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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1896년에 태어난 나혜석은 1921년 25세의 나이로 첫 아이를 낳는다.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은 2013년 임신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14년 32세의 나이로 첫 아이를 낳는다.
2017년의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유대감을 느끼고, 또 눈물짓는다. 100여년이 흐른 지금도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모성의 허구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여성만의 영역인 임신과 육아
나혜석은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진다. 남편은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달콤한 말로 나혜석을 꾀었던 것이고, 어떠한 준비도 없이 덜컥 들어선 아이로 인해 전전반측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뇌는 오로지 엄마 된 나혜석의 몫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육아의 부담은 오롯이 나혜석에게만 이어져서, 나혜석은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잠에 고통 받으며 태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어머니들을 동정하기까지 하지만 남편은 도무지 나혜석과 같은 강도의 고생은커녕 고뇌조차도 하지 않는 듯하다.
한편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아직까지도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온갖 품평을 듣는다. 손이 차서, 나이가 많아서, 말라서 등등 온갖 신체적 ‘결함’을 지적당하며 여태 아이가 없는 이유를 여성인 자신에게서만 찾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너덜너덜해지지만, 남편은 변호는커녕 그녀에게 쏟아지는 인신공격을 묵묵히 듣고만 있는다. 그리고 자녀계획을 하며 자신의 임신을 회유하는 남편이 마치 임신과 육아가 남의 집 일인 양 ‘돕겠다’라는 소극적인 말만 반복하자 결국 불만이 폭발해버린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도 육아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영역으로, 육아에 있어서 남편의 역할은 항상 돕는 것에 그치고, 사회에서도 결코 그 이상을 요구하는 법이 없다. 임신과 육아를 가족의 일이 아닌 여성의 일로만 국한지음으로써 여성에게 부과되는 가정과 모성의 의무는 더욱더 심화되고, 남성에게는 자연스럽게 경제력 방면의,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더하면서 가정 내에서 여성의 경제력 의존성을 더 심화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연쇄적인 작용을 통해 보이지 않는 굴레가 되어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엄마에게만 강요되는 희생
이처럼 철저히 여성만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것이 임신과 육아이기 때문에 혼자 하는 임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여성이 육아를 위해 남성보다 더 많은 것, 특히 직업적 커리어를 희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직업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가 더 좋아서라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개인적인 열망뿐만 아니라 조선사람과 조선여자에 대한 사명감을 불태우며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을 내고, 독서를 하던 시기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나혜석은 임신으로 인해 모든 희망이 없어졌다며 원통해한다.
현재는 과거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육아를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육아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남편은 김지영에게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하라며 그녀의 휴직을 종용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젊음, 건강, 직장, 인맥, 계획, 미래도 다 잃을지 모르는 자신에 비해 당신은 무엇을 잃냐는 김지영의 반문에 남편은 말을 얼버무리고 만다.
또한 육아휴직 혹은 휴직 전 임산부를 위한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뻔뻔해’져야만 한다.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은 남자 동료들의 푸념과 온갖 눈치에 임산부를 위한 회사 제도를 누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본인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은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라고 표현한다.
설사 그러한 제도를 누린다고 해도, 사회적 인식은 물론이고 직장에서의 육아휴직 제도에는 아직도 허점이 무성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는 것이 제도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제도의 이용률 상승과 함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자발적, 비자발적 퇴사로 인한 고용단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은 지난 20년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사이에 큰 폭으로 감소하는 M자형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성애’라는 종교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온갖 의무와 강요 외에도 엄마라는 칭호를 부여받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여성을 괴롭히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모성애라는 신화이다. ‘갖은 병 앓아보던 아픔에 비할 수 없는 고통’ 끝에 아기를 품에 안은 나혜석은 영원무궁하고 절대의 무보수적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모성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어머니라면 응당 마음속에 지녀야할 것으로 모두들 얘기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도 도무지 그 말에 공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모성애라는 이름하에 한국 사회가 모든 엄마들에게 제멋대로 부과하는 수많은 책임과 의무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서도 김지영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출산의 고통이 두렵지만 결국 자연분만을 선택하고 만다. 다들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면서,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내면서 아이의 건강과 발달을 위해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회에 항복한 것이다.
수많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 매체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누구도 육아의 솔직한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천사같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 아름답고 위대한 어머니, 그리고 육아의 보람과 행복만을 집중적으로 매체에 노출시키고, 엄마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야 하고, 견뎌내는 것을 바로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여성이 가사와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이 사회에서는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예전에는 더했다며 가사와 육아를 후려치는 말이 여기저기서 화살처럼 날아온다.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더 편안한 삶을 영유하게 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인데, 오직 엄마들만 더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고생은 어머니라면 모두 견뎌야 하고, 견딜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어머니들, 같은 여자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모된감상기>를 발표했다. 작가 조남주 역시 어딘 가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여성1’만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 모두에게 울림을 주기 위해서 1982년에 태어난 여자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영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설정했다.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은 나혜석이었고, 현재는 김지영인 것이다.
우리 모두 나혜석과 김지영에 공감한다면, 우리가 곧 나혜석이고, 김지영이라면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사회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나혜석이 계속 글을 발표했기에 지금의 김지영이 있을 수 있었듯이,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높여야 우리가, 우리의 딸들이 더 높고 큰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