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 베니핏 - COST BENEFIT
조영주 외 지음 / 해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게 읽었던 <유품정리사 : 연꽃 죽음의 비밀 >을 쓴 정명섭 작가의 이름을 보고 바로 서평단 응모에 신청했다. 10년전만 해도 그 존재조차 몰랐던 단어이지만, 이젠 우리 생활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어가 된 “가성비”를 주제로 하는 단편이라니.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같은 ‘생활 밀착’ 문학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다.

우리가 “가성비”를 계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출 대비 효용을 계산하는 것이다.

가성비를 가늠하기 위해 내가 공들인 시간과 나의 노동력을 성과에 비교하거나, 더 간단하게는 당장 눈 앞에 있는 물건을 얻기 위해 내가 쓰는 비용을 계산한다.

다른 단편들은 이와 같은 일상적인 셈법을 토대로 쌓아올렸다면, 고진감래를 의도한 것처럼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정명섭 작가의 단편 <그리고 행성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유일하게 소비가 아닌 선택의 관점에서 ‘가성비’라는 주제에 접근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불멸의 고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한 <그리고 행성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우주를 배경으로, 10명의 등장인물들은 딱 한명만 우주선을 타고 탈출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뽑는 것이 ‘투자 대비 높은 효율’을 거둘지를 두고 대립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주를 배경으로, 추리에 기대 풀어놓은 ‘가성비’ 테마라니. 진부하거나 인위적인, 또는 둘다인 실망스러운 단편들 사이에서 기대가 아깝지 않았던 글이었다.

그런데 책장을 덮는 내 마음은 씁쓸했다.

최저가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진 끝에 결제하고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있을 때 드는 마음과 똑같이. 그렇게 따지고 계산했는데도 왜 후련하지 않을까. 뿌듯하지 않을까.

가성비를 ‘따진다’고 하듯이, 가성비라는 단어의 어감은 그닥 긍정적이지 않다.

우리는 가성비를 ‘대놓고’ 계산 하는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혼자 민망해지기도 한다.

물론 한정적인 유/무형의 자원을 사용하여 최대한의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선택에 가성비를 따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책에 수록된 단편처럼 우리가 ‘식기세척기를 살지, 게임기를 살지’ 와 같은 선택에만 가성비를 따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기적이다 못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고약한 셈법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꼴불견이라고 지탄하는 사회가 되길, 남에게까지 가성비를 따지며 인색하고 계산적인 것이 부끄러운줄 아는, 수치를 아는 그런 사회가 되길. 책장을 덮으며 이런 사회적 수치를 용인하지 않는 우리가 되길 바라면, 너무 멀리갔나.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 26년 차 라디오 작가의 혼자여서 괜찮은 시간
장주연 지음 / 포르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안의 어린이를 잘 보살피듯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최대치를 찍은 지금, 장주연 작가의 에세이를 제목만 보고 딱 이거다 싶었다.

내 상황에 대해 굳이 털어놓지 않더라도, 인생 선배로부터 그런 부침 나도 겪어봤고, 괜찮을 거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이 에세이의 부제는 '26년 차 라디오 작가의 혼자여서 괜찮은 시간'이다.

제목과 부제에서 에세이 전체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키워드를 꼽자면 '괜찮은' '나'인 것 같다.

에세이는 자신의 현재에 대한 긍정과 앞으로도 괜찮을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다.


나는 나와 평생 살아 가야 하기에 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느낀다.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고, 나부터 돌보는 것. 그것이 결국 부모, 형제들에게도 행복을 주는 일이 되고, 주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다정한 이웃이 되는 일이었다. 나를 사랑하면 내 안에 더 큰 사랑이 생긴다. 나에 대한 존엄이 결국 "나는 행복할까?"에 대한 답을 내려줄 거라 믿는다. "나는 반드시 행복해지겠다!" p.87


인생은 결국 혼자 사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외롭고, 누군가 있어도 외롭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군가 곁에 있어도 독립된 내가 중요하다.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홀로 서있어도 흔들림 없는 내 삶을 살 수 있어야 행복해진다. 남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야 더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나는 혼자를 즐기면서 훨씬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다. 내 세상은 나로 인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다. p.93


작가는 본업인 라디오 작가 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일들을 '부캐'로 살려 바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추구하는 삶의 결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공감 보다는 에너지가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보다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보다도, 내 테두리 밖에 있는 것들에 더 마음을 쓰고, 더 울고, 더 화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홍은전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좋은 동물이 되고 싶다. 10년 후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내가 에세이에 기대하는 것은 나와는 다른 삶의 모습, 그리고 그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신념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에세이는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단단하고, 오래 참는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도, 내가 오래오래 포기하지 않고 아파하며 아낄 지구와 사회를 위해서도.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살아온 많은 시간은 인내심으로 흘러왔다.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쉽게 갈 수단과 방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인내심을 키우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아무리 성격이 급하고, 사정이 급해도 다 때가 와야 무르익고, 수확의 기쁨을 맞는다. 내 삶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나니 더 이상 급하고 안달하는 마음을 먹지 않게 된다.

'긴 안목으로 현재를 살아라.' p.201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별도 사례 없이 도서만 지원 받아 작성했습니다.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살아온 많은 시간은 인내심으로 흘러왔다.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쉽게 갈 수단과 방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인내심을 키우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아무리 성격이 급하고, 사정이 급해도 다 때가 와야 무르익고, 수확의 기쁨을 맞는다. 내 삶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나니 더 이상 급하고 안달하는 마음을 먹지 않게 된다.

‘긴 안목으로 현재를 살아라.‘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킴 카사디안, 니콜 키드먼, 엘튼 존, 리키 마틴... 모두가 아는 이 할리우드 스타들의 공통점은 바로 대리모를 통해 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연예계에서도 연애중으로 알려졌던 두 연예인이 비밀 결혼후 미국에서 대리모를 통해 출산한 사실이 (역시나 비밀) 이혼 과정에서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요원하게 들리지만, 이미 대리모는 우리 삶에 바짝 다가온 문제이다. 이 맥락에서 <베이비팜>은 굉장히 시의적절하다.


필리핀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제인과 아테에게 돋보기를 대면서 시작한 이야기는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프리미엄' 대리모 레이건과 대리모 합숙소 골든 오크스를 빈틈 없이 관리하는 야망 가득한 메이에게까지 반경을 넓혀간다. 싱글맘 제인은 지병으로 쓰러진 사촌 아테를 대신하여 보수가 후한 신생아 입주 시터로 일하게 되지만, 곧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된다. 갓 태어난 딸 아말리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인은 아테의 소개로 골든 오크스의 대리모가 되고, 그곳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자립하기 위해 골든 오크스에 입소한 레이건과 친구가 된다. 제인과 레이건이 속한 골든 오크스를 총괄하는 메이는 중국계 이민 2세로, 카네기의 '열정적으로 행동하면 열정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를 만트라로 삼을 만큼 야심 넘치는 인물이다. 메이는 대리모와 대리모 출산에 관련된 모든 단계를 완벽히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노력하며, 호스트라는 '상품'의 마케팅과 운용을 탁월하게 해낸다. 메이가 대리모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상업적이고 계급적이다. 대리모 여성이 갖고 있는 속성 하나 하나가 쌓여 위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립된 위계에 따른 노골적인 차별은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범죄이지만, 골든오크스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레이건은 프리미엄 호스트 중에서도 성스러운 트라이팩터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백인이고 (메이는 면담을 통해 그녀가 아일랜드와 독일 혈통이 매력적으로 섞인 여성임을 확인했다), 예쁘며(하지만 섹시하지는 않은데, 이는 메이의 경험상 대단히 중요한 요건이다), 교육을 잘 받았다(듀크 대학의 우등 졸업생이니, 똑똑하되 위협적일 만큼 똑똑하지는 않은 셈이다). 만약 골든 오크스에서 일하도록 레이건을 설득해 덩 여사와 연결할 수만 있다면 ...메이는 새해가 시작되고 고작 몇주 만에 기록적인 연말 보너스를 향해 착착 나아가게 될 것이다. p.81


어떤 호스트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느냐가 호스트와 메이 모두의 보너스와 직결되어 있는 이 산업에서, 메이의 VIP 고객이자 엄청난 갑부인 덩 여사의 아이를 누가 임신하고 있는지가 골든 오크스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그리고 한 조각씩 모인 힌트와 정황이 수많은 호스트들 중 제인과 레이건을 가리킨다. 과연 덩 여사의 아이를 임신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인과 레이건은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여 보너스를 받게 될 수 있을까? 제인은 아말리아와 행복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저자인 조앤 라모스는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필리핀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와 필리핀 돌봄 노동 여성들로부터 간접경험한 현실, 그리고 실제 본인이 겪은 '아메리칸 드림'에 상상력을 엮어 <베이비 팜>을 완성했다. 현실에 기반한 생생하고 세밀한 서술은 신생아 입주 시터로 일하게 된 제인에게 아테가 주는 업무지침에서 특히나 빛을 발한다. 각 인물의 입장에서 세심하게 써내려간 심리 묘사는 멀게만 느껴졌던 필리핀 이주여성 커뮤니티를, 각기 다른 모종의 이유로 대리모가 되기를 자처한 여자들을, 그리고 어쩌면 악역으로 비치기 십상인 메이 같은 인물까지도 연민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호스트들은 마냥 절박하고 불행하기만 한 대리모들이 아니며, 때로는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힘이 닿는 한 연대하고 서로를 돕는다. 아테는 필리핀에 두고 온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수완과 리더십으로 이미 필리핀에 집을 몇 채나 소유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두고 치열하게 사는 메이 역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와의 가정을 꿈꾸는 말랑말랑한 마음도 있는 사람이다. 이렇듯 모든 등장인물에게 끝까지 돋보기를 거두지 않는 조앤 라모스의 시선이 좋았다. 모든 인물들이, 특히 호스트들이 '대리모'라는 정체성 하나만 갖고 있는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배경과 이야기를 갖고 있어서 입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다만 아기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10개월 동안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사라진 호스트들에 - '결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아를 산모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가차 없이 제거한다거나, 암이 의심되는 산모의 수술마저도 골든 오크스와 예비 양육자의 의견에 따라 수술여부를 결정한다 - 대해 쓰면서도 대리모 이슈에 관해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저자의 소극적인 태도는 다소 아쉬웠다. 해답을 찾으려 책을 펼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의견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찬반을 떠나 대리모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제3자 외에 당사자인 대리모를 선택하는 양육자와 대리모의 입장 모두 두텁게 서술되지 않아 조금 실망했다. 인종, 계급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대리모 문제에 중첩시켜 더 넓은 사유를 촉발시킨 점은 좋았지만.


대리모 문제에 관해 '넓게' 사유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별도 사례 없이 도서만 제공 받아 작성됐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96년에 태어난 나혜석은 192125세의 나이로 첫 아이를 낳는다.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은 2013년 임신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1432세의 나이로 첫 아이를 낳는다.


2017년의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대감을 느끼고, 또 눈물짓는다. 100여년이 흐른 지금도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모성의 허구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여성만의 영역인 임신과 육아

나혜석은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진다. 남편은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달콤한 말로 나혜석을 꾀었던 것이고, 어떠한 준비도 없이 덜컥 들어선 아이로 인해 전전반측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뇌는 오로지 엄마 된 나혜석의 몫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육아의 부담은 오롯이 나혜석에게만 이어져서, 나혜석은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잠에 고통 받으며 태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어머니들을 동정하기까지 하지만 남편은 도무지 나혜석과 같은 강도의 고생은커녕 고뇌조차도 하지 않는 듯하다.

한편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아직까지도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온갖 품평을 듣는다. 손이 차서, 나이가 많아서, 말라서 등등 온갖 신체적 결함을 지적당하며 여태 아이가 없는 이유를 여성인 자신에게서만 찾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너덜너덜해지지만, 남편은 변호는커녕 그녀에게 쏟아지는 인신공격을 묵묵히 듣고만 있는다. 그리고 자녀계획을 하며 자신의 임신을 회유하는 남편이 마치 임신과 육아가 남의 집 일인 양 돕겠다라는 소극적인 말만 반복하자 결국 불만이 폭발해버린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도 육아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영역으로, 육아에 있어서 남편의 역할은 항상 돕는 것에 그치고, 사회에서도 결코 그 이상을 요구하는 법이 없다. 임신과 육아를 가족의 일이 아닌 여성의 일로만 국한지음으로써 여성에게 부과되는 가정과 모성의 의무는 더욱더 심화되고, 남성에게는 자연스럽게 경제력 방면의,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더하면서 가정 내에서 여성의 경제력 의존성을 더 심화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연쇄적인 작용을 통해 보이지 않는 굴레가 되어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엄마에게만 강요되는 희생

이처럼 철저히 여성만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것이 임신과 육아이기 때문에 혼자 하는 임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여성이 육아를 위해 남성보다 더 많은 것, 특히 직업적 커리어를 희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직업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가 더 좋아서라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개인적인 열망뿐만 아니라 조선사람과 조선여자에 대한 사명감을 불태우며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을 내고, 독서를 하던 시기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나혜석은 임신으로 인해 모든 희망이 없어졌다며 원통해한다.

현재는 과거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육아를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육아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남편은 김지영에게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하라며 그녀의 휴직을 종용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젊음, 건강, 직장, 인맥, 계획, 미래도 다 잃을지 모르는 자신에 비해 당신은 무엇을 잃냐는 김지영의 반문에 남편은 말을 얼버무리고 만다.

또한 육아휴직 혹은 휴직 전 임산부를 위한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뻔뻔해져야만 한다.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은 남자 동료들의 푸념과 온갖 눈치에 임산부를 위한 회사 제도를 누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본인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은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라고 표현한다.

설사 그러한 제도를 누린다고 해도, 사회적 인식은 물론이고 직장에서의 육아휴직 제도에는 아직도 허점이 무성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는 것이 제도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제도의 이용률 상승과 함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자발적, 비자발적 퇴사로 인한 고용단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은 지난 20년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사이에 큰 폭으로 감소하는 M자형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성애라는 종교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온갖 의무와 강요 외에도 엄마라는 칭호를 부여받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여성을 괴롭히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모성애라는 신화이다. ‘갖은 병 앓아보던 아픔에 비할 수 없는 고통끝에 아기를 품에 안은 나혜석은 영원무궁하고 절대의 무보수적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모성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어머니라면 응당 마음속에 지녀야할 것으로 모두들 얘기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도 도무지 그 말에 공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모성애라는 이름하에 한국 사회가 모든 엄마들에게 제멋대로 부과하는 수많은 책임과 의무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서도 김지영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출산의 고통이 두렵지만 결국 자연분만을 선택하고 만다. 다들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면서,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내면서 아이의 건강과 발달을 위해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회에 항복한 것이다.

수많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매체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누구도 육아의 솔직한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천사같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 아름답고 위대한 어머니, 그리고 육아의 보람과 행복만을 집중적으로 매체에 노출시키고, 엄마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야 하고, 견뎌내는 것을 바로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여성이 가사와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이 사회에서는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예전에는 더했다며 가사와 육아를 후려치는 말이 여기저기서 화살처럼 날아온다.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더 편안한 삶을 영유하게 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인데, 오직 엄마들만 더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고생은 어머니라면 모두 견뎌야 하고, 견딜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어머니들, 같은 여자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모된감상기>를 발표했다. 작가 조남주 역시 어딘 가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여성1’만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 모두에게 울림을 주기 위해서 1982년에 태어난 여자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영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설정했다.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은 나혜석이었고, 현재는 김지영인 것이다.

우리 모두 나혜석과 김지영에 공감한다면, 우리가 곧 나혜석이고, 김지영이라면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사회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나혜석이 계속 글을 발표했기에 지금의 김지영이 있을 수 있었듯이,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높여야 우리가, 우리의 딸들이 더 높고 큰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크레마 카르타 알라딘 크레마 카르타

평점 :
품절


루팅 없이 열린 서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고민 끝에 선택했는데 후회하지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