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지음, 이혜인 옮김 / 푸른역사 / 2021년 4월
평점 :
우연하게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을 읽고나서 조선의 유학을 조금씩 읽게 되었다. 도대체 조선의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학문을 했었나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학자라면 당연히 주희가 쓴 책을 단순히 반복하여 읽고 요약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청나라의 확립, 일본의 성장, 서구의 진출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하에서 조선 유학자들도 나름의 고민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기대도 있었다.
또 다른 우연으로 강지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소개에서 “조선 유학사는 형성 과정에서도, 근대적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도 국경을 초월해 있었다”라는 언급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줄 것으로 기대를 품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책은 애초에 품었던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저자가 언급한 “조선 유학사”를 “조선 유학”으로 오해했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책은 조선의 유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먼저 저자 강지은의 문제의식을 살펴보자.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조선 유학사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유학은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준담론 주자학이 주류였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실학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식으로 요약된다. 실학은 박세당, 유형원으로 시작하여 박지원의 북학파, 정약용의 실용파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실학의 맹아는 주자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격물치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강지은은 이러한 유학사는 일본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안티테제이지 결코 조선 유학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강지은이 생각하는 조선의 유학사는 무엇인가? 강지은에 따르면 조선 유학자의 사명은 주자학적 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주희가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 둔 경서의 의미를 확정하고 정리하는 책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송시열과 그의 문하는 북적인 청이 중화의 영토를 지배하게 된 사태에 직면하여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로서 중화의 도리를 체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한 그룹이다. 동시에 이들은 주자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에도 누구보다 힘을 쏟았다. … 그런데 이 <집주>를 주희의 서간문 등과 대조해 보면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주희의 생애 후반 <집주>의 체계가 성립되기 전에 주희의 사서 해석은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성립 후에도 거듭해서 큰 폭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 조선 유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이나 모순들을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무엇이 주희의 정론인지 확정하고자 하였다. 주희의 ‘만년 정론’을 확정한다는 이 주제는 학술계의 가장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 주희가 최후에 저술한 글이야말로 그가 마지막으로 확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같은 단순한 방법을 쓰지 않고, 주희 학설의 성립과정을 추적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해 내고자 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이 주자학 학설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쉬웠다. 정작 어려운 점은 어떤 새로운 주장이 주자학 학설의 완성으로 나아가는지 아니면 주자학을 왜곡하는 사문난적인지를 구분하는 방법론이다. 흥미롭게도 조선 유학자들이 이를 구분하는 방법론은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었다.
문언의 득실을 따지기 전에 그 마음가짐이 이미 좋지 않으므로 더욱 애석합니다. … 윤휴는 주자를 모욕하고 자기 학설이 옳다고 하였으나, 조익은 마음에 의심을 품고 지자에게 질정을 구한 것일 뿐이다. 두 사람은 흑과 백처럼 확연히 다르다. … 주자학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손한 태도는 비난을 받았지만, 주희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일 자체가 곧바로 배척을 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양 3국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학문을 하지는 않았다. 원나라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정주의 논저를 본래의 형태로 섭렵하기 보다는 간략본이나 선집을 통해서 요점만을 취했다. 막부시대 일본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공맹을 직접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사이는 자신의 공부를 돌이켜 보며 다음과 언급한다.
16-17세 즈음에 주희의 주석본으로 <사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27세에 <태극론>을, 28-29세경에는 <성선론>을 저술하고 … 그 온축된 뜻을 깊이 터득하여 송나라 유학자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나 자신은 생각하였다. … 최종적으로 모든 주각을 제거하고 직접 <논어>와 <맹자> 두 책을 체득하는 일을 열심히 추구하기로 하였다. 짧은 시간에도 사색을 계속하고 차분히 체험하여 완전히 정착할 곳을 얻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이전에 지은 의론들은 모두 공맹에 상반되고 오히려 불교나 노장 사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 유학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특이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이유는 조선에서 주자학이 관학이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과거시험의 표준답안이었고 국가의례의 근거였다. 어린 시절부터 읽어야 하는 경서였고, 관료가 되어서도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는 근거였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권력자는 사무라이였고, 주자학은 단순히 장식품에 불과했다. 일본과 중국은 조선과는 달리 관료로서가 아니라 소외된 소수의 학자가 골방에서 전개하는 학문이었기에 자유롭게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고 조선 유학이 독창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한다.
강지은은 책을 마무리하며 조선 유학자들을 변명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술이부작, 즉 ‘이미 있는 것을 서술할 뿐 새로운 설을 창작해 내지 않는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저술을 했습니다. … 누군가의 새로운 해석이 기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독창성을 지닌다고 해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20세기 진입 전후에 들어온 서양적 학술 관점을 과도하게 적용한 것이거나, 조선시대 유학사를 주자학 맹종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유학사를 부정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자는 실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실증을 강조하며 식민지 시대에 제기된 문제의식과 연구는 사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가 역사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은 결국 이야기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흥미로워야 한다. 특히 역사는 그러해야 한다.
실증에 근거한 이야기를 대중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서 더이상 흥미로워하지 않을 때에 학문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할까? 실학연구는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줄 무언가를 찾으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작업이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역사 연구자는 과거를 왜곡해서는 안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대중의 흥미에 부응한 지적인 태만이다. 그러나 지적인 태만을 피하기 위해서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능이다. 이러한 무능에 대한 비판은 조선 유학자와 조선 유학자를 연구하는 현재의 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능을 실증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강지은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 경우에도 17세기 유학자들이 심, 성, 이, 기를 둘러싼 토론은 여전히 ‘허위’로서 자리매김되었을까? 20세기 초반이라는 긴박한 시대에 중요했던 ‘독창’과 ‘실천’이라는 가치가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이 경서를 해석할 때도 중요했을까? 즉 ‘독창’이나 ‘실천’을 17세기 유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일까?
아마도 저자는 독자가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기대한 듯하다. 하지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17세기 유학자들이 논의한 심, 성, 이, 기가 심오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인권으로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구가 세계사를 주도하고 있지만 중세의 기독교 철학은 철학사에서 각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저자가 식민지 시대의 반동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학문의 발전은 방법론의 발견과 일치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는 판단기준이 방법론이다. 저자가 파악하는 조선 유학의 본류는 오늘날 인터넷 댓글 논쟁과 유사하다. 처음에는 내용을 논의하다가도 결국은 “싸가지가 없다”는 식으로 태도를 따진다. 이런 수준의 학문은 솔직히 학문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당시의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조선시대에 학문이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열심히 읽는다고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조선유학자와 오늘날 고등학생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선의 성리학에 조금 관심을 가진 것은 오늘날 우리 일상과는 전혀 관계조차 없어진 그들이지만 나름 논쟁하며 뭔가를 추구하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시간낭비를 멈추어야 할 것 같다.