 

21. 그 자체로 자신들의 중앙이었고 살아있는 목소리로 교섭한 고대의 자급자족적 도시와는 대립되게, 근대의 수도는 언제나 문자언어를 독점한다. 그것은 문자로 씌어진 법, 칙령, 문서로써 명령한다 (그라마톨로지, 302). 루소는 민주주의의 실제 운영방식에 대해서 깊은 환멸을 느꼈다. 선출된 대의원을 통해 인민에게 권력을 되돌려 준다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대리보충적 권력의 나쁜 질서를 생산했고 또 다양한 위임기관에 특권을 부여했다. (185)

 

22.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두 세계의 신화적인 만남 속에서 자신이 어떤 세계를 동정하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현대의 문명을 싫어한다. 그 편협하게 합리적인 에토스, 계몽주의를 내세우면서 역사와 진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럽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뿌리깊은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덜 진보된 민족들이 보여주는 자연과의 친화성, 신화적 (계몽적이고 과학적인 것에 대립하는) 범주에 의존하는 사고방식, 역사적 발전이라는 잘못된 개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 등을 존경했다. 야생의 문화는 영원한 현재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차가운 문화였다. 그들은 주변환경에 편안함을 느끼며 서구의 뜨거운 문명과는 달리 기술적,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늘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결국, 인류학자는 자신의 연구과제가 안고 있는 신화적 입장을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비로소 이런 고질적인 오만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94)

 

23. 신화적 사고는 오랜 지반을 가진 사회적 담론의 잔해로 자신의 이데올로기 궁전을 건설한다 (레비스트로스, 그라마톨로지에 인용됨, 139) (202)

 

24. 데리다는 이러한 양분법 (브리콜뢰르 대 엔지니어)을 또 하나의 이항대립적 사례로 파악한다. … „가장 근본적인 담론과 가장 창조적이며 체계적인 엔지니어는 역사, 언어 등의 세계에 의해서 경악했고 또 농락을 당했다. .. 그들은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도구를 빌려온다.“ (139) (203)

 

25. 해체론은 철학 너머의 길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이성의 너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로고스 중심적인 전통을 구성하는 언어, 개념, 범주 등의 검증이다. (209)

 

26. 한가지 가능성은 언어, 신화, 인간과학을 급진적으로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사유하려는 제한된 방식을 말한다. 즉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우리의 의미화작업이 구체적 실체나 순수하고 자기동일적인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와 차이의 놀이에 들어갈 때에만 의미를 형성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차별적 놀이의 원천을 진정한 자연 혹은 말의 순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기원의 신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 또 다른 가능성은 이러한 향수 어린 사유방식을 포기하고, 강력한 의지를 발동하는 해석적 선택의 범위가 무제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식의가치의 재평가작업이 될 것이며, 아직도현존의 형이상학에 붙들려있는 현재의 구조주의적 이론에 (때늦었지만) 이런 재평가 작업을 응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런 비판에 힘을 실어주려면 구조의 개념을 새롭게 생각해야 하며, 구조의 차별적 요소를 전혀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 „이러한 긍정적인 자세는 비중심을 중심의 상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292) (210, 211)

 

27. 철학 너머의 길은 철학서의 책장을 넘기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나쁜 철학하기로 끝나고 만다). 그 길은 오히려 철학자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읽는데 있다.“ (288) (212)

 

28. 첫째, 데리다의 저서는 읽는 사람의 논쟁적 형편에 맞게 일부 진술만을 발췌해 가면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논의의 구체적인 문맥을 놓치게 된다.

둘째, 해체론은 철학적 이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오히려 해체론은 철학적 전거를 분명히 밝히는 조건들 속에서 철학적 이성을 진지하게 다룬다.

셋째,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중 특히 그 마지막 문장들은 엄정한 데리다식 논의의 수준에는 미달하는 텍스트이다. 그리하여 이 논문은 …. (니체식 담론의 변환을 통해서) 그 자신을 선포하는 (293) 것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끝나고 있다. (212)

 

29. 데모크리토스 같은 고대 사상가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현대의 유물론자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적 사상의 주된 특징은 무시간적, 무변화적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덜 익은 개념 (혹은 은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 중에는,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형태도 있는데 … (215)

 

30. 왜냐하면 해체론은 실체를 강조하는 미숙한 형이상학도 회피해야 하는 한편,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된 개념도 회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된 개념은 실재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의 결과로 파생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은 각종 관념론적인 기만에 빠져 버리고 만다. (216, 217)

 

31. 자신의 목적은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지시성의 문제가 전통적 이론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은 보여주려는 것일 뿐 … (218)

 

32. 데리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저기 바깥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언어가 다양한 실제적 방식으로 그 세계와 조응한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가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은 칸트의 선험적 실체론이다. 즉 구체화된 지시의 개념을 부과하고 그리하여 세계(세상)와 텍스트 사이의 생산적 교환의 차원을 봉쇄해 버리는 그런 사상이다.  … „문자를 보증이 된 외부에 성급하게 연결시키려 하거나 관념론으로부터 경솔하게 일탈시키려고 한다면, 그 때마다 사람들은 최근에 성취한 이론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관념론으로 확실히 퇴행해 버리고, 그리하여경험론과 형식론의 비유법 속에서 그것 (관념론)과 연결된다.“ (222, 223)

 

33. 확실히 데리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매우 불신한다. 이 철학자들은 마음보다는 물질, 말보다는 사물(세상)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일거에 형이상학의 저 너머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했다. …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그 어떤 사실도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텍스트에서는 모순 그 자체, 변증법 그 자체가 형이상학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난다라고. … 관념론과 현실론적 입장이 서로 부딪쳐 온 오랜 역사는, 이 두 철학이 동일한 형이상학적 노력 속에서 더 심층적으로 충돌했음을 감추고 있다. 그러므로 정말 필요한 것은, 고대 유물론자들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들 텍스트에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개념적 대립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마음과 물질의 범주를 다시 생각하려는 노력이 분명히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225, 226)

 

34. 리오타르가 볼 때, 우리는 인간진보와 해방이라는 거대한메타서사를 믿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로 진입했다. (233)

 

35. 리오타르는 화행론의 용어를 빌려서 진위를 가려내는, 과거의 진술적 기준과 실천적 효과를 측정하는 현대의 수행성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발화의 수행성은 지시적이든 규범적이든, 그 발화가 지칭하는 지시 대상에 대해서 확보한 정보의 양에 따라 수행성이 높아진다.“ (235)

 

36. 그는 철학은 일종의 쓰기이며, 그래서 철학자들이 문학비평가들처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꼼꼼한 읽기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236)

 

37. 하나의 가능한 답변은 리오타르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즉 합법화시켜 주는 이성의 과거형태가 더 이상 진정한 비판의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그 뒤 인생을 겪고 보니 (이렇게 퍼스는 쓰고 있다), 바라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진정으로 바라는 유일한 것은 관념과 사물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하여 무슨 이유를 따져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퍼스와는 달리, 데리다는 현재의 (기술적인 것과 그 밖의) 형태 속의 합리성을 구체적인 역사적 구성물로 파악하며 그래서 합리성을 궁극적인 터전의 일종으로 보지 않는다. (241, 242, 244)

 

38. 해체론은 서구의 철학, 과학, 기술 일반의 출현을 형성했던 이성의 원칙이 지닌 한계를 생각해 보려는 엄정한 노력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245)

 

39. 부브레스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뚜렷한 소명의식을 깨닫게 하고 또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문학적 양식을 강조하는 한때의 유행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지한 철학을 위협하는 두 가지는 철학을 한편으로는 사상사와 혼동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사학 (또는 텍스트 비판의 일종)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264, 265)

 

40. 철학은 의미있는 발화 (일부 철학자들이 말하는 개념적 문법)의 조건을 분명히 함으로써 언어의 의미를 밝히려는 엄정한 노력이다.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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